對抗(대항)할 旣成演劇(기성연극) 없이 出發(출발)

  藝術(예술)이라는 創造的(창조적) 과업은 어떤 획일적 관념에 의해 지배당해서는 안 된다. 획일적 사고방식이 그 創造精神(창조정신)을 침해하고 위협하게 될 경우 창조정신은 마비되고 파괴되게 마련이다.
  원래 小劇場(소극장)이란 단순히 大劇場(대극장)의 반대개념으로서 <작은 劇場(극장)>이라는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기존의 고정관념을 배격하고 기존의 사조에 반기를 들며, 좀 더 새로운 연극형태를 창조해 내야만 하는 實驗的(실험적) 使命(사명)까지도 소극장은 띠고 있는 것이다.
  한편 構造的(구조적)으로 볼 때, 小劇場(소극장)은 大劇場(대극장)과는 달리 연기자의 표정과 시선의 표현까지도 확실히 알게 되어 있고, 臺詞(대사)의 강약․명암까지도 느낄 수 있게 되어 있다. 近代劇(근대극)에 있어서 앙드레 앙뜨완느, 오토 브라암 등이 소극장운동을 고집한 이유도 이러한 관객과의 직접적인 동화․교류를 의도한 데에 있다고 본다. 集團(집단)인 觀客(관객)과 俳優(배우)인 生命體(생명체)가, 주어진 劇的(극적) 狀況(상황)아래 생활할 수 있도록 설비되어진 小劇場(소극장)은 이로써 더 높은 價値(가치)를 향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演劇史的(연극사적)인 입장에서 고찰해 볼 때 小劇場運動(소극장운동)은 現代演劇(현대연극)의 중추적 역할을 다했다고 본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프랑스의 <自由劇場(자유극장)>, 장 그레인을 중심으로 한 런던의 <獨立劇場(독립극장)> 베를린의 <自由舞臺(자유무대)> 등 歐美各地(구미각지)에서 商業主義(상업주의)를 배격하기 위해 일기 시작한 소극장운동은 우리나라에서도 1960년 初(초)에 이르러 활발히 진행되어졌는데, 서양과 우리나라 小劇場運動(소극장운동)의 양상이 달랐던 것은 서양의 경우 소극장운동이 旣成演劇(기성연극)에 대항하는 實驗演劇(실험연극)의 성격을 띠었던 반면에, 우리의 소극장운동은 先行(선행)하는 이렇다 할 旣成演劇(기성연극)의 전통이 없었기 때문에 小劇場運動(소극장운동) 自體(자체)가 곧 황무지에 연극예술을 심기 위한 연극운동의 전부였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소극장운동은 그것이 단지 소극장에 국한한 운동이었다기보다도 우리 연극을 통 털어 유일한 활동 무대였다는 점이 서양과의 근본적인 차이라고 하겠다.
  却說(각설)하고, 演劇(연극)이 발전하려면 많은 小劇場(소극장)이 활발하게 움직여져야 하고 소극장을 통해서 시대변천에 따른 참신한 연극이 창조되어져야 한다. 이러한 創造活動(창조활동)을 돕기 위해 1974년부터 실시된 文藝復興(문예부흥) 5個年計劃(개년계획)은 한국연극육성을 위해 매우 鼓舞的(고무적)인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정부는 이와 같은 財政的(재정적) 뒷받침 외에 演劇(연극)이 成長(성장)할 수 있는 政策的(정책적), 法的(법적) 뒷받침까지도 배려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 할 때 연극육성책은 自家撞着(자가당착)에 빠질 우려가 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현재 연극이 自立(자립)하는데 있어서 最大(최대)의 障碍(장애)가 되는 것 중의 하나는 前近代的(전근대적)인 공연법이다. 公演法(공연법) 중에서도 가장 問題(문제)가 되는 것은 映像藝術(영상예술)과 舞臺藝術(무대예술)을 한 데 묶어 놓은 데에 있다.
  영화나 텔레비전은 이미 大企業化(대기업화)되어 있고, 한 번의 촬영이나 녹화로 전국을 커버할 수 있지만, 演劇(연극)은 수십 명이 몇 달씩 연습하여 小劇場(소극장)의 경우 백여 명의 관객을 놓고 公演(공연)을 하게 되므로 收益性(수익성)이란 거의 없다고 해도 過言(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영화관과 연극장의 槪念(개념)은 分明(분명)히 구별되어져야 하고 동시에 設置基準(설치기준)과 施設基準(시설기준)도 기업적인 映畵館(영화관)과는 달리 대폭 緩和(완화)되어져야 한 것이다.
  한나라의 演劇(연극)은 언제나 大衆(대중)과 흐름을 같이 하는 大劇場(대극장) 演劇(연극)과 새로운 모랄, 새로운 形態(형태), 새로운 감각을 찾는 소극장 연극이 並存(병존)해야만 바람직한 것이다. 실험성을 띤 소극장 운동이 고갈되면 진부한 상업주의만이 난무하게 될 것이며, 演劇(연극)은 낙후되고 타락해 갈 가능성이 많아진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反商業(반상업)․反新派劇(반신파극)에서 출발했다고도 볼 수 있는 우리의 小劇場(소극장) 精神(정신)이 리얼리즘을 토착화시키고, 새로운 스타일을 구축해 가고 있는 오늘날 가장 시급한 것은 공연질서를 바로 잡는 일이라고 본다. 公演劇(공연극)이 늘면 늘수록 各(각) 劇場(극장)과 劇團(극단)들이 흥행이나 실적만을 생각하고 경쟁적으로 공연을 행함으로써, 연극이 대중의 기호나 감각만을 쫓아 大衆(대중)과 영합하게 되고 質的(질적)으로도 타락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근래에 와서 演劇作品名(연극작품명)의 무질서한 변경과 煽情的(선정적)인 어휘의 난무는 이를 단적으로 立證(입증)하는 좋은 증거라 하겠다.
  끝으로,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는 地方演劇(지방연극)의 육성방안이 시급하다고 본다.
  서울을 中心(중심)으로 하는 文化(문화)의 中央集權化(중앙집권화)는 文化發展(문화발전)의 획일화 및 협소성을 초래하게 되고 文化(문화)의 다양성과 문화생활의 국민적 균등화라는 오늘의 과제에 문제성을 제기하게 되고 말았다. 中央劇團(중앙극단)에 의한 지방순회공연이 지방 觀客(관객)의 저변확대를 도모하고 지방연극인물 자극할 수는 있어도 지방연극 발전의 항구책은 되지 못한다고 본다. 어디까지나 지방연극은 지방소극장을 중심으로 나가야 되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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