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題通度寺戒壇(제통도사계단)’ ‘又袈裟(우가사)’

  無衣子(무의자)는 松廣寺(송광사)의 16國師(국사) 중 第(제)2世眞覺國師(세진각국사) 慧諶(혜심)(一一七八(1178)~一二三四(1234))의 自號(자호)이다.
  그의 詩(시)는 一部(일부)가 紹介(소개)된 以來(이래), 아직 體系的(체계적)인 발굴이나 硏究(연구)는 不振(부진)한 편이다. 따라서 無衣子(무의자)의 공헌에 비추어 그 著述(저술)이나 詩(시)에 關心(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간 필자의 조사로는 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 公州牧驛(공주목역) 院條(원조)에서 한 首(수)를 얻을 수 있었다.
  필자는 지난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양산 通度寺(통도사)의 懸板(현판)을 拓本(탁본)조사한 바 있다. 이들 조사된 百(백)여 건의 현판 가운데서 二首(이수)의 無衣子(무의자) 遺詩(유시)를 얻을 수 있었는데, 이는 고려 一然(일연)에 의해 이미 三國遺事(삼국유사)에 인용된 바 있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인용된 無衣子(무의자) 시는 全文(전문)이 아니고 末句(말구) 2귀에 불과했음을 이 시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따라서 발견된 遺詩(유시)는 全文(전문)으로서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완할 수 있으므로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발견된 시는 ‘題通度寺戒壇(제통도사계단)’ ‘又袈裟(우가사)’의 2首(수)이다. 이 시를 보존한 현판은 통도사 梵鍾樓(범종루)의 상당히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현판의 크기는 가로 83cm 세로 37cm에 字徑(자경)은 약 4cm로서 상당히 큰 편에 속해 있었다.
  먼저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題通度寺戒壇(제통도사계단)

釋尊舍利鎭高壇覆釜腰邊有火瘢(석존사이진고단복부요변유화반)
聞道黃龍災塔日連燒一面示無間(문도황룡재탑일연소일면시무간)

又袈裟(우가사)

殷懃稽首敬歸依是我如來所着衣(은근계수경귀의시아여래소착의)
回億靈山猊座上莊嚴百福相巍巍(회억령산예좌상장엄백복상외외)
貞祐九年壬年仲冬高麗曺(정우구년임년중동고려조)
溪山修禪社無衣子眞覺述(계산수선사무의자진각술)

<통도사 계단>
석존사리는 높은 계단을 눌렀고/ 浮屠(부도)의 허리에는 불자주역연하네/ 들건대 황룡사 탑이 불타던 날에/ 이어 탄 일면에도 틈난데가 없었다네/

<가사>
은근히 예배하고 공경하여 귀의하니/ 이것이 우리 如來(여래) 입으시던 法服(법복)일세/ 이로써 靈山(영산)의 獅子座(사자좌)를 생각하노니/ 百福(백복)을 장엄한 그 모습 높고 높구나/

  貞祐(정우)9년( 一二二二(1222))은 題詩(제시)한 해로서 이해에 修禪社(수선사)(松廣寺(송광사))의 無衣子(무의자)가 통도사를 예방하고 이 같은 시를 읊은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다시 이 詩(시)와 삼국유사와의 관계인데, 삼국유사 卷三(권삼)‘前後所將舍利(전후소장사리)’條(조)에 의하면 일연은 속전을 인용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皇龍寺(황룡사)탑이 불타던 날에(통도사의) 돌솥 동쪽부분에 큰 班紋(반문)이 생겨 지금까지 그대로 있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 내용은 황룡사의 9층 木塔(목탑)이 景文王(경문왕) 12년(八七二(872))에 3次(차)의 중건을 본 후 光宗(광종) 4년(七五三(753))에 災害(재해)를 입었고, 또 바로 이때 통도사의 釋尊舍利塔(석존사리탑)에 火瘢(화반)이 생겼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다. 이 같은 사실은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이해될 것이다.
  즉 唐(당)으로부터 귀국한 慈藏法師(자장법사)가 가지고 온 佛舍利(불사리)를 皇龍寺塔(황룡사탑), 太和寺塔(태화사탑), 그리고 일부는 佛所着(불소착) 袈裟(가사)와 함께 통도사에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황룡사탑이 불타던 날에 통도사 佛舍利塔(불사리탑)에 반문이 생겼다는 것은 황룡사의 탑과 통도사의 탑이 정신적으로 相通(상통)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또 같은 사실들이 민간에 이야기로서 전해오던 것을 無衣子(무의자)가 通度寺戒壇(통도사계단)(佛舍利塔(불사리탑))을 참배하고서 詩(시)로써 남겼다고도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 시의 발견은 삼국유사에 보이는 慈藏(자장)건립의 國刹(국찰) 皇龍寺(황룡사)와 通度寺(통도사)의 정신적 교류를 재인식케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할 것이다. 또 중요한 것은 無衣子詩集(무의자시집)의 필사본을 복사하여 소장한 본교 李鍾益(이종익)교수의 교시에 의하면 시집의 詩(시)는 ‘通度寺鍾閣抄集(통도사종각초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木造懸板(목조현판)의 조성연대가 貞祐八年(정우8년) 無衣子(무의자)가 시를 쓴 당시의 친필이 아니라할지라도 지금으로서는 그 조성연대가 가장 앞서 있고 확실한 내용이며, 동시에 삼국유사의 기록을 다소나마 보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懸板題詩(현판제시)의 史料的(사료적) 가치는 자못 크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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