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忿怒(분노)는 葡萄(포도)처럼’등을 통해서 본 죤․스타인백의 作品世界(작품세계)

  존 스타인백의 小說創作(소설창작)은 대체로 세 가지 특징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그의 우화적인 수법이 그것이며, 우화란 독자들이 알고 있는 문제를 들어 얘기하면서 색다른 또는 추상적인 개념을 설명하는 예술형식이다. 우화로서 가장 유명한 것은 이소프의 우화와 그리스토의 우화가 있다. 이들은 西洋思想(서양사상)의 二大源流(이대원류)를 이루는 사조의 전통과 지혜를 구체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 생명이 긴 예술작품은 모두가 어느 정도의 寓意(우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報道作家(보도작가)가 단순이 사실만을 수집하는데 반해서 寓話作家(우화작가)는 사건속의 원형을 찾아 그것을 중심으로 그 사건을 설명해 나가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寓意小說家(우의소설가)는 그 속에 숨은 人間行動(인간행동)의 원형을 밝히는데 관심한다.
  스타인백은 대부분의 20세기 사람들이 우화를 불신하고 文學(문학)을 자꾸만 촛점없는 사실보도로 이끄는 과오를 피할 수 있었다는 공적이 크다. 이것이 그의 첫째의 특색이다.
  그러나 스타인백은 편협한 神學思想(신학사상)을 작품으로 해설하는 수많은 우화작가와는 전혀 다르다. 그는 사회가 어떤 커다란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는 目的論思想(목적론사상)을 배격한다. 사회실태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과학적으로 그려내려고 한다. 이 점이 그의 두 번째 특색이다. 이런 과학적 사고방식의 해명과정을 간단히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지마는 요컨대 當爲(당위)의 문제, 可能性(가능성)의 문제, 蓋然性(개연성)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현실의 실태에 주로 관심하며, 실태와 실정을 먼저 살피려는 사고방식이 곧 非目的論的(비목적론적) 사고방식인 것이다. 종교, 정치, 경제이론가들은 이런 사고방식과 정면으로 맞선다. 이런 사고방식을 따르자면 第一原因(제일원인), 예정된 목표, 혹은 특수한 섭리를 전연 고려하지 않게 되고, 또한 그들 자신의 초연한 권위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역사상 하고 많은 科學(과학)과 神學(신학)과의 대립 분쟁의 근원이 바로 이런 목적론적 태도와 非目的論的(비목적론적) 태도에 있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非目的論的(비목적론적) 사상이 스타인백의 두 번째 특색인 것이다.
  그러나 科學者(과학자)라 할지라도 일을 하자면 전적으로 어떤 目的體系(목적체계)를 부정할 도리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目的論(목적론)에 시종 반대한다 해도 그 반대하는 自體(자체)가 일종의 目的體系(목적체계)를 이루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目的(목적)으로서의 체계가 아니라 방법수단으로서의 體系(체계)는 人間活動(인간활동)에서 불가피한 요소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스타인백의 세 번째 특색내지는 경향으로서의 그의 目的體系(목적체계)가 갖는 특성이 문제되게 된다. 스타인백의 목적체계는 19세기 美國(미국)의 超越論者(초월론자)들의 그것과 비슷하다. 초월론이라는 思想(사상)은 非目的論(비목적론)보다 더 定義(정의)하기 어려운 사상이다. 여기서는 다만 人間(인간)은 個人主義(개인주의)에 철저하면서 동시에 私心(사심)을 버리고 남을 생각한다는 일종의 理想主義思想(이상주의사상)이 곧 超越論(초월론)이라고 하는 정도로 생각해 두면 무방할 것이다. 초월론의 내용을 알자면 미국 Transcendentalism의 三大作品(삼대작품)인 에머슨의 Self-Reliance<自立(자립)>, 소로의 Walden<월든> 그리고 휘트먼의 Leaves of Grass<풀잎>을 읽어보는 것이 제일 좋을 것이다. 아무튼 人間(인간)의 尊嚴性(존엄성)을 무엇보다도 먼저 생각하는 태도가 초월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바, 스타인백은 바로 이런 태도 때문에 始終(시종) 어떤 主義(주의)에 치우치지 않고 作品活動(작품활동)에 임했던 것이다.
  스타인백의 이러한 세 가지 특색은 그의 창작과정에서 서로 보완내지는 배척함으로써 作品(작품)의 성공과 失敗(실패)에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령 그가 직접 경험한 세계에서 재미난 素材(소재)를 마련한 경우에는 그가 寓話(우화)를 즐긴 탓으로 줄거리에 멋이 들었고, 그 非目的論的(비목적론적) 思想(사상)의 덕분으로 초연한 과학적 태도를 발휘할 수 있었으며, 그 理想主義的(이상주의적) 초월론으로 말미암아 同情(동정)이 강해질 수 있었다. 이런 情熱的(정열적)인 동정덕분에 The Red Pony<붉은 망아지>나 The Grapes of Wrath<忿怒(분노)는 葡萄(포도)처럼>이 社會的(사회적)으로나 藝術的(예술적)으로 훌륭한 작품이 되었던 것이다.
  이상으로 스타인백의 창작세계의 특징을 간단히 보아왔거니와 이러한 특징에 근거한 그의 구체적인 작품을 살펴보기로 한다.
  스타인백은 1937년에 Of Miceand Men<생쥐와 人間(인간)>으로 일약 美國文壇(미국문단)에서 확고한 地位(지위)를 굳혔다고 할 수 있다. 조그만 단편우화에 지나지 않은 박력 있는 이 作品(작품)은 초판 7만5천부가 매진되고, 연극 각본으로 각색되어 上演(상연)되었을 때는 劇評論家協會賞(극평론가협회상) 1등에 당선되고, 장기공연이 계속되면서 영화화까지 되었었다. 이 作品(작품)을 통해서 그는 마침내 자기가 여태까지 애써 찾은 형식-즉 극의 소설화라고 할 수 있는 객관적 수법의 소설형식을 찾아낸 셈이었다. <생쥐와 人間(인간)>은 상징소설이라고 작가 자신이 말하고 있다. 人間(인간)이 자기의 능력밖에 머물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 스스로를 보호하는 유일한 길은 <꿈>밖에 없다.
  ‘생쥐와 人間(인간)이 제 아무리 꾀를 부려도 별 수 없다’고 한 作中人物(작중인물) 번스의 말에서 ‘생쥐와 人間(인간)’이라는 表題(표제)가 나왔거니와 人間(인간)은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무수한 힘의 지배를 받는 것이요 그 힘은 人間(인간)이 만들어낸 갖가지 꿈을 무자비하고 냉정하게 무너뜨려버린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의 혼돈된 여러 가지 힘에 희생되는 人間(인간)들에 대한 스타인백의 강력한 동정과 분노를 표현한 자연주의적인 색채가 강한 작품이 바로 이 ‘생쥐와 人間(인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이 作品(작품)은 불굴의 生存意志(생존의지)의 승리를 다룬 희극이기도 했다. 어쩔 수 없는 자연의 힘 앞에 人間(인간)이 패배하는 모습을 그린 소설이 아니고 人間(인간)이 고통을 겪으면서 이 자연을 정복하고, 애를 쓰면서 의식적으로 자기존대의 착각을 물리치고 풍속적 자기분수를 감수하는 예지를 터득해가고 있는 것이다.
  <생쥐와 人間(인간)>에서 作家(작가)로서의 力量(역량)과 地位(지위)를 굳힌 스타인백은 바로이어서 1939년 그의 불구의 명작인 The Grapes of Wrath<忿怒(분노)는 葡萄(포도)처럼>을 世上(세상)에 내놓음으로써 美國文學史上(미국문학사상) 영원한 地位(지위)를 다져갔다. 初版(초판) 50여만 부가 순식간에 팔려나간 이 作品(작품)의 선풍적인 人氣(인기)는 마거리트․미첼의 Gone with the wind<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더불어 1930년대 美國出版界(미국출판계)의 최대사건의 하나로 오늘날도 평가되고 있다. Alexander Cowie는 <The Rise of American Nivels>에서 이 作品(작품)을 가리켜 兩次(양차) 世界大戰(세계대전)사이에 나온 小說文學(소설문학)의 모든 가치 있는 특징을 훌륭하고 힘 있게 集大成(집대성)해놓은 최대의 걸작이라고 평하고 있거니와 이 作品(작품)은 스타인백의 創作生活(창작생활)의 절정의 이루는 作品(작품)일 뿐 아니라 미국문학의 한 시대에 끝을 맺어놓은 大作(대작)임에 틀림없다.
  作家(작가)는 作中(작중) 主人公(주인공) ‘죠드네’이야기를 통해서 人間(인간)<靈魂(영혼)>의 승리를 희극적으로 표현하려고 시도했었다.
  한 마디로 요약해서 偏見(편견)과 自尊意識(자존의식)이 協同(협동)을 막는 世界(세계)에서 協同(협동)은 오직 個個人(개개인)이 자진해서 자기네 특수 權益(권익)을 도외시하고 共同(공동)의 目的(목적)을 도모해야만 實現(실현)된다는 것이 이 作品(작품)의 主題(주제)가 되어있다. 따라서 이 作品(작품)중의 ‘죠드네’이야기는 하나의 世界政府(세계정부)를 모색하는 오늘날 우리들이 당면한 가지가지의 至難(지난)한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主題(주제)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개인의 의사를 존중하고 개개인의 自發的(자발적) 협동을 강조한 때문에 이 小說(소설)은 各種(각종) 특수 權益團體(권익단체)의 공격을 받기도 했던 것이다.
  超越論者(초월론자)들은 文明社會(문명사회)의 제도에 오염 부패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는 인간은 옳은 일을 하게 마련이라고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忿怒(분노)는 葡萄(포도)처럼>은 소설이지 논문은 아니다. 이것은 藝術(예술)작품이지 社會學(사회학) 혹은 哲學(철학)책이 아닌 것이다. 예술가로서의 스타인백은 인간행동을 그대로 그려내는데 관심했었지 인간행동의 規範(규범)을 세우려 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 본연의 자세를 잘 길러나가면 스스로 자신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제시했을 따름이지 어떤 法則(법칙)․規範(규범)을 강조내지는 역설한 目的(목적)소설로 전락하지 않았던 것이 이 작품에 영원한 예술성을 찾는 生命力(생명력)이기도 한 것이다. Steinbeck은 그의 위대한 선배인 Hawthorne과 마찬가지로 역시 ‘영속적이고 실속 있는 개혁은 오직 개개 인간의 마음속에서부터 시작된다는 투철한 신념만이 現代(현대)의 대중적인 物量社會(물량사회)에서 상실되어가는 <人間(인간)>을 구제하고 회복하는 길이라는 것’을 그의 수많은 작품을 통해서 특히 ‘The Grapes of wrath’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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