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정체성 벗어나야

  77년 9월 15일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 한국을 세계의 최고봉에 8번째로 서게 했던 등산가 高相敦(고상돈)(32)씨가 북미 최고봉 매킨리(6천1백94m)정상을 정복한 후 下山(하산)길에서 대원 李登敎(이등교)씨와 해발 6천m지점, 경사 65도의 가파른 빙벽에서 실족, 8백20m 아래로 떨어져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요사이 젊은이들의 未知(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 거기에 대한 희생은 무척이나 크다. 그러나 이러한 慘變(참변) 때문에 그들의 용기가 줄어들고 도전이 중지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서 이 글을 쓴다.
  미국의 서부개척사에서 E·J 타너가 그의 저서 ‘美國史(미국사)에 있어서의 프론티어의 의의’에서 말한 것처럼 자유의 開拓精神(개척정신)(Frontier Spirit)이 오늘의 미국을 이룩했으며, 북구라파제국을 볼 때 그들의 국립박물관엔 돛대는 다 부러져가고 목재가 다 썩어 들어가는 범선이 국보이며, 8~10세기에 걸쳐 망망대해에 목숨을 걸고 활약했던 해적(Viking)들이 현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는 그들 국가의 조상이다. 이처럼 발전이란 것은 躍動(약동)하는 움직임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 비해 우리의 과거는 어떤가. 연일 우리의 매스컴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고 있는 韓國美術(한국미술) 5천년전에 개막 한달만에 8만2천명을 동원했다고 자랑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내세우는 것은 고려靑瓷(청자) 이조백자 金銅彌勒半跏思惟像(금동미륵반가사유상) 등 어느 하나 움직임이란 찾아볼 수 없는 고요함(靜(정)). 너무나 뚜렷이 정체성을 나타내고 있다. 어디에서 전진이란 용어를 찾을 것인가.
  지금의 일본이 세계 속의 경제대국이란 자리를 차지한 것도 그들 조상의 기질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우에무라 나오미’(植村直己(식촌직기))같은 젊은이들이 북극을 개썰매에만 의지하여 횡단하는 거대한 자연에 대한 투쟁이 오늘의 그들을 만들었다.
  우리가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도 젊은이들이 5대양 6대주에 도전하여 아프리카 奧地(오지)에서 하나의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中東(중동)에서 50도를 오르내리는 暴炎(폭염)속에서 부지런히 뛰어다닌 결과이다. 이처럼 한나라의 경제적 富(부)는 개척정신에 대한 응집력이 어느 정도냐는 문제에 결부된다. 未知(미지)의 세계에 도전한다는 것 안전을 기하자니 의욕이 상실되고, 모험이 크자니 인명의 손해라는 딜레마에 빠지는 수도 있다. 그 손해는 발전을 위한 거름이다.
  이러한 노력을 영국의 예에서 찾아보자. 1577년 ‘엘리자베드’1世(세) 시대에 ‘프란시스 드레이크’ 船長(선장)이 ‘포르투칼’의 ‘마젤란’에 이어 두 번째로 帆船(범선)으로 세계 일주를 했던 업적을 기념, 영국 과학탐험협회(SES)가 1백50t의 범선에 세계의 젊은 탐험가들을 싣고 오는 10월부터 1년간에 걸쳐 지구상의 秘境(비경) 奧地(오지)들을 탐험하는, 우리가 보기엔 지극히 위험한 세계 일주 ‘드레이크’작전을 계획하고 있다. 4백년전 ‘드레이크’선장의 세계 일주는 ‘스페인’의 보물선을 습격해서 영국에 부를 가져다 준 것으로 유명하지만 이번의 ‘드레이크’작전은 젊은이에게 거대한 자연의 위험 앞에 얼마나 지탱할 수 있는가 하는 귀중한 경험을 갖게 할 것이다.
  이처럼 젊은이에게 탐험심, 용기, 개척정신을 갖게 하는 것은 나를 발전시키는 捷徑(첩경)이다. 이 같은 의미에서 두 山岳人(산악인)은 선구자였으며 그들이 흘린 피는 우리의 앞날을 위한 횃불이다. 꾸준한 도전 거기에서 실패를 체험하며, 동시에 또 다른 도전에서 좌절도 느끼며, 결국 성공하게 되었을 때 우리의 기쁨은 더욱 크고 내조국은 더욱 발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두 산악인의 희생이 더욱 값진지도 모른다. 우리가 치러야 할 것을 그들이 대신 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새삼 명복을 빈다.
  물론 高相敦(고상돈)-李登敎(이등교) 대원의 정상도전은 관례에 비추어 너무 성급했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으며, 他(타)티임과의 경쟁심에 악천후를 무릎 쓴 모험극을 연출했다는 비판도 일리는 있다. 세계 최고봉 히말라야를 발아래 두었던 그도 결국 한 치의 허점에 기습 당한 것은 모든 산악인에게 두고 두고 큰 교훈으로 자리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해외등반을 규제한다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아들이 소중한 나머지 ‘여기도 가지마라’ ‘그것도 하지마라’ 집안에만 가둬두다가, 아들이 悲觀(비관), 자살하자, ‘아차 방에도 못 들어가게 할 걸’했다는 우화를 새겨봐야 하겠다.
  아울러 東國山岳人會(동국산악인회)의 히말라야 등정계획 또한 빨리 실행, 결실되어 두 山岳人(산악인)의 의지를 이어야겠다. ‘거기 山(산)이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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