精神(정신)질환자 作品展(작품전)을 보고

  ‘아리아 다 카포(Arai Da capo)라는 戱曲(희곡)이 있다. 20세기 美國(미국)의 여류시인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의 ’끝없는 아리아‘라고 옮겨지는 작품이다. 그것은 喜劇(희극)과 悲劇(비극)이 끝없이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 인생을 표현하고 있는데, 결과적으로는 비극적인 삶을 그려내고 있다. 그런데 後者(후자)보다 前者(전자)가 더 心中(심중)을 저리게 함은 무슨 이유에설까?
  나는 오늘 神(신)을 만났다. 宗敎(종교)를 만났다. 인간보다도 못한 神(신)을 만났다. 나는 그 ‘人間(인간)보다도 못한 神(신)’이란 소리를 서슴없이 할 수 있었다. 신이란 자들이 하는 일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前記(전기)한 희곡 중의 悲劇(비극)대목에서 코터너스라는 무대감독이 나온다. 나는 그를 神(신)이라 생각한다. 비극배우를 희극무대에 당연한 것처럼 올려 세우는 그를.
  나는 미친 자들의 空間(공간)에 서서 그들과 내가 구별이 되지 않음을 느꼈다. 지난 여름 여행에서 만난 狂人(광인)을 생각했다(그는 스스로 그렇게 불렀다). 그는 미친 놀음 ‘美親子(미친자)’라고 表記(표기)했었다. 확실히 그들은 美親子(미친자)들이었다. 거기에는 양소와르가 있었고 클레와 뭉크가 있었다. 그리고 盧天命(노천명)의 詩(시)가 있었다. 번득이는 인간의 原初的(원초적)인 노스탤지어가 있었다. 나는 언젠가 ‘시골’이라는 願下(원하)에 단 한줄의 詩(시)를 썼던 적이 있다. 그것은 ‘가보라’였다. 나는 오늘 또 그 한마디를 외쳐야 했다. ‘가보라, 가보라’고, 사람들은 中庸(중용)을 지키기를 좋아한다. 安逸(안일)과 無事(무사)를 좇는 것을 能事(능사)로 여긴다. 물론 그건 人之常情(인지상정)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아이들도, 젊은이들도 그와 같은 짓거리를 하는데 있다. 흔히 ‘젊음의 피는 끓는다’라는 문장을 본다. 그 끓는 피를 애써 삭여가며 돌아갈 궁리를 하는 양이 심히 유감스러운 것이다.
  니체는 ‘위험하게 살자’라는 말을 남겼다. 그것이 運命愛(운명애)(AmorFati)이다.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겠노라던 우리 詩人(시인)의 소리도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성한 몸을 사려가며 學問(학문)을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맨 정신으로 예술을 하려드는 자들이 있다. 방 안에서 詩(시)를 쓰려는 이들도 있다. 참 무서운 죄를 짓고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과 그가 이름을 나눠준 모든 이들에게 죄를 짓고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삶을 보여줄 생각은 왜 하지 못하는가?
  도시에도 가끔 비가 내린다. 보도위에 지는 물무늬는 그래도 조금은 정겹다. 참 안타까운 일은 그 위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발들이다. 비닐우산이라도 받으려는 머리들이다. 흠뻑 젖어 논을 살피고 벼를 살피는 농부들을 떠올려보라.
  하늘色(색)이 무척이나 좋은 철이다. 詩(시)가 아니라도 바닷물처럼 올려다 뵌다. 거기 빠져보라. 오늘 내가 만난 이들은 이미 거기 들어가 있었다. 오히려 나를 부르고 있었다. 애타게 소리치고 있었다. 절규하고 있었다. 차라리 동정어린 목소리였다.
  그들은 많이 배운 사람들이었다. 제대로 생겨먹은 신이 되려다 실패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벽과 바닥에 박힌 조그만 타일들은 그들의 눈이었고 그들의 손이었다. 그것들이 그 사실을 말해준다. 그림은 분명히 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이글을 쓰면서 부끄러움이 앞섬을 속일 수 없다.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머릿속은 비어가는 것 같고 가슴은 무한히 벅차오름을 느낀다. 形言(형언)할 수 없는 部分(부분)이 손으로 만져진다.
  나는 오늘 南行(남행)(그냥 南行(남행))을 할 것이다. 車窓(차창)에 스치는 그들의 얼굴을 읽을 것이다. 표정을 볼 것이다. 어쩌면 아까 만져진 무엇인지의 部分(부분), 그 끝을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色(색), 흐려지기만 하던 色(색)들이 뚜렷이 타오름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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