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仁훈(최인훈)의 ‘廣場(광장)’을 읽고

  이 소설은 한국동란 前後(전후)의 사회를 배경으로 방황하는 지식인의 表象(표상)을 나타내 준 작품이다. 이 作品(작품)은 그 성격에 상당한 문제성을 내포하고 있어 崔仁勳(최인훈)씨의 대표적이며, 한국 현대문학의 項上級(항상급)에 위치한다고 보겠다. 따라서 이 作品(작품)에서 제시된 問題點(문제점)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리라. 감상을 통한 문제의식의 추구를 우리는 행하여야 할 것이요, 問題意識(문제의식)을 감상에 우선하는 행위는 피하여야 할 것이다.
  小說(소설)의 時間的(시간적) 背景(배경)은 戰(전)前(전)․後(후)의 몇 년 사이이다. 주인공 李明俊(이명준)은 大學生(대학생)이라는 지식인으로서 꽤 精神的(정신적)으로 現實(현실)에 부딪치고 이에 대처하려는 젊은이이다. 그의 부친은 越北(월북)하여 北(북)의 높은 자리에 있었고 그는 南(남)에서 부친의 옛 친구였던 사람의 집에 기숙하고 있었다. 이러한 主人公(주인공)의 劇的(극적)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암시를 받을 수 있다. 그는 南(남)의 社會(사회)에서 廣場(광장)의 眞情(진정)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고 北(북)의 社會(사회)에서는 의미 없는 외면적인 廣場(광장)을 발견했을 뿐이다. 이러한 그가 共産軍(공산군)포로가 되어 中立國(중립국)으로 가게 되는데서 이야기가 회상으로 펼쳐진다. 이 小說(소설)에서 중요하게 인식되어야할 것이 廣場(광장)과 密室(밀실)의 개념설정이다. 광장은 어떤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이야기하고 토론하기 위하여 참여하는 곳이다. 한편, 密室(밀실)은 內面的(내면적) 자기를 探究(탐구)하고 스스로의 일을 생각할 수 있는 곳이다. 明俊(명준)은 南(남)에서 그의 부친 때문에 감시를 받는다. 또 형사에게서 심한 테러까지 당한다. 그때 그가 署(서)에서 나와 피투성이가 된 채 올라간 언덕에서 바라본 푸른 하늘! <아! 祖國(조국)의 하늘은 지랄같이 푸르구나> 이때 明俊(명준)은 자신을 북돋는다. 항상 풍문에 滿足(만족)하지 않고 늘 現場(현장)에 있으려 한 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北(북)으로 간다. 그는 이러한 南(남)에서 眞情(진정)한 廣場(광장)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密室(밀실)로만 꽉 차있는 南(남)이었기 때문이었다. 北(북)에서 그는 부친도 만나고 부친의 힘으로 新聞社(신문사)에 尃屬(부속)받는다. 여기서 그는 北(북)의 密室(밀실)없는 광장을 증오하게 된다. 그것은 그가 만주에서 본 저녁놀에서 상당히 象徵的(상징적)으로 나타나 있다. ‘모든 것은 저녁놀의 빛을 받아 빨갛다’ 그 自體(자체)가 빨갛게 된 것이 아니었다. 저녁놀을 받아서 빨갛게 된 것이다. 이는 바로 北(북)의 密室(밀실)없는 광장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이때 6․25동란이 일어난다. 明俊(명준)은 北(북)의 인민군 장교로 임명받고 전쟁포로가 된다. 반공포로 석방! 그는 南(남)․北(북) 中立國(중립국) 중의 하나를 택해야만 했다.
  北(북)쪽 사람들의 권유를 듣는 동안 또 南(남)쪽 사람들의 권유를 듣는 동안 그는 계속해서 중얼거린다. <중립국! 중립국! 중립국!…> 그래서 그는 印度(인도)로 향하는 배를 타게 된다. 어디에서부턴가 배를 따라오는 갈매기 2마리에서 明俊(명준)은 南(남)과 北(북)에서 그가 만난 두 女人(여인)을 생각한다. 南(남)의 윤애와 北(북)의 은혜. 두 여인은 南(남)과 北(북)을 象徵的(상징적)으로 대비시켜 준다. 윤애는 그녀와 明俊(명준)과의 廣場(광장)에 대한 愛着(애착)보다 그녀 자신의 密室(밀실)이 强(강)했고, 은혜는 반대로 密室(밀실)보다 明俊(명준)과의 廣場(광장)을 더 사랑하지 않았을까? 갈매기의 모습! 그것은 明俊(명준)에게 어떤 센티멘탈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명준은 中立國(중립국)에 가면 극장표판매원, 병원수위, 소방관 등 소박한 직업을 구할 것을 생각한다. 때때로 明俊(명준)은 그러한 中立國(중립국)의 自由(자유)속에 자유 그 자체를 위한 데모도 할 것이다. 극장표 판매를 기계로 代替(대체)시켰을 때, 그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에 나선다. <우리에게 표를 파는 즐거움을 앗아가지 말라!> 그러면 그 플래카드를 본 사람들 중의 하나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옛날 모더니스트들의 詩(시)구절 같잖아?> 위와 같은 생각을 明俊(명준)은 갈매기를 보고 생각한다. 그는 南(남)에서는 廣場(광장)에서 소외되어서 密室(밀실)을 구했고, 北(북)에서는 廣場(광장)에서 스스로 離脫(이탈)하여 密室(밀실)을 구하지 않았는가? 이런 感傷(감상)(센티멘탈)에 젖어 있는 명준은 자신의 처참함을 깨닫는다. 광장과 밀실 兩者(양자)에서 패배한 그 자신의 센티멘탈을 스스로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다음날 배에서 失踪(실종)된다. 갈매기를 좇아서 영원한 安息處(안식처)를 찾으러 간것 일까?
  이 悲劇(비극)은 ‘廣場(광장)과 密室(밀실)의 不調利(부조리)’에서 빚어진 것이다. 보통 광장과 밀실은 對立(대립)되는 의미로 많이 쓰인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密室(밀실)과 廣場(광장)이 아니리라. 밀실의 完成(완성)은 廣場(광장)을 배반하는 것일까? 또 광장의 成熟(성숙)을 위해서 密室(밀실)은 희생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作家(작가)가 作品(작품)을 쓸 때 사회에 무엇을 주려고 쓴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作家(작가)의 密室(밀실)을 불 지르는 행위이다. 작가란 그가 진정한 의미의 作家(작가)가 되려면 자기 자신의 즐거움을 통해서 社會(사회)에 무엇을 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들은 우선 密室(밀실)에 충실하자. 그리고 우리가 충실했던 密室(밀실)에의 成果(성과)를 廣場(광장)에 投影(투영)시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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