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衆運動(민중운동)의 분수령, 國是(국시)의 基底(기저)

①3·1운동과 민중의지
②동학혁명
③조선후기의 민중운동
④고려시대의 민중운동
⑤한국사 속의 민중운동
⑥現代(현대)의 민중운동


○…오천년의 역사를 통해 어쩌면 인내와 체념으로 어질게만 살았던 이 땅의 백성들. 그러나 이 익명의 백성들이야말로 우리의 역사를 말없이 움직이고 살찌게 한 주체요 그 주인에 다름 아니다. 이제 본지에서는 이들 민중이 우리 역사에서 담당했던 몫을 찾고 그 의미를 되새겨 80년대의 새 역사를 여는 거름으로 삼고자 한다. 애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성원과 조언을 바란다. <편집자注(주)> …○


  獨立意志(독립의지)의 구체화와 思想的(사상적) 繼起性(계기성), 일제 强占下(강점하)의 韓民族(한민족)의 슬기이기도 했던 1919년 3월 1일(토요일)에 폭발하기 시작한 독립만세운동은 그 이전부터 내재적으로 성숙 발전되어온 전통적인 韓民族(한민족)의 독립의지와 그 사상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이며 1945년 8월 15일 민족의 光復時(광복시)까지 그 의지와 이념은 계승 유지되었던 것임을 먼저 밝혀야 될 것이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擧論(거론)한다면 우리의 독립정신은 日帝(일제)당국자들이 언필칭 주장한 대로 3·1운동 당시에 急造(급조)되고 우연하게 절규 주장한 ‘獨立理論(독립이론)의 體系(체계)’가 아니고 오래 전부터 민족의 뿌리가 깊었다는 점을 명백히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이의 사상적인 배경은 현실에 대한 일대 용단이기도 하였던 自覺(자각)·批判(비판)·反省(반성)을 불러일으킨 16·7세기의 ‘實學思想(실학사상)’의 近代(근대)지향적인 민족의식 자강이념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여러 가지 어려운 고비와 계기를 거치는 동안에 19세기 후반기에 성숙·발전하기 시작한 ‘開化思想(개화사상)’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이는 人脈(인맥)·著書(저서)·思想(사상) 面(면)에서 확실히 그렇게 연결되었다고 자료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다시 시대적 조류와 세계사적인 발전의 추세에 따라 20세기의 ‘獨立事象(독립사상)’으로 大同合流(대동합류)되어 맥락 지어진 것이다.
  이 같은 사상적인 맥락이 복합적으로 흐름에 따라 우리는 독립사상의 영향은 곧 實學(실학)사상으로까지 소급해서 그 배경을 잡아볼 수 있다고 요약하여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實學(실학)사상이 開化(개화)사상으로 영향을 미쳐 사상적 흐름을 인식할 때 186년대의 斥邪衛正思想(척사위정사상)과 東學思想(동학사상)·기독교사상에도 이의 영향이 복합적이고 다원적으로 맥락 지어졌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각종 資料(자료)가 뒷받침 해주고 있어 이렇게 견주어 해석해도 좋을 것 같다.
  이 독립사상체계 인식에 영향을 미친 實學思想(실학사상)은 主商的(주상적)인 海外交流論(해외교류론)과 北學派(북학파)의 理論(이론)에서 더욱 농도 짙게 연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人脈(인맥)에서의 연결면에서 뚜렷해지는 것이다. 즉 조선후기 實學者(실학자)들의 君主權(군주권)제한론이 韓末(한말) 開化思想家(개화사상가)에게 혁신 이념·철학적 해석 방법 등을 전수하여 다시 이들이 20세기의 독립운동가들에게 近代韓國國家(근대한국국가)형성을 촉진시켰는바 이를 위한 행동적인 자극을 주게 되었다고 推商(추상)해볼 수 있다. 20세기의 獨立運動家群(독립운동가군)이 實學(실학)과 開化(개화)관계 서적을 탐독하고 師弗(사불)·交友(교우)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렇게 유추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즉 조선후기 실학자 朴趾源(박지원)의 영향을 韓末開化思想家(한말개화사상가)인 朴珪壽(박규수)가 이어받고 박규수의 문하에 金玉均(김옥균), 朴泳孝(박영효), 兪吉濬(유길준), 金允植(김윤식)등 범 개화 계층이 出入(출입)하면서 이 사상을 開化(개화)와 獨立事象(독립사상)으로 연결하고 朴殷植(박은식), 申采浩(신채호), 李鍾一(이종일), 남궁억 등 독립운동가들이 사사하거나 出入(출입)하며 지대한 감동감화를 받고 있음을 지적해 볼 수 있다. 또 茶山(다산) 丁若鏞(정약용) 문하에도 李重協(이중협), 李晸(이정) 등의 실학자가 영향을 받고 다시 그 문하에 南鍾三(남종삼), 李道宰(이도재) 李沂(이기) 등 개화사상가들이 옷깃을 스치면서 훈도 받기에 寧日(영일)이 없었다. 秋史(추사) 金正喜(김정희) 문하에는 흥선대원군 이하응, 金綺秀(김기수), 吳慶鍚(오경양) 등 開化革新(개화혁신)사상가들이 出入(출입)하여 영향을 받았음에서 그 인맥적인 연결은 다원화되고 복합화 되었음을 理解(이해)할 수 있겠다.
  이렇게 인맥이 연결됨에 영향을 미친 매개체는 實學(실학) 및 開化(개화) 관계의 서적이었다. ‘해국도지’ ‘영환지량’ ‘조선책략’ ‘이언’ ‘연암집’ ‘다산저서’ ‘담헌연기’ ‘북학의’ ‘고문비략’ 등이 그것이다. 20세기의 독립사상 및 운동가들이 그 같은 서적을 탐독함으로써 독립사상은 더욱 신념 깊게 뿌리를 박았던 것이고 전위적 행위에로의 거창한 참여를 스스로 유도·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實學思想(실학사상)의 영향이 開化(개화)·東學(동학)·斥邪(척사)사상에 미치고 19세기 이후 정착한 기독교의 博愛(박애)·平等(평등)·平和(평화)사상도 이에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쳐 집권층보다는 민중에게 ‘市民意識(시민의식)’을 터득케 하고 理解(이해)시키는 방향에서 새로운 의식 구조가 형성되게 되었다.
  그것이 民族國家(민족국가) 즉 국민국가의 형성을 최대의 목표로 하였다.
  따라서 3·1독립운동의 배경은 전통적이고 내재적으로 성숙·발전되어 온 자주 독립의 意志(의지)가 국제정세의 변화와 추이에 따라 자주적으로 폭발된 독립의지의 구체화라고 지적할 수 있다. 종래적인 관점인 3·1운동발발의 배경이 전적으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원칙과는 크게 관련이 없다고 필자가 典據(전거)를 제시하고 여러 紙(지)·誌(지)에서 주장한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民族運動(민족운동)의 展開(전개)와 國民國家(국민국가)의 實現運動(실현운동)

  3·1운동은 이전부터 태동하여 온 각계각층의 조직과 결사항쟁이라는 民衆運動(민중운동)의 총괄이며, 그 승리의 구체화라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이 곧 ‘民(민)’정부의 탄생을 齎來(재래)한 것이다. 앞서 言及(언급)한 바와 같이 독립사상의 맥락이 외부의 어떤 사조나 계기에 의하여 체계가 세워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였거니와 민중의 독립운동을 日本(일본) 등 외세침략 국가들에 저항의식을 그때 그때 전통적으로 연결시켜 왔음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가까이의 민중운동을 들추어 본다면 1894년의 甲午東學革命(갑오동학혁명)운동에서의 半封建(반봉건)과 抗日救國(항일구국)운동을 손꼽아 볼 수 있겠다.
  이 운동은 비로소 市民(시민)의식적 민중운동으로의 강력한 이념이 제기되고 있음을 보겠는데 그것은 봉건주의에 반기를 들고 의식의 혁명을 구가하였다는 면에서 ‘혁명’으로 불리워지는 것이다. 그해 말경 다시 일어난 이 운동은 抗日救國民衆(항일구국민중)운동으로 東學敎徒(동학교도)가 선도하였고 다수의 농민이 뒤따른 민중구국운동의 전형적인 형태를 취한 지도자정신이 뚜렷치 못한 민중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實學(실학)과 開化(개화)사상의 영향을 다분히 받았다는 면에서 東學(동학)창도이념과 甲申政變(갑신정변)에서의 ‘국민국가’형성의 기치가 높이 표방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이 임시정부의 共和制(공화제)로 발전하였다.
  東學革命(동학혁명)운동 이후의 민중운동은 곧 ‘義兵戰爭(의병전쟁)’(1895~1915)으로 표현되는 20년 동안의 斥邪衛正(척사위정)사상의 행동적인 구체화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儒生層(유생층)의 兩班(양반)이 선봉장이 되었으나 개중에는 평민출신과 포수출신의 순수 ‘민중계층’이 主導的(주도적)으로 참여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이 ‘義兵(의병)’을 민중운동의 적극성을 띤 한 사회 계층이라고 지적해 볼 수 있다. 1910년대 후반에 가서도 종교인 가운데 몇몇은 쇠잔해지는 ‘義兵(의병)’의 부흥을 아쉬워하고 재기할 것을 절규함으로써 의병이라는 민중운동이 곧 3·1독립운동으로 까지 국내외에서 연결되고 있었다는 고귀한 전통을 窺視(규시)(규시)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전국적인 대규모의 민중운동에 병행하는 독립자주운동으로는 結社抗爭(결사항쟁)을 거론할 수 있다. 1896년 이후 3년 정도 萬民共同會(만민공동회)로까지 확산되었던 獨立協會(독립협회)의 민권과 국권의 수호 自强(자강)운동, 政體(정체)의 개혁운동(立憲代議制(입헌대의제))은 實學(실학)과 開化(개화)사상의 再顯(재현)으로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결사운동으로 조직성에 특징을 두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贊養會(찬양회)의 여성들이 독립협회 자립운동에 대거 참여하였음은 여성개화운동이 救國(구국)운동으로의 일대 전환점과 그 가능성을 齎來(재래)한 계기였고 그들의 활동을 뒷받침한 中流(중류) 및 최초의 女性啓蒙紙(여성계몽지)인 제국신문의 弘報性(홍보성)은 주목받을만하다.
  또 같은 시기에 李鍾一(이종일) 등이 조직, 활동한 大韓帝國民力會(대한제국민력회)의 민권수호 및 이권보호의 절규도 민중운동의 가능성과 성공률을 높였다는 면에서 역사에서 조명을 받아야 함을 필자는 강조해둔다.
  특히 1905년을 전후로 한 시기로부터 1919년 3월 1일 이전까지 연연히 유지 계속되었던 애국계몽운동과 1910년 이후의 각종 지하적 양상을 띤 비밀결사독립항쟁은 곧 독립운동으로의 源流(원류)의 배경을 결정적으로 형성하고 후원하였다는 면에서 높이 평가받아야 發展史觀(발전사관) 형성에 도움이 될 것이다. 즉 1904년 東學(동학)의 孫秉熙(손병희)등이 중심이 된 甲辰開化(갑진개화) 새 생활운동의 제창과 그 실천운동의 전개이후 교육 언론 종교운동은 요원의 불같이 거세게 타올랐다.
  이들은 한결같이 그것이 민족운동이었다고 자부하였음을 볼 때 ‘힌슬리’교수의 ‘民族主義(민족주의)와 國制體制(국제체제)’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치적 忠誠(충성)의 民族國家形成(민족국가형성)단계로의 移轉(이전)현상’임을 시사하는 것으로 近代國家(근대국가)로서의 의식구조가 형성되어감을 인식할 수 있겠다.
  結社(결사)운동은 輔安會(보안회)·大韓自强會(대한자강회)(大韓協會(대한협회))·憲政硏究會(헌정연구회)·新民會(신민회)·YMCA 등의 특색 있는 민족운동이 연결되었으며 言論(언론)운동은 독립신문 이후 제국신문·皇城新聞(황성신문)·大韓每日申報(대한매일신보)·萬歲報(만세보)·大韓民報(대한민보) 등이 이 운동을 필봉으로 적극 후원하였고 敎育(교육)운동으로는 培栽(배재)·梨花(이화) 이후 普成(보성)·養正(양정)·徽文(휘문)·中央(중앙)·大成(대성)·五山(오산) 등 3천여개교가 신식교육을 통해 독립운동의 역군을 길러 이들이 뒷날 민중운동의 지도자가 되었음은 의미 깊은 일이었다.
  宗敎(종교)운동은 天道敎(천도교)·基督敎(기독교)·佛敎(불교) 등이 각기 신앙의 양심을 들어 구국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0년 8월 대한제국은 日帝(일제)에 의해 强占(강점)당하는 비운을 맛보았다.
  그러나 구국의식으로 충만해있던 民衆(민중)들은 ‘復國運動(복국운동)’을 그해 9월말부터 구체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天道敎(천도교)의 李鍾一(이종일) 등은 1914년 普成社內(보성사내)에 天道救國團(천도구국단)이란 비밀결사를 설치하고 甲午(갑오)와 甲辰(갑진)의 민중운동을 再顯(재현)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이것이 孫秉熙(손병희) 등과의 연결로 3·1운동에까지 연결되었다.
  그 외 獨立義軍府(독립의군부)·光復會(광복회)·朝鮮國權恢復團(조선국권회복단)·國民會(국민회)·조선산직장려계 등 비밀결사가 이 민중운동을 3·1독립운동으로 결산케 하고 成功(성공)과 勝利(승리)를 거두게 하였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3·1운동의 주도적 추진세력은 東學(동학)-天道敎徒(천도교도)들에 의한 甲午(갑오)·甲辰(갑진)의 민중운동을 再顯(재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움직임에 있었고 그들이 기독교·불교·여성계·학생·유림들과 제휴 내지는 설득하여 이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게 되었다.


國民政府(국민정부)의 誕生(탄생)과 統一國家(통일국가)의 實現(실현)

  3·1독립운동을 가능케 한 추진세력은 국내외에 걸쳐 시기는 약간 다르나 거의 같은 理念(이념)과 방법으로 직결되었으며 전통적이고 내재적인 자주자립의 독립의지가 각계각층의 민중이 대동 합류하여 민중운동의 승리를 결과하였다.
  따라서 금년으로 3·1독립운동 61주년을 맞는 입장에서의 視角(시각)과 評價(평가)를 다음과 같이 내리면서 歷史的(역사적) 敎訓(교훈)으로 삼아볼까 한다.
  첫째, 이 운동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의하여 폭발된 것이라기보다는 뿌리 깊은 民族史(민족사)의 자주자립의 전통이 實學(실학)·開化(개화)·東學(동학)·斥邪(척사)사상의 융합접촉과정에서 독립의지로 구체화 된 國民(국민) 國家(국가) 실현을 위한 민족자활의 범국민운동이었다.
  둘째, 이 운동은 天道敎側(천도교측)에 의하여 제2의 3·1운동(1922)까지 시종 계획 추진된 것으로 甲午東學革命(갑오동학혁명)(1894), 甲辰開化(갑진개화) 새생활운동(1904), 甲寅(갑인) 민중운동(1914)의 ‘三甲運動(삼갑운동)’으로 표현되는 민중운동의 재현임을 지적할 수 있겠다.
  天道敎側(천도교측)에서는 이미 1894년 東學革命(동학혁명)운동 때의 교훈을 되살려 민중운동은 언제든지 決行(결행)하되 大衆化(대중화) 一元化(일원화) 非暴力(비폭력)을 초대의 방법으로 삼아 그 進路(진로)를 결정하였다. 따라서 大衆化(대중화)라는 의미에서 종교계·교육계·사회일반계층과의 연합을 시도하였으며 一元化(일원화)에 따라 3월 1일을 기해 이 운동을 전국 각지에 일으키게 하였고 다수의 民衆(민중)을 무력 앞에서 守護(수호)하기 위하여 非暴力(비폭력)의 온건하고 平和(평화)로운 방법을 취하였던 것이다.
  셋째, 이 운동은 국내에서 제일 먼저 조직단계로 들어간 이후 上海(상해)·中國(중국)·滿洲(만주)·露領(노영)·日本(일본)·美國(미국) 등지에서도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계획 추진하였다.
  특히 滿洲(만주)일대에서의 1918년 戊午獨立宣言書(무오독립선언서)의 발표나 1919년 2월 8일의 東京韓國人留學生(동경한국인유학생)의 독립선언은 국내독립선언의 시기를 앞당긴 것 같으며 憲兵警察統治(헌병경찰통치)의 억압과 高宗(고종)의 독살로 인한 暴崩(폭붕) 등은 국내 민족운동의 시기를 그만큼 촉진 자극하였다고도 평가할 수 있다. 물론 君主權(군주권)의 부활이 民主共和(민주공화)정부의 출현을 열망하는 반봉건적 시민의식의 결정체였다.
  넷째, 이 운동은 정통적인 大韓民國(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게 작용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주어 이후 1945년 민족의 광복을 맞을 때까지 26년 동안 국내외의 통계적 사명을 띤 正統大韓政府(정통대한정부)로서의 민간 정부적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며 건국의 理念(이념)을 기저로 하게 하였으며 비로소 민족운동의 분수령을 만들었던 것이다.
  다섯째, 이 운동 이후 비로소 우리 民族(민족)은 進路(진로)와 方向(방향)을 확정하였던 것이다. 즉 民族實力(민족실력)의 養成(양성)·外交自立主義(외교자립주의)의 표방·武裝(무장)세력을 양성하여 독립전쟁을 수행하도록 방향감각을 제시하였다는 점이 주목을 받고 조명되어야 하겠다. ‘民(민)’정부의 출현이라는 차원에서 재평가해야할 것이다.
  여섯째, 이 운동은 男女老幼(남녀노유)·貧富貴賤(빈부귀천)·地閥(지벌)·門閥(문벌)·學閥(학벌)을 초월한 大韓人(대한인)의 全民衆(전민중)이 격의 없고 조건 없이 총화단결하여 오직 한가지의 목표인 ‘完全自主獨立(완전자주독립)’을 향해 ‘獨立長征(독립장정)’을 표방한 민족의 엄숙한 명령이며 自由(자유)·正義(정의)·眞理(진리)를 구현하는 ‘民族(민족)의 廣場(광장)’구실을 충실히 감당해 낸 것으로서 민족운동 방향감각에 있어서 성공한 大衆自活(대중자활)이었다고 생각된다.
  일곱째 이 운동은 한국에서 시민의식을 터득케 하고 민족주의 민중운동의 가능성을 제시하였을 뿐 아니라 아시아 전 지역에 새로운 ‘민족운동’을 촉진시켰다. 즉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무저항운동 등을 차례로 촉진케 하여 한민족의 불요불굴의 저항정신이 독립정신으로 연결되었다는 실화를 남겨주었다. 따라서 세계자유인에게 한민족의 투지·자립·의식·강인성·민족의 우수성 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여론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여덟째, 開化(개화)여성도 구국운동으로서 한몫 구실을 한 이 운동은 첫 독립의지에 주체성을 띤 조직화운동으로 국민각자에게 이 사상과 이념을 意識化(의식화)하고 客觀化(객관화)하며 가치관을 확립시킴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건국의 이념을 제시한 면에서 이 정신은 영구히 후손에게 자주 자립단결의 상징을 남겨주어야 하며 그 정신이 곧 민족중흥과 祖國(조국)의 近代化(근대화)로 연결되고 밑거름이 됨을 인식시켜야 하겠다. 따라서 ‘3·1정신’으로 분석된 조국의 통일을 그만큼 앞당겨야 하는 역사적 사명이 1980년대를 처음 맞는 입장에서 의미 있게 수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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