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痴(백치)의 잠 ②

  뜰 앞엔 불두화(佛頭花)가 어둠 가운데에서 하얗게 웃고 서 있었다. 그 너머로 멀리 보이는 시가지는 노란 별밭을 이루웠다. 다 타버린 잿더미에 바람이 일어 되살아나는 불티 같았다. 빨갛고 노랗고 하얀 불티들이 제각기 반짝였고, 어느 것은 쏜살같이 달려 나와 어둠 속에 숨어 버렸다. 그리곤 영영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그 중의 하나가 내 가슴 속으로 파고들듯 뛰어들었다. 그것이 가슴을 후비며 아프게 꿈틀거렸다. 그 아픔을 참지 못해 나의 누선(漏線)이 왈칵 열렸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지. 결코 울어선 안돼.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해뒀다. 그러나 내감정의 문은 나도 모르는 새에 활짝 열렸다. 눈물이 주르르 양볼 위로 미끄러져 나왔다. 내가 왜 울고 있는 것일까.
  정작 나는 하루도 은하를 잊어본 적이 없었다. 이곳에 온 3년 내낸 그녀의 생각만으로 내 미래의 작은 호롱불은 밝혀지고 있었다. 딱히 어느 때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가능하다면 빠른 시간 내로 그녀의 곁에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는 너의 행복이 나와 함께 이루어지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하고 싶은 충동이 가슴 한편에 늘 살아 있었다. 그런 내가 이 순간에 왜 망설이고 있는 것일까.
  나는 운동화를 조여 신었다. 그리곤 법당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법당의 목제 문살들이 검은 창살처럼 둔중한 무게로 버티고 서 있었다. 내 주먹보다도 더 큰 문고리가 피부에 차갑게 만져졌다. 차거움이 주는 이질감이 나를 한없이 힘없고 나약하게 했다.
  나와 법당파의 경계가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느껴졌다. 나는 문을 열지 못했다. 그리곤 두어 발짝 물러서서 합장배례를 했다.
  서늘한 밤바람이 목덜미를 핥고 지나갔다. 확신할 수 없는 위험한 곡예 속에서 이제야 비로소 한 순간을 모면한 곡예사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잠시 나 좀 보지’
  일주문을 나서는 나를 김 처사가 불러 세웠다. 그의 투박한 손가락이 나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육십을 넘긴 얼굴의 주름이 어둠속에서 더 짙은 어둠으로 돋보였다. 그는 걱정스럽게 날 바라보고 있었다.
  ‘편지 때문에 속상하지?’
  ‘...’
  그의 말을 듣자 나는 전혀 뜻밖에도 내 스스로가 임종을 앞둔 수행승이 된 것만 같았다. 죽음을 예감한 한 승려가 배낭을 얼러 메고 정처 없이 절을 떠나는 모습이 내게 투영되어 있다고 여겨졌다. 그러다가 어느 길에서나 몸을 눕히고 숨을 거두면, 시체의 목에 걸린 염주가 시체를 양분으로 하여 싹을 티우고, 싹은 자라 나무가 될 것이다. 산간에 염주나무가 무더기로 자라고 있는 곳이 있다면, 그 곳을 바로 한 수행승이 숨을 거둔 자리로 단정해도 좋다고 김 처사는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흡사 내가 그러한 비애의 현장으로 떠나는 수행승인 것만 같이 생각되었다. 김 처사가 덧붙여 말했다.
  ‘어디로 가든 상관은 않겠네, 불법을 배우기로 한 사람이 어디에다 의지처를 두겠느냐만은, 색시가 있는 모양이니 될 수 있다면 마을로 내려가게 방랑이나 하면 뭣해? 마음 가라앉히고 공불해야지.’
  그러나 나는 문득 내가 계절과 풍향에 가장 적절하게 순응하는 한 포기 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였다. 내 몸을 어느 인적 없는 숲 속의 나무그루터기에 비스듬히 뉘이고서 염주알을 헤아리며 천천히 죽어 가는 모습이 상상됐다. 그것도 이른 새벽,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시각, 어둠이 깨이기 전에 나뭇잎이 부딪치는 소리가 푸르고 속 깊은 강물이 흘러가는 소리처럼 청량하며. 그런 소리와 소리가 어울어져 아득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마치 하늘만이 새벽의 여명으로 연결되어서 그 튼튼한 끈을 타고 내가 어둠의 공간으로 흡입되어가고 있다면.... 그런 상상만으로도 나는 어떤 기대감에 가슴 설레였다.
  ‘명심해두게나, 여자란 지쳐 버리면 시든 불여귀(不如歸) 꽃 같다네. 도움 주는 사람이 곁에 있는 것도 일생의 행복이지’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뒤돌아섰다. 그가 나에게 몇 장의 지폐를 쥐어 주었다. 꼬깃꼬깃한 지폐가 내 손안에서 파르르 떨었다. 그것은 나에게 이별의 슬픔을 확실하게 일깨워 주었다.
  산 계곡에 돌출돼 있는 바위돌이 눈은 겨울산을 연상시켰다. 어둠을 머금은 바위 표면이 희뿌옇게 빛났다. 그 사이로 하얀 자갈길이 곡선을 그으며 산 아래로 뻗쳐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자갈과 자갈이 발밑에서 부딪히는 소리가 뚜드득 거리며 이따금씩 침묵을 깨뜨렸다. 그때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내 자신에게 충고했다. 침착해야지. 모든 일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만 돼. 마음을 함부로 써선 안되지.
  기억할 수 없는 오래 전 날의 밤이었다. 가랑비가 사락사락 내리는, 자정이 임박한 시간에 나는 은하의 집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차를 타고 집에 갈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남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그녀의 집 앞으로 발길을 옮겼던 것이다. 내가 그녀의 집을 방문해도 좋은 뚜렷한 명분은 전혀 없었다. 거의 매일 이 시간에 이곳에서 나는 그녀와 헤어져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다. 그러나 내가 그녀의 뒤를 따라 그녀의 집 쪽으로 발길을 옮긴 이상 이젠 집에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다. 벌써 열두시 십분 전. 초인종의 꼭지를 손가락을 댔다. 도저히 누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도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가슴을 압박해 왔다. 알 수 없는 떨림이 식은땀처럼 전신을 서늘하게 적시며 지나갔다. 그러나 포기하는 심정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대문의 저쪽에서 밤의 정적을 갈라놓는 작은 소음이 연속적으로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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