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學(국학) 전반에 걸친 叢書(총서)

  儒釋(유석)이 兼全(겸전)하셨던 大碩學(대석학) 權相老(권상로)(1879~1965)선생의 生誕(생탄) 百周年(백주년)을 맞아 선생의 평생 사업이셨던 ‘韓國寺刹全書(한국사찰전서)’의 遺稿(유고) 5천매를 水績(수적)대로 축소해서 영인 발간하였다. 진실로 반갑고 뜻 깊은 일이다. 東國大出版部(동국대출판부)에서 4X6倍版(배판) 1250면에 달하는 고급 양장본으로, 이는 活版(활판)이 아닌 원고본임에서 더욱 값지다.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 선생의 원고는 錯解(착해)를 막기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正字(정자)로 써져 있고, 간혹 添削(첨삭)한 부분이 있다 해도 식별에 지장이 없는데다가, 둘째 純漢文(순한문)이라 자상하게 句讀(구독)까지 찍혀져있어 讀解(독해)에 이받고 있다. 그래서 附添(부첨)부분이 많은 장은 아예 다시 옮겨 써서 체제를 같이하는 정성까지 들였다.
  이 ‘한국寺刹(사찰)전서’는 비단 佛寺(불사)와 교학뿐 아니라 우리 국학전반에 걸친 총서로 寺刹(사찰)사료의 전집이자 本末寺(본말사)는 물론 암자에 이르기까지 무려 6300에 달하는 寺庵(사암)의 소재와 존폐, 창건과 沿革(연혁) 그리고 사료 등을 각각 典籍(전적)에서 뽑아 정리한 점이 값지다. 따라서 現傳(현전)하는 文籍(문적)은 물론 寺誌(사지)와 集傳(집전)까지 모조리 섭렵하여 그 방대한 섭취는 모름지기 용훼의 나위가 없다. 이에는 진작 유실된 열전의 記略(기략)인 ‘震婆續考(진파속고)’를 비롯하여 燒散(소산)된 六堂(육당)과 石南(석남)장서, 그리고 各寺(각사)의 紀記(기기)등에서 요건이 類聚(유취)되었고 또한 좀처럼 債覽(채람)치 못하는 存齊(존재)의 堪輿書(감여서)인 ‘支提誌(지제지)’ 등 여러 진본에서 釋苑(석원)에 관한 기사를 빠짐없이 초록하여 한눈으로 볼 수 있게 音順(음순) 劃順(획순)으로 분류돼 있는 寺譜(사보)인 것이다.
  특히 우리의 寺料(사료)는 흘려서 쓴 것의 거의이고, 또한 慣用(관용)의 略字(약자)가 많아 여간한 학력이 아니고는 判讀(판독)조차 쉽지 않음이 실정이다. 따라서 誤書(오서)와 落字(락자)를 분간하기란 선생과 같은 석학이 아니고는 어림도 없다. 가령 ‘均如傳(균여전)’의 虛頭(허두)만 해도 그랬고, 유명한 ‘艸艸(초초)’를 ‘井(정)’으로 읽은 것을 ‘菩薩(보살)’의 略字(약자)로 바로 잡은 것도 그 좋은 보기이다.
  그리고 1906년 발굴된 ‘釋譜詳節(석보상절)’ 第二十四(제이십사)·23에 보이는 舍利塔(사리탑)에 관한 중요한 기록 ‘天冠山(천관산)’과 ‘金剛山(금강산)’條(조)만 해도 그 출처를 찾다 못해, 이 ‘韓國寺刹全書(한국사찰전서)’를 보고서 비로소 여덕을 찾은 일도 있다. 이는 ‘支提誌(지제지)’의 鈔錄(초록)이니, 저 無能居士(무능거사)의 ‘韓鮮佛敎通史(한선불교통사)’에도 보이지 않는 대목이다.
  한편 ‘三國遺事(삼국유사)’ 卷三(권삼) 興法篇(흥법편)에 보이는 ‘育王塔(융왕탑)’條(조)도 못내는 그 津源(진원)을 이 ‘韓國寺刹全書(한국사찰전서)’에서 비로소 단서를 풀었다. 따라서 本末寺(본말사)의 沿革(연혁)은 고사하고 비록 廢寺(폐사)일지라도 그 出典(출전)을 밝혀 異相(이상)까지 덧붙인 남다른 자상에는 실로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古歌(고가)의 背景說話(배경설화)만 해도 분명 다루어져 있으니, 비단 桃李寺(도이사)의 사적만이 아니다. 따라서 ‘均如傳(균여전)’에 보이는 ‘普賢十願歌(보현십원가)’의 ‘第八 譯歌賢德分(제팔 역가현덕분)’에서 ‘三句六名(삼구육명)’을 노래의 終章(종장) 첫 구의 ‘隔句 落句 後句(격구 락구 후구)’의 三句(삼구)와 ‘歎日 阿耶 後言 城上人 打心 病吟(탄일 아야 후언 성상인 타심 병음)’의 六名(육명)이라 풀이한 고견은 獨尊(독존)의 旡涯(기애)선생께서도 무릎을 치실 대목이다.
  사실 이 ‘韓國寺刹全書(한국사찰전서)’에 바치신 50년의 적공은 초인적이어서 보통으로는 생심조차 못할 부지런과 집념의 결식인 것이다.
  곧 선생께서 佛敎社(불교사)에 계실 35세부터 열반하신 85세까지 하루처럼 모아오신 카드인 것이다
  특히 늘그막에 다다라는 눈이 어두워서 돋보기에 돋보기를 쓰시고 화경(렌즈)까지 쓰신 채 수전증을 무릅쓰고 만년필로 원고지를 메꾸셨음을 노상 보았다.
  따라서 선생은 베끼시는 것이 일과셨고 책을 보시는 것이 구실이셨다. 일찌기 손에 책이 쥐어지지 않는 적이 없으셨던 退耕(퇴경)선생이셨다. 이 작업은 본분과 사명감보다도 入室(입실)의 보람표이셨다. 그래서 自序(자서)에도,
  내가 이 원고를 수집하기는 30시대부터였다. 우리나라 불교의 역사가 없는 것을 개탄하고, 그것을 연구하기 시작했으나 그때는 아무 서적도 참고할 것이 없고 오직 좀이 먹어서 글자가 절반이나 없는 것을 일본 사람 쓰보이(坪井(평정))씨가 간행한 ‘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을 얻었으니 그것이 유일한 자료이었다. 그러나 하나의 절을 찾으려면 반드시 그 책 전부를 뒤지지 않으면 안되므로 그것의 용이한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 곧 가나다순으로 공책에 기입한 것이다. 그 뒤에 이어서 ‘梵字攷(범자고)·伽藍攷(가람고)’ 등을 거기에다 첨가하고, 현재의 사찰을 그 당시 本山(본산)에 부탁해서 얻는 대로 기입한 것이라, 規則(규칙)도 없고 순서도 없다.
  그나마도 이제는 餘月(여월)이 없으니 완전히 集結(집결)되기는 거의 절망이고, 그대로 버려두면 그 역시 前功(전공)이 아까우므로 不規則(불규칙)·無順序(무순서)한 그대로 정서하는 뜻은 他日(타일)에 이에 同好(동호)하는 이가 있으면 그이에게 다소의 힘의 도움이 될까 바라는 바에서이다. 일찍이 高麗(고려)때 大覺國師(대각국사)가 그 세력을 가지고 그 地位(지위)에 있으면서 ‘釋苑詞林(석원사림)·圓宗文類(원종문류)’의 두 巨帙(거질)을 만들어서 간행까지 했건마는 지금에는 얻어 볼 수 없거늘 하물며 未完成(미완성)의 이 草草(초초)한 원고  쯤이야 일러 무삼하리고. 허 우습도다.
  佛紀(불기) 2990年(년) 甲辰(갑진) 浴佛月(욕불월)에 집필하면서
  八十五歲(팔십오세) 病餘(병여) 沙門退耕相老自書(사문퇴경상노자서)라고 하였다. 실로 一件一禱(일건일도)의 거룩한 흔적이 짙어 안도의 한숨마저 보인다. 내 아니면 누가 이를 하겠냐는 자부심까지 시렸음을 볼 때 절로 머리가 숙는다.
  워낙 선생은 敎學(교학)의 ‘옥편’이요 ‘사전’이요 字學(자학)의 指道(지도)이셨다. 그래서 흔히 길잡이의 할아버지로 우러렀다. 물어서 모르시는 법이 없으셨고, 혹 모르시면 기어코 손수 찾아서라도 통기까지 해주시는 선생이셨다. 이러구러 도서관이 바로 선생의 사랑채셨다. 그 因果(인과)가 바로 이 ‘韓國寺刹全書(한국사찰전서)’ 등의 編著(편저)임은 물론이다. 일찍이 ‘杜詩諺解(두시언해)’의 해제를 초할 때도 실은 이 ‘全書(전서)’의 카아드가 실마리였음을 생각할 때 당시 눈을 씻었던 일이 사뭇 어제와 같다. 다시금 손을 모아 敬拜(경배)한다.
  선생께서 열반하신지도 하마 15년, 그리도 공을 쌓으신 ‘韓國寺刹全書(한국사찰전서)’ 등의 옥고가 한갓 휴지로 넘겨질 뻔도 했고, 한편 상기도 빛을 보지 못하는 원고묶음도 한두 가지가 아님을 몹시 안쓰럽게 여긴다. 우리 東國大(동국대)도서관에 보장돼있는 ‘朝鮮佛敎史料(조선불교사료)’ 외에도 ‘字學管窺(자학관규)’와 ‘朝鮮樂府全書(조선악부전서)’, 그리고 ‘梵字攷(범자고)’를 비롯한 논문이 그대로 묵고 있다. 생각사록 안타깝고 송구스런 일이다.
  끝으로 이 ‘韓國寺刹全書(한국사찰전서)’ 등 원고를 사들이게 힘쓰신 金東華(김동화) 趙明基(조명기) 두선생의 지극한 뜻과 이를 인쇄에 붙이기 위해 補訂(보정)부분을 따로 옮겨 써서 정리하느라 수고한 金鎬鎭(김호진)부장의 賢勞(현로)를 명기하며, 아울러 학문을 위하는 일념으로 이를 출판에 회부한 東國大出版部(동국대출판부)의 英斷(영단)을 기리면서 삼가 선생의 끼치신 뜻을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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