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지기 쉬운 가을에, 하루를 逍遙(소요)해 보고

  가을은 하늘에서부터 오고 그 하늘아래 사는 사람들은 행복하게 보인다. 아무것도 떠있지 않은 하늘을 보면 그 푸른 속으로 내 몸은 한마디씩 떨어져서 함께 섞여지는 듯하다. 가을은 곧 가을하늘인가 보다. 그 하늘아래서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든 가을이 함께 숨 쉬며 어떤 모습을 해도 그에 어울린다. 가을에는 고독해지려는 이가 능히 그러할 수 있고 사랑하던 사람과 잠시 이별하려는 이가 그런 상태로 되는 것이 쉽다. 더구나 가을을 잊고 무엇에 몰두하려는 사람에게까지 그러하도록 허용해준다.
  가을이면 세상은 더 자유로워진다. 벤취에 반쯤 누운 사람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고 제멋대로 놓여 있는 어지럽던 물건들도 제자리를 찾은 듯이 여유 있어 보인다. 여지껏 미루어온 어려운 문제들도 가을이면 잠시 내게서 떠나가 버려 오늘하루 가을을 만족히 보내는데 어려움이 없다.
  계절의 중간쯤에 가을이 있는 것은 한주일이 휴일로 해서 생기 있게 되는 것과 같다 가을에 휴식을 취해두지 않으면 그 다음 가을까지 안타까운 후회를 거듭해야 한다. 봄과 여름을 지내는 동안 내 몸은 종기와 생채기로 온전치 못하고 마음은 급히 달아오른 열기와 욕심들로 어지럽혀있다.
  이 가을에 엄청난 문제를 풀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사계(四季)의 공간에서 가을만은 뚝 떼어다가 몸을 치료하고 마음을 가라앉히는 여분의 일에만 쓰고 싶다.
  가을은 내게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내버려 둔다. 그래, 가을이 가는 것은 임과 이별하는 것과 같이 안타깝다. 자유로운 가을이 두려워지기 쉬운 것도 이 순간들을 아끼려고 하는 욕심 때문이다. 가을의 하루쯤은 아무것을 하지 않아도 좋다. 다음날 아침의 상쾌한 기분을 위해서는 오늘 하루의 허송이 필요할는지 모른다. 아니, 허송세월(고통을 즐거움으로 바꾸려는 시간의 소비)은 ‘시간의 극치’를 위해서 꼭 있어야할 것 같다.
  가을에는 얼굴을 가꾸는데도 얼마간 마음을 써야 한다. 여지껏 돌보지 않은 얼굴은 더없이 흥하고 사나와 보일게다. 얼굴로 해서 나의 모든 비밀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내 마음이 깊고 맑으면 얼굴도 깊이 맑아있고 욕심이 도사려 있으면 얼굴은 추해 보인다. 그래 착한 사람들만 생각하는 것이 가을에는 어울리겠다.
  내게 베토벤을 닮은 한 친구가 있었다. 그는 베토벤의 초상을 무척 소중히 여겼다. 그 후로 나도 베토벤의 초상에서 정렬을 볼 수 있었다. 베토벤의 눈, 코, 입이며 진한 눈썹과 머리에서까지 천재의 음악성이 엿보이는 듯했다.
  친구의 얼굴은 베토벤과 전혀 달랐지만 그가 베토벤을 좋아한 후부터 그와 베토벤은 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가을 저녁에 집을 나서서 어디 바람맞이 언덕에라도 오르면 난 한 개 나무와 같이 움직일 수 없어진다. 저녁바람이 싸늘하고 만삭이 된 달은 제 빛을 마냥 흘리고 있다. 가을이 더욱 가을다워진, 이렇게 아름다운 저녁이면 나 어떤 악에 바친 신념도 의지도 스르르 녹아버리고 만다.
  언덕 밑으로 해서 길가는 사람들과도 허물없이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

...바람에 설레이는 푸른 그늘과 / 나무통만있으면 / 나는 행복한 디오게네스 /

라고 읊은 詩人(시인)의 디오게네스가 이 가을엔 내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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