‘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에서 나타난 타인에 대한 공감과 관심, 사회의 이정표 돼야

▲소설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1980).

 

신자유주의 시대의 우리는 무한경쟁 체제 속에 내던져졌다. 사람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경쟁과 배제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각 개체들은 자력갱생의 ‘외로운’ 길을 택했고, 그렇게 현대인들은 타인과의 건강하고 행복한 ‘관계’ 맺기에 실패했다. 그로부터 사람들은 점점 더 자신에게 몰두하며 하나의 원자처럼 분리된 개인적 삶을 영위해왔다. 이처럼 개별화된 인간들은 고립감과 실존적인 고독함에 황폐해진 내면을 겨우 붙잡고 살아가는 것이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에 나오는 인물들 또한 작품의 초반에는 이러한 모습을 보인다.

앤과 하워드 부부는 아들 스코티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제빵사에게 케이크를 주문한다. 하지만 스코티는 그날 사고로 갑작스럽게 죽고 만다. 부부는 소중한 아이의 죽음에 절규하며 슬픔을 느낀다. 하지만 간호사와 의사들은 심장마비라는 사인을 일러줄 뿐,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그들은 차갑게 형식화된 세계에서 자신의 직업의식에만 투철했기 때문에 스코티의 죽음을 수많은 환자들의 죽음 중 하나로 보는 것이다. 의사에 의해 균질화된 죽음은 부부가 느끼는 마음의 통증을 가중시킨다. 이러한 부부와 의사 사이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간극은 인간을 고립시키고 더 외로운 존재로 만든다. 의사와 같이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누군가의 죽음과 비극에 있어 무감각하고 자신의 일상에만 집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자기중심적 모습의 단면은 세월호 사건이라는 비극이 벌어졌을 때 목격됐다. 그 당시 ‘우리 아이는 아니어서 참 다행이야’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러한 소시민적 태도로부터 발생하는 단절감은 우리 사회와, 그 속에 살아가는 인간들을 더 고독하고 외롭게 만든다.

이러한 원자화된 개인적 삶에서의 해방, 즉 진정한 유대와 연결은 같은 경험을 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스코티의 죽음을 들은 제빵사는 조심스럽게 앞치마를 벗어버리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앞치마를 벗어버린다’는 의미는 그가 ‘제빵사’라는 기능주의적 정체성이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서 손 내밀고 다가가는 것이다. 인간 삶의 본질인 ‘고독함’은 제빵사가 그들을 위해 건네준 따뜻한 시나몬 롤을 통해 치유되며, 비인간적인 관계는 회복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관계의 연결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 질 들뢰즈의 ‘공명’과 맥락을 같이 한다. 공명이란 둘 이상의 존재들이 ‘조화’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 존재들 사이의 공명을 이루는 것이 서로가 가진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아름다운 화음이 생성된다는 점이다. 이 화음은 타인과 나누는 감정적 교감과 공감을 통해 만들어진다.

공명은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이정표가 될 수 있다. 고독한 인간 존재는 타인과의 관계와 의존을 통해서만 세계 안에서 살아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삶과 죽음에 꺼져버린 관심을 되살리는 일은 결국 자신의 삶에도 깊숙이 관여하는 일이다. 우리는 모두 휴머니티라는 이름 아래서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상호 간의 유기적 관계를 인지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타인과 사회 전반에 대한 공동체적 시각이 요구되는 오늘이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