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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短篇小說(단편소설) 겨울소묘 <2>
  • 김미경 <국교과>
  • 승인 1979.06.12
  • 호수 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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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궁금해서 슬그머니 남자를 훔쳐보았다. 나라는 존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담배를 태우는데 골돌하고 있었다. 남자의 초연한 태도가 묘하게 자존심을 긁었다. 전혀 이쪽을 의식하지 않고 있는 것이 확인되자 배신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불쾌했다. 차가 정거장에 멈출 적마다 마음이 초조해졌다. 행여 남자가 내려야 될 역이 아닌가 해서. 스스로도 납득이 가지 않는 심경의 변화였다.
  더 이상 무관심을 가장하고 있기가 싫었다. 꽤 오랜 시간을 머뭇거리다 정면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밤색 잠바에 군복 바지. ‘창피하지 않다면...’ 이렇게 말을 시작한 것은 허술한 옷차림 때문이었을까? 남자의 옆모습에서 물기 젖은 눈동자가 망막에 들어와 박혔다. 생의 어두운 비밀이 담겨 있는 눈이었다. 그 깊이를 향해 서투른 잠수질을 시도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왜 저에게 말을 걸었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느닷없는 질문에 남자는 약간 놀라는 눈치였다. 피우던 담배를 발로 비벼 끄며 입을 열었다.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때문이죠’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라니.
  남자는 해명의 필요성을 느꼈는지 덧붙였다.
  ‘개찰하기 전에 댁의 바로 뒤에 서있었어요. 그래서 아우렐리우스의 사랑의 일기에 관한 얘기를 엿들을 수 있었지요’
  한 시간도 더 남은 개찰을 기다리기는 지루했다. 그래서 전송 나왔던 K와 잡담을 늘어놓았었다. 그러나 남자는 전혀 기억에 없다. 아마 전광판의 숫자에만 정신이 팔려 있어 보지 못했나 보다. 극히 개인적이고 당황한 이야기를 이 뒤에 서있던 남자에 의해 청취되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쓸데없는 이야기들뿐이었는데...’
  겸연쩍어서 말꼬리를 흐렸다.
  ‘아니에요. 아주 재미있어서 같이 얘기하고 싶었어요. 나는 당신의 새가 되고 싶어요. 라는 친구분 말에 반박을 하셨죠. 새 앞에 소유격이 붙는 것은 부당하다고.’
  ‘괜한 트집을 잡은 거에요. 그건 줄리엣의 대사에요. 제 친구는 비극적인 연애에 관심이 많거든요.’
  철로 위를 구르고 있는 바퀴의 움직임이 서서히 늦추어졌다. 희미한 가로등이 졸고 있는 역을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처연한 뒷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 남자는 어디서 내릴 것인가?
  조금씩 어둠이 뒷걸음치고 있었다. 서서히 스며들어온 빛이 아침을 몰고 왔다.
  정동진에서 차를 내렸다. 차표에는 강릉이라고 선명히 박혀있지만 상관없는 일이다. 애초부터 명확한 목적지는 없었다. 다만 떠나기 위해서, 그리고 종점이라는 사실이 강릉을 택하게끔 했던 것이다.
  남자가 가볍게 고개 숙여 목례한 다음 차를 내릴 때까지도 나는 강릉을 꿈꾸고 있었다. 경포대가 있는 강릉을.
  남자는 역원에게 표를 건네고 있었다. 기차가 막 움직이려 할 때 뛰어내렸다. 이대로 헤어질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이 나를 몰아 세웠기 때문이다. 막상 차를 내리고 보니 막연했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어처구니없는 결단이었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무조건 내린 것이다. 강릉 가는 기차를 물었다. 버스가 있다는 걸로 보아 가까운 거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만치 앞서서 걷고 있는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뒤로 쳐져서 그와의 거리를 넓혔다.
  정동진은 호수가 얼마 안되는 작은 부락이었다. 아침을 준비하는지 보기 힘들게 된 초가집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날리고 있었다. 자그마한 계집아이가 뒷마루에 걸터앉아 이쪽을 살피고 있었다. 이방인에 대한 본능적인 경계와 호기심을 엿볼 수 있었다.
  남자는 벌써 길모퉁이를 돌고 있었다. 놓칠 새라 부지런히 걸었다. 남자에게도 이곳이 낯선 고장임에 틀림없다. 정처 없이 이곳저곳 어슬렁거리는 불안정한 걸음걸이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게다가 짐도 없다.
  마을을 지나 논둑길로 접어들었다. 너덜너덜한 누더기 옷을 우스꽝스럽게 걸쳐 입고 있는 허수아비가 빈 논을 지키고 있었다. 겨울은 왜 이렇게 모든 것을 황량하게 만들고 있을까. 허허 벌판이 그렇고 앙상한 나무와 차거운 얼음장의 두께가, 그리고 빈 마음이, 양팔을 벌리고 서있는 허수아비가 바람을 안고 넘어진다.
 

김미경 <국교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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