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弱者(약자) 편에서 公益(공익)위해 봉사

  응원이란 말은 매우 친근감을 주면서도 異質(이질)감을 주는듯하다. 흔히 사람들은 응원을 운동장에서 하는 종류의 것으로 연상하기 쉽지만 장소의 특징에 따라 多樣(다양)한 모습으로 일상생활에서 나타난다. 이 말은 매우 함축성을 지니는 까닭이다.
  항상 弱者(약자)의 편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응원해 주는 진실한 후원자인 것이다. 현대와 같이 메마른 사회에서는 이러한 유형의 응원이란 흔하지 않지만 절실히 요구되는 大衆(대중)봉사이며 불교술어로는 ‘布施(보시)’인 것이다. 신문을 통해서, 혹은 다른 방송을 통해서 보도되었던 夜間(야간) 靑少年(청소년)의 배움의 전당인 職業學校(직업학교)가 헐리게 되자 대학생을 중심으로 조직된 敎師(교사)들이 학교를 구하기 위해 껌을 팔면서 학생들을 보살펴주는 것도 응원이며, 또 몇몇 독지가들이 財政的(재정적)인 뒷받침을 해주는 것은 흐뭇한 人情美(인정미)를 보여준 응원이었다. 응원의 본질이 協同(협동)과 단결에 있다면 위와 같은 정신은 이에 부합하는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다음에는 고아들이나 양로원에서 生活(생활)의 美(미)를 찾고 있는 사람들을 보자. 그들 역시 사회를 위해 奉仕(봉사)를 하고 있는 훌륭한 분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응원을 받는 것이 주는 것보다 더 요청될 것이다. 사회가 이들을 外面(외면)하고 支援(지원)하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公益事業(공익사업)은 有名無實(유명무실)하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응원은 받는 쪽과 주는 쪽의 호흡이 一致(일치)되어야만 응원의 眞價(진가)를 발휘할 것이다. 또한 中立的(중립적) 입장에서 응원은 받는 쪽과 주는 쪽을 의식하면서 지켜봄도 뜻있는 일이 아닐까 한다. 그렇게 될 때는 응원을 받는 쪽과 주는 쪽의 이해관계는 서로 상반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응원을 받는 쪽은 주는 쪽보다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며 진취적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이 사실임은 否認(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운동경기에서 응원은 어떠한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종류의 응원은 모든 응원의 代名詞(대명사)처럼 쓰여지고 있으므로 잘 알려져 있다. 선수와 應援團(응원단)의 호흡이 일치될 때 경기에서 좋은 성과를 期待(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경기에 지고 있다고 해서 응원을 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것은 응원이 아니라 중립적인 觀戰(관전)에 불과하다. 물론 게임에 지고 있는 처지에서는 응원을 할만한 심적 여유가 없겠지만 그렇다고 무성의하게 구경만한다면 응원을 받아야 할 선수의 사기는 크게 위축되어 좋은 경기를 할 수 없게 되며 결국은 그 경기에서 敗(패)하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이 응원은 단결과 협동을 要(요)하는 것이므로 경기에서 응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큰 것이며 또한 의의가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응원은 다양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 특징 역시 각기 다르게 나타나므로 형태에 따른 특징을 살린 응원을 추구해야 될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응원이 그 특징을 살린 채 支持者(지지자)와 피지지자간의 호흡이 일치될 때 진정한 응원의 의의가 드러나는 것이며, 여기에서 진실된 응원으로서의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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