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詩(시)가 주는 위협과 기대에 절망

  요즈음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가 점점 거칠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 무슨 악에 바치고, 지치고, 그리고 맨숭맨숭한 정신으로는 차마 못 읽겠는 절망의 노래들이다. 누가 별로 읽어주지도 않는 듯싶고 또 읽는다 하더라도 별로 아는 체도 하지 않기에 그들의 노래는 더욱더 비장하다.
  악에 바치고 지치고 절망하는 그 외로움에 압도당해서인지 나는 요새 3, 4년 동안 거의 시를 쓰지 못하고 지낸다. 단골술집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낚시질이나 돌 줍는 일을 핑계 삼아 여기저기 싸돌아다니고 몇 시간씩이나 텔레비전 앞에 누워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는 동안, 나를 시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줄어든다.
  어쩌다 시를 쓰고 싶기도 하고 더러는 써보기도 하지만, 누가 왼눈 하나 깜짝하지도 않을 소리나 해대면서 그래도 내 나름대로 우리 시대를 정직하고, 성실하고, 양심적으로 살았느니라하고 자위하기도 쑥스러운 노릇이고, 빛바랜 서정시들은 또 너무 싱겁다. 어쩌다 청탁이 와도 보낼만한 시가 없다.
  연전에 신문사에 다니는 K兄(형)이 시를 보내달라고 급한 말로 조르기에 엉겁결에 보낸 일이 있었는데 다행히 발표되지 않았다. 몇 주일 지난 후에 무슨 모임에서 K兄(형)을 만났더니, 시가 너무 거칠어서 못써먹겠더라고 한다. 좀 고운 시를 써달라고 한다.
  고운 시…. 나는 어쩌면 정말로 그런 고운 시를 쓰면서 나의 절망에 익숙해질 것만 같고 익숙하게 타락해갈 수도 있을 것만 같다. 그런 고운 시가 주는 위협과 기대 때문에 가끔 잠을 이루지 못한다.
  내가 썼던 ‘윤동주시론’은 그런 점에서 나에게는 약간의 의미는 있다. 시인이 그 시대의 아픔이 어떻게 건너왔는가, 그의 아픔이 어떻게 시의 순수성을 부활시킬 수 있었던가를 나에게 생각나게 하는 점에서 말이다.
  그런데 나는 어쩌다 무슨 바람기로 그 윤동주시론을 신춘문예에 당선시켰는지 참 후회막급하다.
  10년 전에 내 詩(시)가 신춘문예에 당선될 때 그때 당선소감이라는 것을 쓰면서 ‘쑥스럽다’는 말을 썼던 생각이 나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그 쑥스러움은 너무나 당연한 處女的(처녀적)인 것이었던 것 같고 지금의 이 후회막급은 한번 결혼에 실패했던 여자가 바람기로 엉겁결에 재혼해버린, 후회하기조차도 어색할 그런 노릇인 것만 같다.
  선배이자 은사이신 시인 박항식선생님께서는 내가하는 짓들을 하도 답답하게 여기셨던지, 마치 바람기 많은 여자 나무라시듯 <길을 또 터놓았으니 이제 미친척하고 아무 짓이나 좀 해보라>신다.
  나는 억울하게 여길 입장도 못되고 해서 흐지부지 눈길을 피하고 말긴 했지만 내 어처구니없는 바람기에 대한 참회도 할 겸 나는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를 좀 더 오래오래 보고 있을 작정이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가 외로움과 절망에 醉(취)해 있는 동안, 우리가 겪는 아픔이 그들의 외로움과 절망으로 하여 얼마나 감격스러울 수 있는가를, 그 아픔 때문에 그들의 절망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었던가를 좀 더 맨숭맨숭한 정신으로 보고 있을 작정이다.

▲1942년 전북김제에서 남.
▲1965년 동국대 국문과 졸업
▲1968년 대한일보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1975년 원광대 대학원 졸업
▲1978년 조선일보신춘문예 평론부문에 ‘윤동주시론’이 당선
▲지금은 전주 신흥고교 재직 중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