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머리말

  ‘韓國人(한국인)의 선비思想(사상)’이라는 제목은 우리에게 무엇을 던져주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기대를 가져보게 하는 제목 같다. 두들기면 무엇인가 나올듯한 그 ‘무엇’이 들어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이제 우리가 세계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피로와 허탈감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와 ‘무엇’인가를 찾아보려는 마음(心情(심정))과 같은지도 모르겠다. 또는 요즘 우리에게 있어서 ‘가치관이 서야 되겠다’고 외치는 소리가 귓전에 들려오듯 그러한 생각에서 이 제목이 주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선비’란 이제 없는 것, 그래서 무엇이 ‘선비思想(사상)’이냐고 묻는다면 얼른 대답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닌 상 싶다. 하지만 歷史(역사)를 더듬어 살펴보리라.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나누어서 살펴보겠다. ‘선비’의 槪念(개념), ‘선비’의 價値觀(가치관), 韓國人(한국인)의 선비思想(사상), 그리고 結語(결어). 그러나 이것을 잘못하면 野談(야담)같은 것이 되고 論文(논문)은 아니 될 수도 있으리라. 이 點(점)을 主意(주의)하면서 나의 말을 계속해 본다.


二. ‘선비’의 槪念(개념)

  먼저 우리는 ‘선비’라는 槪念(개념)을 確定(확정)할 必要(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槪念(개념)이 定(정)해지지 않으면 理論(이론)을 展開(전개)하더라도 그 論文(논문)은 초점이 흐려져서 뚜렷한 생각을 찾기 힘드는 까닭이다.
  ‘선비’라는 말은 옛말은 ‘션비’ ‘션뷔’또는 ‘선븨’ 라고 한다.(劉昌停著 李朝語辭典(유창정저 이조어사전) 그것은 漢字(한자)로 學生(학생), 校生(교생), 儒生(유생), 士大夫(사대부)들을 이르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도리어 그것은 朝鮮朝(조선조) 때의 儒家社會(유가사회)에서 쓰이던 말이었다. 그러면 ‘선비’란 儒家社會(유가사회)에서만 있었던가. 그런 것은 아니다. ‘선비’라는 말은 비록 士(사), 儒生(유생), 學生(학생), 校生(교생), 士大夫(사대부)라는 漢字(한자)로 나타내기는 할지라도 그 말은 본시 순수한 우리나라 말인 것 같다. 그리고 그와 같은 ‘선비’의 뜻은 高麗(고려)때에는 崔沖(최충)의 十二徒(십이도), 國仙(국선), 四仙(사선), 八關仙郞(팔관선랑), 그리고 다시 더 더듬어 올라가면 新羅(신라)의 花郞(화랑)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생각된다.
  ‘선비’의 기원은 花郞(화랑)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선비’는 그때 그때의 역사적 사명과 樣相(양상)에 따라 조금씩 그 성질과 모습을 달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선비’의 개념을 花郞(화랑)에 까지 올라가 생각하고자하는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이제 光陽(광양) 玉龍寺(옥룡사) 洞眞大師(통진대사) 寶雲塔(보운탑) 碑文(비문) (朝鮮 金石總 現上(조선 금석총 현상))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말을 볼 수 있고, ‘心學(심학)’이라는 말은 이미 圓光西學(원광서학)에서 찾아지며, 圓光(원광)은 또 世俗五戒(세속오계)(事君以忠(사군이충) 事親以孝(사친이효) 交友有信(교우유신) 臨戰無退(임전무퇴) 殺生有擇(살생유택))를 貴山(귀산)과 箒項(추항)에게 주어 그것이 바로 화랑도를 일으킨 근본이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玉龍寺(옥룡사) 洞眞大師(통진대사) 寶雲塔(보운탑) 碑文(비문) 가운데 있는 그 말을 본다. 그 말은 ‘非心學者(비심학자) 栖遲之所函去之不宣乎(서지지소함거지불선호)’라는 말이다. 여기서 ‘栖遲之所(서지지소)’라는 말은 ‘벼슬하지 않고 빈둥빈둥 놀고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의 전체의 뜻은 ‘心學者(심학자)가 아닌 사람은 벼슬하지 않고 놀고 있는 것이라, 곧 거기서 떠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라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心學者(심학자)는 벼슬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心學(심학)‘은 이미 圓光法師(원광법사)에게 있었고(三國遺事(삼국유사)·圓光西學(원광서학)) 또 圓光(원광)이 貴山(귀산)과 箒項(추항)이라는 두 젊은이에게 世俗五戒(세속오계)를 주었으며 그것이 花郞道(화랑도)를 일으킨 근본이라고 본다면 여기 花郞道(화랑도)와 ’선비‘의 槪念(개념)사이에는 어떠한 聯關性(연관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선비’의 槪念(개념)을 구성하여 본다. 이희승편 ‘국어대사전’ 가운데는 다음과 같이 그 낱말의 뜻을 풀이해 놓고 있다.
  ①옛날 학식이 있되 벼슬하지 아니한 사람 ②학문을 닦은 사람을 예스럽게 일컫는 말. ③마음이 어질고 썩 순한 사람. 이라고 되어있다. 이것을 줄여서 말하면 ‘벼슬이야 하든 말든 학식 있고 마음씨 착한 사람’ 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이희승씨는 ‘벼슬하지 않은 것’을 강조한 듯하지만 ‘선비’라는 것은 벼슬하고 아니하고가 문제가 아닌 학식 있고 德(덕)이 높은 사람을 이르는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옛 時調(시조)(海東歌謠(해동가요)) 가운데도 ‘長白山(장배산)’에 旗(기)를 곳고 豆滿江(두만강)에 말싯기니서근 져 션븨야 우리 아니 사나회냐,,,’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 時調(시조)로 보면 글만 잘한다고 ‘선비’가 아니라 용맹한 사나이도 ‘선비’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따라서 ‘선비’는 文班(문반)만을 이르던 말이 아니라 武班(무반)도, 양반 모두가 ‘선비’에 포함되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그 가운데서도 더 무게를 가지는 말은 학식과 德(덕)을 갖추어 가지고 있는 사나이라는 말로 간추릴 수가 있으리라.
  丁茶山(정다산)도 그의 ‘俗儒論(속유론)’에서 참다운 ‘선비’의 배움은 ‘본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하게 하며 夷狄(이적)을 쳐부수며 財用(재용)을 넉넉하게 하며 능히 글을 잘할 수 있고 또 武(무)를 잘 쓸 수 있어서 마땅하지 않은 바가 없다.
(眞儒之學本欲治國安民夷狄裕財用能文能武無所不當(진유지학본욕치국안민이적유재용능문능무무소불당)‘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볼 때 ‘선비’란 비록 한자로 儒生(유생), 學生(학생), 校生(교생), 士大夫(사대부), 君子(군자) 등을 모두 이르는 말이라고는 하나 학식이 있어 文武(문무)를 겸하고 治國安民(치국안민)하여 無所不當(무소불당)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라고 하겠다.


三. ‘선비’의 價値觀(가치관)

  여기서 ‘선비’의 價値觀(가치관)을 살펴보겠다는 것은 ‘선비’가 지니고 있는 價値觀(가치관)을 알아보고 거기서 ‘韓國人(한국인)의 선비思想(사상)’을 뽑아내 보려는 뜻이다.
  먼저 丁茶山(정다산)의 牧民心書(목민심서)에서 몇 가지 뽑아서 살펴본다.

  ①除拜(제배)(官位(관위)를 주는 것)에서 그는 ‘다른 벼슬은 가히 求(구)할 것이나 牧民(목민)의 벼슬은 求(구)할 것이 못된다.(他官可求牧民之官不可求也(타관가구목민지관불가구야))’. 茶山은 왜 이런 말을 하였을까. 그것은 그때나 이제나 牧民官(목민관)은 괴롭고 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을 본다. ‘위를 섬기는 것을 백성이라 이르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牧民(목민))은 선비(士(사))다. 선비(士(사))라는 것은 섬기는 (仕(사))것이다. 섬기는 것은 모두 牧民(목민)하는 것이다. 그런데 京官(경관)은 혹은 供奉(공봉)(天子(천자)를 뫼시는 것)하는 것으로써 그 벼슬(職(직))을 삼고 혹은 典守(전수)로써 섬기며 小心(소심)하고 勤愼(근신)하여 無罪(무죄)를 바라고 뉘우치나 다만 守令(수령)이라는 것은 萬民(만민)을 다스리고 하루의 여러 가지 일들(一日萬機(일일만기)은 구체적이고 細微(세미)하여 더불어 천하를 이루고 있다. 國家(국가)라는 것은 비록 크고 작고 다르더라도 그 자리는 참으로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어찌 牧民官(목민관)을 구하겠는가.(事上曰民(사상왈민), 牧民曰士(목민왈사), 士者仕也(사자사야), 仕者皆牧民者也(사자개목민자야), 然京官(연경관), 或以供奉爲職或以典守爲仕(혹이공봉직혹이전수위사), 小心勤愼(소심근신). 庶無罪悔(서무죄회), 唯守令者萬民之宰(유수령자만민지재), 一日萬機(일일만기), 具體而微與爲天下(구체이미여위천하), 國家者大小雖殊(국가자대소수수), 其位實同(기위실동), 斯豈可求者乎(사기가구자호)’라고.
  그런데 오늘날 우리사회에서는 어떠한가.
  ②官位(관위)를 받은 처음에 재물은 법에 어긋나고, 禮(예)에 벗어나게 베풀어서는 아니된다.(除拜之初財不可濫施也(제배지초재불가람시야). 왜냐하면 守令(수령)의 俸祿(봉녹)은 날로  날로 計量(계량)되어 있으나 그것을 날마다 쓰는 것은 가난(貧(빈))할 조짐(兆(조))이고 또 守令(수령)이 아직 任地(임지)에 도착하지도 않고 몸은 서울을 떠나지 않았는데 어찌 그 邑(읍)의 재물을 쓸 것인가, 라고 그는 반문한다.
  ③衣服(의복)과 말안장을 치장하는데 옛것을 새것으로 바꾸어 만들지 말라.
(治裝其衣服鞍馬並因其舊不可新也(치장기의복안마병인기구불가신야))
  왜냐하면 ‘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은 節用(절용)하는 것이고, 節用(절용)의 바탕은 검소한(儉(검)) 것이다. 검소한 뒤에 能(능)히 청렴(廉(렴))할 수 있고, 청렴한 뒤에 能(능)히 사랑할 수 있으니, 검소한 것은 牧民(목민)의 첫째로 힘쓸 일이다.(愛民之本性於節用節用之本在於儉(애민지본성어절용절용지본재어검), 儉而後能廉(검이후능렴), 廉而後能慈(렴이후능자), 儉者牧民之首務也(검자목민지수무야)). 節用하는 것이 첫째라는 말이다.
  ④간사하고 해괴한 말을 깨부수고, 올바른 길로 이끌라(宜由正路以破邪怪之說(의유정로이파간사지지열).
  ⑤公事(공사)를 할지라도 한가한 틈이 있으니 반드시 정신을 가다듬어 고요히 백성을 편케 할 것을 생각하고 지성으로 착함을 求(구)하라(公事有暇必凝神靜慮思量安民之策至誠求善(공사유가필응신정려사량안민지책지성구선).
  ⑥말(言)을 많이 하지 말고 급히 노여워하지도 말라(毌多言毌暴怒(관다언관폭로)). 이에 대하여 茶山(다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백성의 위에 있는 사람은 一動一靜(일동일정) 또, 한번 말하고, 한번 말하지 않는 것이 모두 아랫사람에게는 살펴보게 하고 의심하며 살펴보게 되니 그것은 房(방)에서 門(문)으로 門(문)에서 邑(읍)으로 邑(읍)에서 西方(서방)으로 한길로 퍼지게 된다. 君子(군자)는 집에 있을 때라도 말을 삼가는데 하물며 벼슬자리에 있어서랴.(爲民上者一動一靜一語一黙在下者皆伺察猜摸由房而門由門而邑由邑而達於四境布於一路君子居家尙當愼言況居官乎)(위민상자일동일정일언일점재하자개사찰시모유방이문유문이읍유읍이달어사경포어일로군자거상당신언황거관호가))라고.
  ⑦君子(군자)는 진중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으니, 백성의 위에 있는 사람은 꼭 진중하여야 한다.( 君子不重則不威爲民上者不可不持重(군자불중칙불위위민상자불가불지중))
  ⑧酒色(주색)을 끊고 노래 소리를 물리쳐라.(斷酒絶色屛去聲樂...(단주절색병거성악))
  ⑨政事(정사)하는 집에서 글 읽는 소리가 있으면 이것은 可(가)히 맑은 선비라 이른다.(政堂有讀書聲斯可謂之淸士也.(정당유독서성사가위지정사야)

  여기까지가 牧民心書(목민심서)의 券一(권일)에 있는 말들 가운데서 몇 가지만 뽑아서 말한 것이다. 다음은 券二(권이)에서 券四(권사)까지에 있는 말을 몇 가지 뽑아본다.

  ⑩청렴한 것은 백성을 다스리는 본무요, 모든 선의 근원이며, 여러 가지 덕의 뿌리다. 따라서 청렴하지 않고 백성을 잘 다스린 사람은 아직 없다.(廉者牧之本務萬善之源諸德之根不廉而能牧者未之有也) (렴자목지본무만선지원제덕지근불렴이능목자미지유야)
  ⑪자기 몸을 닦은 뒤에 가정을 다스리고, 가정을 다스린 뒤에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천하를 통하는 뜻이다. 만일 그 읍을 다스리고저 한다면 먼저 그 집을 다스리라(修身而後齊家齊家而後治國天下 之通義也欲其邑者 先齊其家(수신이후제가제가이후치국천하 지통의야욕기읍자 선제기가).
  이 말은 대학의 8조목에서 온 말이니 따로 새로운 말은 아니다.
  ⑫衣服(의복)의 사치스러움은 뭇사람이 꺼려함이요, 귀신도 미워하는 바이며 福(복)을 꺾는 길이다.(衣服之奢衆之所忌鬼之所嫉折福之道也(의복지사중지소기귀지소질절복지도야))
  ⑬請(청)하더라도 行(행)하지 않고 뇌물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는 可(가)히 옳은 家庭(가정)이라 이를 것이다.(干謁不行苞茋不入斯可謂正家矣(간알부행포저부입사가위정가의))
  ⑭잘 백성을 다스리려면 반드시 사랑(慈(자))스러워야 하며 사랑스럽고저 하면 반드시 청렴하여야 하며 청렴하고저 하면 반드시 절약하여야 하나니 節用(절용)은 백성을 다스리는 첫째로 힘쓸 일이다.(善爲牧者必慈欲慈者必廉欲廉者必約節用者牧之首務也(선위목자필자욕자자필염욕염자필약절용자목지수무야)
  ⑮절약하는 것은 制限(제한)하는 것이다. 제한하려면 반드시 法式(법식)이 있어야한다. 法式(법식)은 節用(절용)의 根本(근본)이다.(節者限制也限以制之必有式焉式也者節用之本也(절자한제야한이제지필유식언식야자절용지본야)
  ⑯節約(절약)하면서 親威(친위)와 헐어지지 않고 이것을 물리치며 즐겁게 베푸는 것은 德(덕)을 세우는 根本(근본)이다.(節而不散親威畔之樂施者樹德之本也(절이부산친위반지낙시자수덕지본야))
   ⑰나라를 위하여서는 사람을 쓰는데 있고 郡縣(군현)은 비록 작으나 그 사람을 쓰는 데는 다를 바가 없다.(爲邦在於用郡縣雖小其用人無以異也(위방재어용군현수소기용인무이이야))

  이렇게 하여 茶山(다산)은 牧民心書(목민심서)를 卷十四(권십사)로 끝마친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을 다 말할 수도 없고, 또 必要도 없다.
  다음에는 각종 文獻(문헌)에 나타나 있는 風俗關係資料(풍속관계자료)에서 ‘선비’의 價値觀(가치관)을 살펴본다. 내가 참고로 한 책은 朝鮮總督府中樞院編(조선총독부중추원편), 風俗關係資料提要(풍속관계자료제요)다. 그것에서 뽑은 것을 여기 몇 가지 적어본다.

  ①牛溪先生(우계선생)은 집에 있을 때에는 매일 아침 祠堂(사당)에 나아가 拜禮(배례)하고 반드시 外堂(외당)으로 나가 있다. 무슨 일이 있지 않으면 內堂(내당)으로 들어가지 않으며 內子(내자)와 함께 옷을 맞대고 앉지 않아 서로 떨어져 앉는다. 또 일찍이 子孫(자손)들에게도 이르기를 姉妹(자매)의 지아비가 없을 때에는 밤에 그 房(방)에 들어가 자매와 더불어 얘기 하지 말라고 일렀다.(目睫錄卷四(목첩록권사))
  ②顯宗(현종)(朝鮮朝(조선조))때에 同姓(동성)이고 本貫(본관)이 다른 사람이라도 혼인하는 것을 禁(금)하였다. 이것은 앞서 國法(국법)으로 同姓者(동성자)라도 本貫(본관)이 다르면 婚姻(혼인)을 허락하였기 때문이다.(見睫錄 卷四(견첩록 권사))
  ③色(색)을 멀리함
  李士亭(이사정)이 일찍이 濟州(제주)에 갔을 때다. 벼슬아치들이 반가이 맞으며 館(관)에 머물게 하였는데 美妓(미기)를 골라 公(공)과 同寢(동침)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公(공)은 그것에 應(응)하지 않았다.(見睫錄 卷五(견첩록 권오))
  ④儉素(검소)한 風習(풍습)을 崇尙(숭상)함
  士大夫(사대부)의 집은 모두 더럽고 堂(당)은 반드시 北向(북향)하다.(聞韶漫錄(문소만록))
  ⑤雜技(잡기)를 崇尙(숭상)하지 않는다.
  일찍이 魚孝瞻(어로첨)은 山家地理(산가지리)가 옳지 않다는 것을 辯論(변론)하다. 그는 上疏極諫(상소극간) 明白正大(명백정대)하다. 世宗(세종)께서 鄭麟趾(정린지)에게 下問(하문)하셨다. 孝瞻(효첨)의 論(론)은 옳으냐고. 鄭公(정공)은 옳다고 하였다.(獨坐聞見日記(독좌문견일기)
  ⑥淸白(청백)함
  朝鮮朝(조선조) 明宗(명종) 때의 사람, 淸白(청백)하고 兼簡(겸간)한 僧(승)이 한사람 있었다. 그가 退溪 李滉先生(퇴계 이황선생)에게 생강을 바치니 先生(선생)은 받지 않고, 이르기를 너는 이것을 의지하여 生理(생리)를 하려 한다. 그러니 나에게 그것을 바치려 하지 말라. 따라서 나는 이것을 받지 않겠노라.(銀潭筆錄(은담필록))
  ⑦直言(직언)함
  綾原大君編(능원대군편). 宣祖大王(선조대왕)의 長子(장자). 宗親(종친)들 가운데 俗淫祀(속음사)를 崇尙(숭상)하는 이가 많아 公(공)은 이르기를 그것은 鬼神(귀신)이 아니니 그것에 祭祀(제사)함은 天命(천명)을 믿지 않는 것이다. 어찌 그것에 대하여 禍福(화복)을 빌 것인가.(銀潭筆錄(은담필록))
  ⑧器量(기량)이 크다.
  鄭鳳洙(정봉수)는 宣祖(선조), 仁祖(인조)때의 사람인데 瞻量(첨량)이 있었다. 그는 鐵山理(철산리)에 살고 있었다. 이곳에는 큰 뱀(大蛇(대사))이 있어 사람을 보면 곧 발뒤꿈치까지 따라와 물으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뱀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이때 公(공)은 이웃 어린아이들과 謀議(모의)하여 이르기를 내, 이 뱀을 죽여 사람들의 害(해)를 덜어 주리다. 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公(공)은 꾀를 써서 어린이들과 뱀을 때려 죽였으니 이로써 公(공)이 비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라.(銀談筆錄 卷二(은담필록 권이))
  또 李九睕(이구완) 春元(춘원)은 어려서부터 氣魄(기백)이 있었다. 그가 11세때 大麓(대록)으로 들어가 두 호랑이가 싸우고 있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氣絶(기절)을 하였는데, 公(공)은 홀로 나무위에 올라가 보고 있었다. (日睫錄卷五(일첩록권오))
  ⑨謹愼(근신)
  朝鮮朝(조선조)때에 趙浚(조준)은 請(청)하여 士大夫(사대부), 庶人(서인)으로 하여금 父母忌日(부모기일)에는 마땅히 먼저 제사할 것이라 하고, 말(馬(마))을 타고 外出(외출)하는 것을 禁(금)하고, 또 賓客(빈객)이 오면 喪禮(상례)와 같이 몸을 갖으라고 하였다.(海東雜綠(해동잡록)
  ⑩里社(이사)를 두어 백성을 敎化(교화)함.
  各里(각리)마다 學德(학덕)있는 노인을 골라서 社長(사장)으로 삼고 黨序(당서)의 법에 따라 子弟(자제)를 敎導(교도)하고 자제들이 무리지어 놀고 들떠있는 風(풍)을 막게 하였다. (海東雜錄(해동잡록))
  ⑪禁除(금제)
  평시에 儒生(유생)들의 말 타는 것을 금하였다. 따라서 儒生(유생)은 신(履(리))을 신고 다녔다. 그러나 드물게는 騎行(기행)하는 이가 있었으나 이제는 가죽신(靴(화))을 신고 말을 타고 다녀 마치 朝官(조관)의 모습과 같았다.(銀潭筆錄 卷五(은담필록 권오))
  ⑫家法(가법) (銀潭筆錄 卷五(은담필록 권오))
  趙昱(조욱), 燕(연), 明宗朝(명종조)의 사람. 公(공)은 항상 外室(외실)에 있고 內閤(내합)으로 들지 않았으니 드물게 婢僕(비복)만이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어, 夫婦(부부)사이는 親昵(친닐)함이 없더라. 그리고 어쩌나 자리를 같이 할 때는 서로 禮(예)로써 마지하였으니 마치 賓客(빈객)과 같았다고 한다.
  徐思達(서사달. 明宗(명종), 光海朝(광해조)의 사람. 그는 아침 일찍이 일어나 先朝(선조) 家廟(가묘)에 拜禮(배례)하였다고 한다.
  鄭曄(정엽). 明宗朝(명종조)의 사람, 그도 아침 일찍이 일어나 家廟(가묘)에 拜禮(배례)하였다.
  廬禎(여정). 宣祖朝(선조조)의 사람, 그는 조상을 받드는 禮(예)가 옛 제도에 따랐는데, 무릇 先祖(선조)의 祭祀(제사)가 있어 그것이 겨울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沐浴(목욕)하고 祭祀(제사)하였다.
  李珥(이이). 明宗朝(명종조)의 사람. 家法(가법)이 매우 嚴(엄)하였다. 매일 아침 衣冠(의관)을 갖추고 사당에 拜禮(배례)하였고 초하루 보름에는 祠堂(사당)에 參尊(참존)한 뒤 正寢(정침)에 앉아 男女子姪(남녀자질)의 拜禮(배례)를 받았다. 이때 先生(선생)은 동편에 앉고 庶母(서모) 및 딸, 부인은 서편에 앉아 子姪婦女(자질부녀)들의 拜禮(배례)를 받는다. 婢僕(비복)은 뜰아래(庭下(정하))에서 배례하는데 男女(남녀)로 나누어서 차례로 行禮(행례)하였으니 가정은 肅穆(숙목)하여 마치 朝廷(조정)과 같았다.
   柳世勛(유세훈). 宣祖朝(선조조)의 사람. 家法(가법)이 매우 엄하였다. 남자로 하여금 안방에 들지 못하게 하고 여자로 하여금 남자와 말을 주고받는 것을 금하였다.
  宋瑚錫(송호석). 肅宗朝(숙종조)의 사람. 家法(가법)이 매우 엄숙하였다. 집사람들로 하여금 巫覡(무격)과 가까이하여 惑亂(혹란)되지 말게 하였다. 公(공)이 種痘(종두)를 앓고 위독하여 內子(내자)가 몰래 巫事(무사)를 하였는데, 公(공)은 이것을 알고 夫人(부인)을 靑(청)하여 이르기를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天命(천명)인데 어서 살 것이라면 聖人(성인)이 이것을 반드시 먼저 하였을 것이다. 어찌 巫覡(무격)이 우리 집을 위할 것인가라고.
  宋甲祖(송갑조). 가정을 다스리는데 엄한 法度(법도)가 있었다. 일찍이 從子(종자)집의 男女(남녀)가 서로 주고받으며 奴僕(노복)들이 있는데 시어미와 사위가 그 안에 끼어 들어가 앉은 것을 보고, 탄식해 이르기를 ‘우리집의 先法(선법)은 이제 망하였도다’라고.

  이만 뽑아본다. 茶山(다산)의 牧民心書(목민심서)를 비롯하여 각종 문헌에서 뽑아본 ‘선비’의 가치관을 抽出(추출)하여 다시 거기서 ‘선비思想(사상)’을 찾아본다.


  四. 韓國人(한국인)의 선비思想(사상)

  사상이라는 것은 하나의 사회에 있어서 오래오래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쌓이고 쌓인 생각들이 굳어진 것을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사상은 역사성을 가진다.
  여기서 ‘한국인의 선비사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抽出(추출)하기 위하여 우리는 文化史的(문화사적) 자료에서 조사해보았다. 그것은 대체로 朝鮮朝(조선조)때의 것이었는데 우리에게 주목을 끄는 것은 茶山(다산)에 있어서의 ‘愛民之本性於節用(애민지본성어절용)’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茶山(다산) 이전에 ‘사랑’이라는 말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때에 ‘愛(애)’자나 ‘慈(자)’라는 글자가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글자는 있었지만 윗사람과 아랫사람, 남녀사이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주고받는 일은 없었다. ‘사랑’이라는 말은 쓰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가 들어온 뒤의 일인 것 같다.
  茶山(다산)은 그리고 천주교인이었다.
  이와 같은 문화사적 현상은 오직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고, 西歐(서구)에 있어서도 같다. 그러면 이제까지 조사한 것을 간추려 본다.

  ①선비는 남을 섬길 줄 아는 사람
  ②백성을 사랑하는 사람
  ③至誠(지성)으로 善(선)을 구하는 사람.
  ④진중(鎭重)할 줄 아는 사람
  ⑤酒色(주색)을 멀리하고 삼가는 사람.
  ⑥讀書(독서)하고 淸廉(청렴)한 사람.
  ⑦조상을 잘 섬기는 사람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주로 朝鮮朝(조선조)때의 사상이다. 그러면 高麗(고려) 新羅(신라)때에는 <선비>를 무엇이라 일렀을까.
  高麗(고려)때에는 崔沖(최충)의 十二徒(십이도)라는 말도 있었지만 花郞(화랑)이라는 말의 전통을 이어받은 四仙(사선), 八關仙郞(팔관선랑), 國仙(국선), 仙家(선가)라는 말들이, 그리고 新羅(신라) 때의 화랑 또는 風流(풍류) 風月道(풍월도)라는 말들은 ‘선비’라는 말과 같은 말로 생각 된다.


  五.맺음말

  여기서는 다만 花郞(화랑)에 대한 말만 간단히 하고 끝을 맺겠다. 花郞(화랑)을 말하자면 圓光(원광)의 世俗五戒(세속오계)(事君以忠(사군이충), 事親以孝(사친이효), 交友有信(교우유신), 臨戰無退(임전무퇴), 殺生有擇(살생유택))를 먼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세속오계는 忠(충), 孝(효), 信(신)을 먼저 말하였는데 이것을 일러 중국의 儒學思想(유학사상)이라고 속단할 수도 있으나, 그는 왜 忠(충)을 먼저 내세웠던가. 그것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뚜렷한 그의 역사의식에서 그와 같이 말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이제 현전하는 <乞師表(걸사표)>를 쓸 때에 남긴 말 가운데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 世俗五戒(세속오계)는 花郞(화랑)의 정신적 지표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음은 金大問(김대문)의 ‘花郞世紀(화랑세기)’에 있는 말 ‘賢佐忠臣從此而秀(현좌충신종차이수), 將勇卒由是而生(장용졸유시이생)’이라는 말이다. 어질게 돕는 충신과 좋은 장수, 그리고 씩씩한 군인이 모두 이 화랑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셋째로는 崔致遠(최치원)의 鸞郞碑序(난랑비서)에서 國有玄妙之道曰風流(국유현묘지도왈풍류), 設散之源(설산지원), 備詳仙史實乃包含之敎(비상선사실내포함지교)라고 한 말이다. 여기서는 화랑이라는 말은 눈에 뜨이지 않으나 여기서 말하는 ‘玄妙之道(현묘지도)’ 또는 ‘風流(풍류)’라는 것이 화랑에게 정신적 좌표가 되었으리라는 것은 넉넉히 알 수 있는 일이다.
  넷째로 三國遺事(삼국유사), 景門大王條(경문대왕조)에 보면 ‘美行子三(미행자삼)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아름다운 行實(행실)의 세 가지라는 뜻인데 ’郞曰(랑왈), 윗사람으로서 남을 돕고 겸손하게 사람의 아래 앉는 것이 그 하나요(有人爲人上者而撝謙坐於人下其一也(유인위인상자이휘겸좌어인하기일야). 호화로운 부자이면서 옷을 검소하게 입는 것이 그 둘이요.( 有人豪富而衣儉易其二也(유인호부이의검역기이야) 본시 귀하고 권세 있으면서도 그 위엄을 쓰지 않는 것이 그 셋째다(有人本貴勢而不用其威者三也(유인본귀세이불용기위자기삼야). 이렇게 말하였는데 이것은 花郞(화랑)의 말로 되어있다. 따라서 이것은 花郞(화랑)의 思想(사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넷째의 思想(사상)은 朝鮮朝(조선조)때의 ‘선비’의 思想(사상)과 통하는 말이다. 茶山(다산)의 말과도 비슷한 데가 있다.
  따라서 나는 ‘선비’라는 말은 朝鮮朝(조선조)때에 쓰던 말이고 고려, 신라로 올라가면서 그것은 四仙(사선), 國仙(국선), 그리고 花郞(화랑)이라는 말로 불리운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선비思想(사상)은 청렴결백하고, 겸손하며, 검소하며, 남을 업수이 여기지 않고 남을 사랑하며, 자기 자신을 살찌게 하고, 정신과 육체를 함께 키워가는 것이라고 이를 수 있으리라. ‘선비’는 가고 이제 우리에게는 새로운 의미에 있어서 ‘선비’의 사상이 요구되고 있다. 자유 그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남을 모르고 자기의 할 일을 게을리 하며 무슨 자유를 찾겠다는 것인가. 玄妙之道(현묘지도)는 멀기만 하고 여기 ‘선비사상’이 새삼스럽게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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