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미친 사람이었다. 언젠가 시내 버스를 타고 어느 큰 시장 앞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 시장의 한 복판에는 철에 맞지 않는 지저분한 옷을 입은 어떤 사람이 주위에는 아랑곳없다는 듯이 앉아 있었다. 그는 무슨 말을 하는지 입을 달삭거리면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오늘 문득 미친 이가 되고 싶다. 아니, ‘오늘 문득’이 아니다. 潮水(조수)에 밀리는 모래처럼 출렁이는 햇볕아래를 걷고 있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한없이 초라해 뵈기만 하는 자신을 주체하기가 힘들거나, 어설픈 젊음 때문에 내 주위로부터 태연해질 수 없는 자신이 심히 부끄럽게 생각될 때면 늘 나는 미친이의 그 自己世界(자기세계)에 대한 몰두가 부러웠었다.
  단지 외롭다는 이유로 우리는 자신과의 대화, 그 외로운 속삭임을 너무 두려워 한다하여 너무나 많은 대가를 치르면서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쓴다. 그것이 결국은 자기영역으로부터의 소극적인 후퇴이고 상실인 것을 느끼면서 또는 느끼지 못하면서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과 협상을 하고, 양보하고 스스로를 관용한다. 흑과 백의 세계 밖에는 그것들이 적당히 양보해서 이루어 놓은 회색의 지역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스스로 대견해 했을 것이다. 아무런 아픔도 없이 구두를 신고 양복을 걸치고 술, 담배를 배우고 화장을 하고 雜技(잡기)를 익히며, 아무런 느낌도 없이 우리의 이름 옆에 도장을 찍으면서 우리는 그 회색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는지 모른다. 양쪽을 조금씩 비웃을 수 있고 회색이 제공하는 애매한 그늘과 알맞은 소음 때문에 부끄럽지도 않고 불안하지도 않아서 그곳은 좋은 곳일 것이다. 언젠가 내 친구는 ‘크게 타락하진 않는다’라는 것을 자기의 行爲規範(행위규범)으로 삼는다고 나한테 말했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부끄러운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섬뜩해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안에 자리 잡고 있던 능청스런 회색의 푯말을 그 친구의 입을 통해서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조금만 타락한다’라는 말보다 훨씬 세련된 표현이다. 타락뿐만 아니라 우리는 저 모든 ‘크게’라는 단어와 타락을 부정하는 부정어가 만들어내는 묘한 의미에 협조하는 제3의 共犯者(공범자)가 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
  뜨거운 철판 위에 서있기 위해 곰은 슬픈 몸짓을 해야 한다. 곰에게 있어서 뜨거운 철판의 느낌은 하나의 본능처럼 되어 버리고, 그 느낌을 떨쳐버리기 위한 몸짓은 춤으로 굳어 버린다. 그것은 꿈에게 있어서는 喪失(상실)이다.
  우리는 어차피 끊임없는 외로움 속에서 살기 마련이다. 젊기 때문에 외로움이라는 갈증을 더 느끼는 지도 모른다. 그 갈증을 던져 버리기 위해 우리는 슬픈 몸짓을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그 몸짓은 겨우 사이다나 콜라 정도를 얻기에 알맞은 시시한 것은 아닌가? 그것들은 마신 후에 올 더 큰 갈증을 생각해 보지도 않거나 혹은 그것들을 마시는 데 꽤 익숙해져 있지는 않은가? 한낮에 켜있는 형광등만큼이나 시시한,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言語(언어)와 行動(행동)을 하면서 우리는 꾸역꾸역 회색의 지역으로 몰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떠들지 말자 그리고 시시하지 말자.
  그것은 喪失(상실)이다. 매너리즘과 流行(유행) 비슷한 것들 속에 남과 함께 묻혀 버리는 空虛(공허)함 보다는 외로움을 부둥켜안고 자신을 사랑하며 열심히 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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