情熱(정열)로서 살아갈 때만을 난 삶이라고 부른다

  賣票(매표) 첫날, 친구 녀석은 아예 서울역 근처 여관방에서 죽쳤다. 通禁(통금)해제 몇 分前(분전)에 어슬렁어슬렁 서울역으로 기어들어가면서 으스스 추워오는 몸을 으쓱해보곤, 벌써 자기와 같은 족속들의 떠드는 소리에 발을 재촉했다. 히끄무레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몇몇 안되었지만 몇 십명쯤 되어 보여 겁을 덜컹 났던 것이다. 다행히 스무번째쯤 줄을 섰다. (그 녀석 말로는 꼭 스무번째라고 강조했다.) 친구 녀석은, 자취하고 있는 九老工團(구로공단)에서 나와서 타야하기 때문에 오전 열시쯤 되는 표를 사려고 했으나 賣盡(매진)이었다.
  아침 7시 10분 표를 겨우 사들고 사람 속을 비집고 나왔다. 매표 첫날인데 설마했던 자신이 우습게 여겨졌다. 그러리라고 자꾸 생각하면서도 속아왔던 제 자신의 허탈감에, 녀석은 눅눅한 빈속에 소주잔을 붓지 않을 수 없었다. 여관방에 묵어가면서까지(그런 사치스런 생각으로) 집에 내려가려고 했던 제 자신이 못내 측은해 보인 것이리라.
  그 말을 듣고 내려가기를 포기해 버린 나도 서울에서 한 번도 본 일이 없던 둥근 보름달을 볼 땐, 어쩐지 술을 퍼마시지 않고는 못 배겼다.
  해마다 추석 때가 되면 앞뜰에 수천개씩 열리는 대추를 손수 따서 茶禮(다례)를 올리고 친척집에 돌리곤 했다. 자취방에서는 퀴퀴한 사내냄새가 났다. 술잔 옆에 놓인 당근조각을 보니 더욱 대추의 상긋한 맛이 당기는 것 같다. 故鄕(고향)에 내려가 친구 녀석들과 같이 마실 이 술잔이, 변두리 자취방에 혼자 쨍하니 남은 내 자신의 모습처럼 볼품없다. 술잔에 술을 따르다가 문득, 초라한 내 모습과 비교되는 낮에 본 여자애들이 생각난다.
  고향에 가려고 한 장소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듯한 나보다 두세 살 어려 보이는 여자애들이, 길거리에 짐을 놔두고 저희들끼리 기뻐서 호들갑을 떨던 모습이 생각난다. 저희들끼리도 오랜만에 만난 모양이었다. 친구 녀석이 공단근처에 살고 있어 그들의 차림과 행동거지에서 곧바로 직업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왜 지금 그들이 생각나는지 난 알 수 없다. 단지 그들을 생각하며 흐뭇해하고, 그들의 밝은 표정에서 괜히 기분이 좋은 것이다. 그들의 찌들고 이그러진 삶에서 탈출하는 것 같은 해방감을 나도 같이 공감해서일까? 그 애들이, 나 같은 녀석도 포함되는 우리네 신분의 인간들에게 보낸 글을 읽은 적이 있기에, 나는 눈물이 나오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냥’이라고 해야 할 그런 눈물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속으로 몇 번씩 되뇌이고 있다.
  그들과의 만남은 지나쳐 버린 낮에의 만남이 아니다. 지금 이렇게 만나서 함께 친교하고 있다. 나에게 있어 만남은 ‘意味(의미)의 잉태’이다. 그 意味(의미)의 內容(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나에게 그것은 귀중하다. 그것들 하나하나의 조각들이 모여 커다란 意味(의미)를 다시 잉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러한 의미 하나하나가 시시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내 자신의 ‘存在(존재)’와 깊이 밀착되었을 때만이 그 意味(의미)는 잉태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감동에서 숭고한 정열로 바뀐다. 그 정열은 결코 꺼지지 않는다.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것이고, 보이지 않고 타오르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정열의 불꽃이 왜 식지 않는지를 알고 있다. 그 ‘타오름’을 삶이라고 부를 때, 生(생)은 ‘意味(의미)의 연소’이고, 나에게 있어 그것은 存在(존재)의 긍정이다. 결코 난 존재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 존재는, 내면적 존재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자기 혼자만의 존재를 고집하는 인간들을 난 경멸한다. 하이데거는 그러한 인간들을 가리켜 ‘존재 망각자’라 했다. 바로 고향을 상실한 자이다. 그러한 자들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그들은 자신을 고집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 모든 것을 다 포괄한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모든 것으로부터 스스로 단절시켜 버리고 만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存在(존재)가 ‘전존재자의 存在(존재)’에 본질적으로 속한다고 한 점에 있어 위대하다고 난 생각한다. 자신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이 거대한 그러면서 상이한 또 다른 存在(존재)가 있다는 것을 忘却(망각)한 박약이다. 그들은 存在(존재)와 存在(존재)간의 관계를 애써 단절시키려 한다. 그래서 存在(존재)와 存在(존재)간의 만남을 회피하고, 만남에서 오는 意味(의미)를 否定(부정)한다. 그들에게 있어 상이한 또 다른 存在(존재)라는 것은 수단의 한 편법에 지나지 않으며, 어느 정도에 이르면 그들은 生命(생명)의 탈색작업까지도 주저하지 않고, 기호에 맞는 색깔로 염색 할 수 있는 훌륭한 염색 기능공이 되는 것이다.
  난 인간의 또 다른 존재를 부정하는 자는 그 자신이 스스로 또 다른 존재에 의해 부정되고 마는 것을 경고하고 싶다.
  인간은 이러한 관계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만큼 인간은 쉽고 편리한 存在(존재)이다. 내가 사회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내가 민족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거기에서 나의 존재에서 우러나오는 ‘의미’가 무엇이고 또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 비로소 이러한 관계를 의식하고 의미를 발견할 때 느끼는 정열로서 살아갈 때만을 난 삶(生(생))이라고 부른다. 또한 그것을 거부하는 삶을 난 죽음(死(사))이라 부르기도 한다.
  술잔이 비어있다. 그 빈 술잔에 채워야 할 의미는 나태에서 나오는 감정의 찌꺼기도, 환상적 遊戱(유희)도 아니다.
  이제까지 하나하나 모아왔던, 내가 외치는 삶의 意味(의미)의 조각들이, 낮에 본 그 고향 찾는 여자애들의 웃음같이 환하게 흩어질 때, 그때 난 비로소 무언가 앞에, 이제부터 다시 살아가겠노라고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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