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奎榮著(김규영저)

  金奎榮博士(김규영박사)님의 ‘時間論(시간론)’이 출판되었다. 본 저서는 아마도 博士(박사)님께서 30년에 가까운 大學講壇(대학강단)생활을 통하여 거듭된 연구와 노심초사해온 生(생)의 體驗(체험)을 함께 담은 玉著(옥저)라고 생각된다.
  本(본) ‘時間論(시간론)’은 멀리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의 時間論(시간론)을 위시하여, 플로티노스, 토마스, 베르쟈예프칸트, 훗설,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사에 있어서의 거의 전반적인 시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第(제)1章(장)은 공간화된 시간으로서의 等質時間(등질시간)과 어떠한 延長性(연장성)도 혼입되지 않은 純粹持續(순수지속)으로서의意識時間(의식시간)을 철저하게 해명함으로서 베르그송의 순수지속의 시간이 어떻게 하여 形而上學的(형이상학적) 意義(의의)를 갖는가를 철저하게 밝히고 있다.
  따라서 칸트가 純粹直觀(순수직관)으로서 先驗的(선험적) 時間(시간)을 感性的(감성적) 直觀(직관)에 한정함으로써, 그리고 時間(시간)을 等質的(등질적)인 무한연속량으로 취급함으로써 空間化(공간화)된 時間(시간)과 現實的(현실적)인 純粹持續(순수지속)의 시간을 峻別(준별)하지 못했던 점을 第(제)2章(장)과 第(제)4章(장)에서 자세하게 밝히고 있다.
  요컨대 순수한 持續(지속)으로서의 시간은 서로 융합되고 침투되어서 윤곽도 없고 아무런 相互(상호)배제의 경향도 없어 數(수)나 等質性(등질성)과는 아무런 친근성도 없는 異質的(이질적)인 持續(지속)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칸트의 시간은 自然科學的(자연과학적) 認識(인식)을 성립시키는 物理的(물리적) 時間(시간)이라는 점에서 순수한 意識時間(의식시간)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역시 時間(시간)을 移動(이동)의 數(수)로 규정하고 있는 만큼 同質的(동질적)인 空間化(공간화)된 物理的 時間(물리적 시간)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칸트와 대동소이하다.
  本(본) 저자는 바로 이러한 무한연속량으로서의物理的(물리적) 시간이 참된 시간이 될 수 없고 空間化(공간화)된 시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내적 지속에 관한 直視(직시)만이 並列(병렬)이 아닌 繼起(계기)의 시간을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정신이 정신을 직접 봄으로서 내적 生命(생명)의 흐름을 의식할 때 형이상학의 세계가 열린다는 것을 상세하게 전거를 돌서 설명하고 있다.
  플로티노스의 ‘永遠(영원)을 본뜬 時間(시간)’은 물론 베르자예프의 영원에 결부된 創造的 時間(창조적 시간)도, 훗설의 ‘根源的(근원적) 時間領域(시간영역)’으로서의 體驗(체험)의 內在的(내재적) 시간도, 하이데거의 旣在(기재)와 到來(도래)가 교체되는 現在化(현재화)의 ‘根源的(근원적) 時間(시간)’도 모두 空間化(공간화)된 外延量(외연량)의 時間(시간)을 부정하고 영원과 현재가 하나로 統一(통일)되는 형이상학적 시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시간파악을 문제로 하는 한 어떤 直觀(직관)이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베그르송의 말을 빌려 ‘直觀(직관)이 精神(정신)에 持續(지속)에, 純粹變化(순수변화)에 닿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原典(원전)자체에 극력 접근하여 生命(생명)을 파내려가 일종의 精神的(정신적)청진에 의하여 그 魂(혼)의 고통을 느끼는 것’을 표식으로 하자’고 표명하고 있다.
  本(본) 저서의 文脈(문맥)의 흐름은 플로티노스의 時間論(시간론)에 <영원히 영원히 잊지 못할 그대여> <영원히 영원히 소리칠 太陽(태양)이여>라고 명시되어 있듯이, <轉落(전락)>한 時間(시간)(베르쟈예프)으로서의 假象的(가상적), 物理的(물리적) 시간을 넘어서 自我(자아)의 내면의 세계 즉영혼의 深淵(심연)으로 들어가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現實的(현실적) 순수지속의 시간을 체험함으로서 영원한 형이상학의 세계와 만나게 된다는 것을 역역하게 엮어가고 있다.
  아무튼 本(본) 時間論(시간론)은 物理的(물리적) 시간을 이해하는데 이 이상의 더 좋은 指針書(지침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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