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痴(백치)의 잠 ①

  어둠 저 편에서 날 바라보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깊고 우멍한 두 눈이 어둠을 그득 담고서 뚜렷한 윤곽도 없이 검게 파여 있었다. 그 눈은 오래 전부터 그 자리에 그렇게 붙박혀 있었던 것처럼 비밀스러웠다.
  전혀 예기치 않은 순간에 불쑥 내 앞에 나타나서, 나의 운명을 예견하는 자나 내게 보일 수 있는 당돌함을 가지고 있었다. 흡사 나의 모든 비밀을 다 알고 있고, 저만이 나를 구원해 줄 수 있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면서도 조금의 내색도 없이 방심하고 있는 듯한 여유까지도 보이고 있는 뻔뻔스러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머릿속에서 그를 기억해낼 수 없었다. 참으로 낯선 얼굴이었다.
  그 머엉한 시선이 내게 와서 멈추어 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참을 수 없도록 소름끼치는 긴장이 나의 전신을 엄습했다. 한 마디로 그는 그의 시건 하나로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아무런 저항감도 없이 그의 눈이 내 품고 있는 어둠의 가운데에 스스로 잡혀 버린 것이다. 이미 나를 속속들이 다 들여다보고 나의 배신을 비웃으며, 또한 그의 비웃음에 의해서 내가 당혹했으리라는 것까지도 다 알고 있는 듯했다. 저 얼굴은 누구일까? 못마땅한 회한과 후회가 가슴에서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 때 검은 손 하나가 그 얼굴을 지우며 새 순처럼 돋아 올랐다. 그 손이 가만히 창문을 두드렸다.
  <편지가 왔군>
  김 처사(處士)였다. 나는 졸음에서 깨어나듯 눈을 두어번 깜박였다. 창밖은 어둠으로 잠기고 있었다. 그 어둠 탓으로 유리창이 거울이 되어서 내 모습을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낯선 얼굴이 나였다는 것에 나는 더 더욱 두려운 불만의 앙금이 가슴의 언저리에서 부시시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문득 내가 이 자리를 한 시 바삐 떠나야 한다는 강렬한 생각이 일었다. 그래 탈출을 서둘러야 한다.
  <서울에서 온 거야>
  의자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윽 몰려들었다. 김 처사가 던진 흰 봉투의 편지가 책상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둔탁했다. 그러나 나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을 행하고 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산신각 뒤켠의 대나무 숲이 눈앞에 확연하게 들어왔다. 뜰을 건너오는 대 바람 소리가 서각서각 귓속을 후비고 지나갔다. 둥지를 찾는 굴뚝새가 일시에 날개를 퍼득이는 소리 같았다. 댓잎은 그 끝에 검붉은 색채의 방울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었다. 눈물을 머금은 소녀의 얼굴에서 반사되는 햇살처럼 순간적인 찰라의 정체된 분위기를 자아내게 했다. 은하의 지난번 편지 귀절이 떠올랐다.
  <내가 서서히 미쳐만 가는 것 같은 느낌을 억누를 수가 없어요. 정말 미쳤는가 보아요. 이번에 만난 사람은 고등학교 先生(선생)이래요. 건강하고 미남이었으며, 한 가정을 이끌어나가는데 無難(무난)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어요. 그래서 OK를 해 버렸어요. 나도 몰라요. 무조건 대답해 버렸어요. 아시겠지만 오는 가을에 결혼식을 올리라는 집에서의 성화도 있고 하여, 이젠 기다릴 뿐이지요. 그런데 왜 한 번도 답장을 안 주셔요? 제발 당신과 結婚(결혼)해 달라고 왜 말하지 못하셔요? 經濟的(경제적) 여건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제가 당신을 부양할 수도 있읍니다. 그렇게 하기가 당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라면, 사정이 좋아질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말해 주셔요. 아직 늦은 시간은 아니잖아요. >
  댓잎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노을도 찰랑댔다. 순간순간 춤추는 노을의 진영이 검은 반점으로 굳어서 시야를 어지럽혔다. 댓잎들이 은빛 날개를 달고서 공중으로 날아오르기도 하며, 또는 검게 검게 죽어서 낙엽처럼 떨어지기도 하였다. 그런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빈센트 반 고흐의<까마귀가 날으는 보리밭>이 생각났다. 아, 그 절망적이고도 비극적인 紺靑(감청)의 색갈이 내 머릿속에 가득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암울한 돌풍이 몰아쳐 오고, 불길하고도 요란스러운 까마귀가 떼를 지어 날고-. 조금만 움직여도 넘쳐흐를 것처럼 나의 가슴이 출렁거렸다. 그 까마귀 떼들이 살아서 제각기 나를 향해 날아오고, 그 혼미의 가운데에서 나는 한 포기 가냘픈 풀잎처럼 이리 넘어지고 저리 잦혀지며 울부짖었다. 나의 내부가 서늘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미궁 속으로 빠뜨리고 있는 것일까?
  <서울>과 <편지>라는 단어가 확실한 매듭을 지으면서 풀어지지 아니하였다. 은하는 지금도 날 사랑하고 있을까? 내가 이 절을 찾아올 때 그녀는 그녀의 왼쪽 손 無名指(무명지)에서 금가락지를 빼어 나에게 주었다. 하얗게 반지 자국이 배인 손을 들어 내게 보이면서 그녀는 말했다.
  <행운이 있길>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씁쓸히 웃었다. 지금 이 시간 내가 감당해야 될 적막이 너무도 무한하였고, 그 어디쯤에서 정처 없이 표류되어 따라다니는 나의 의식이 자꾸만 나를 배반하고 있는 것이었다. 가락지를 집어 들고 서랍을 닫았다. 그리고 밖으로 나왔다. 웅얼거리는 대 바람 소리가 좀 더 확실하게 들리는 듯했다. 그들의 분명한 음성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을 저주해>
  나는 대답했다.
  <나도 역시>
  아, 나는 몸의 어느 한 곳이 무너져 버린 것처럼 허전하거나, 또는 꽉 찬 상태의 기분을 동시에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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