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제)1期(기)의 公演活動(공연활동)

  東大(동대)연극 초창기의 공연목적은 무엇보다도 첫째, 布敎(포교)에 목적이 있었고 둘째, 축제의 일환이었으며 셋째, 민족운동이 암암리에 소용돌이쳤다고 할 수 있다. 그이유로서는 그 당시의 전국 불교 講院(강원)이나 포교당에서는 숱한 강연과 함께 연극은 꼭 한편씩 공연한 흔적이 ‘佛敎(불교)’誌(지)를 보면 나타나며 둘째, 이러한 행사는 주로 佛誕節(불탄절)과 成道(성도) 기념행사에 대다수 축제로 공연했다는 점이고 그 당시의 작품이 외적으로는 포교를 드러내고 있지만 內的(내적)으로는 억압민족의 서러움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
  제1회 작품이었던 <地獄花(지옥화)>의 내용은 이미 앞에서 밝힌바 있지만 全國(전국)에서 가장 많이 상연하였던 작품이다. <目蓮索人劇(목련색인극)>이란 이름으로 京畿道(경기도) 楊洲(양주) 晉光寺(진광사)에서 1929년 음력 1월 15일 포교의 목적으로 상연하기도 했고 1930년엔 <目蓮劇(목련극)>이란 이름으로 通度寺(통도사)에서 공연되기도 했는데 먼저는 4막으로 된 것이었고 通度寺(통도사)에선 7막으로 되어있다. 中專(중전)에서 公演(공연)된 目蓮劇(목련극)은 전 3막으로 된 金素荷(김소하)씨의 작품으로 제1막은 羅卜(나복)이 金地國行商(금지국행상)을 떠났다 돌아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제2막에서는 獄門(옥문) 앞에 당도한 目蓮(목련)(羅卜(나복))이 어머니를 구하려고 갔으나 獄門(옥문)이 열려지지 않는다. 제3막에서는 世尊(세존)이 나타나 옥문이 열리고 어머니를 구해낸다는 것을 그리고 있다. 이 作品(작품)은 <승리의 새벽> <떡> <佛心(불심)> <우주의 빛> <不滅(불멸)의 光(광)> <愛慾(애욕)의 未路(미로)> <구이仙女(선녀)> <錢禍(전화)> 등 많은 戱曲(희곡)을 낸 金素荷(김소하)씨가 쓴 것으로 東大(동대)에서 공연 후 改作(개작)하여 <盂蘭盆(우란분)>(전 3막)이란 이름으로 ‘佛敎(불교)’ 誌(지) 1932년 8월호에 全載(전재)했다.
  成道(성도) 기념행사로 1월초에 들고 나간 이 작품은 종로 四丁目(사정목)에 鴻谷久吉(홍곡구길)씨가 건설한 미나도座(좌)(30년 8월 24일 개관)에서 행하였는데 이곳 유원지(이곳엔 극장을 위시하여 미나도 美人街(미인가), 미나도 유원지, 미나도 데파트, 미나도 홀 등을 신설하였다.)는 처음 생기자 장안의 주목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곳에서 개관된 지 오개월만에 공연을 하게 되니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공연은 주로 낮에 기념행사인 강연회와 웅변대회에 이어 오후 7시에 상연했는데 장치는 주로 背景幕(배경막)을 이용한 배경화를 그렸고 무려 한달여의 연습 후에 공연돼 보는 이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때의 공연은 周東勳(주동훈), 姜裕文(강유문) 韓性勳(한성훈), 金龍鶴(김용학)씨 등 中專(중전) 1회 졸업생들이 중심이 되었다. 그 후 제2회 <꿈>공연은 作品(작품)은 당시 ‘一光(광)’誌(지)에 서사시 <梧桐曲(오동곡)>을 발표한 실력자 姜裕文(강유문)씨가 직접 글을 쓰고 연출도 담당하여 천도교 기념관에서 상연 했다. <꿈>이란 작품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이 작품도 불교적 색채가 짙은 현대물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렇게 하여 연극을 하는 방법과 가능성을 배운 이들의 연극修行(수행)은 계속 2회 3회 4회 졸업생으로 연결되고 작품도 질적으로나 量的(양적)으로 向上(향상)되어갔다.
  특히 金龍鶴(김용학)의 <法華(법화)> <筆報(필보)> 姜裕文(강유문)의 <因果應報(인과응보)>에 이어 공연될 제6회 공연부터는 작품의 색채도 퍽 다양한 방면으로 作品(작품)의 성격 또한 異彩(이채)로와 졌는데 白鐵(백철)씨의 <새벽> 金素荷(김소하)씨의 <떡>은 그동안 悲劇(비극)이나 正劇(정극)만 다루어 오던 東大(동대)연극이 처음으로 시도한 희극물이었다.
  특히 金素荷(김소하)씨의 <떡>은 작자가 스스로 밝힌바 이 작품은 <부처님께서 모든 학생들이 小貧大失(소빈대실)하는 迷見(미견)에 대하야 譬喩(비유)로 말삼하신 말삼인데 百喩經(백유경) 가운데 있는 譬喩法問(비유법문) 하나를 가져다가 희극으로 각색한 것>이다.
  배경은 印度王舍城(인도왕사성) 밖으로 되어있으나 내용은 우리의 피부에 어울리는 것이다. 방탕한 善意居士(선의거사)와 曼殊夫人(만수부인)이 사는 오막집, 음력 3월 보름(이날은 5년 전에 아들이 죽은 날이다.) 둘이 앉아 옛날을 생각하고 있다. 이때 福德童女(복덕동녀)라는 이웃 아가씨가 떡을 가져와 얘기는 바뀌고 떡 먹지 않기 놀이를 벌일 때 惡演婆羅門(악연바라문)이 들어와 귀중품을 몰아 보따리를 싸가지고 나갈 즈음 부인의 잔꾀로 도적을 면하고 떡을 먹는다는 얘기다. 어느 희극에서나 보듯 아주 간결하며 조잡한 사건이 극을 꾸며나가는데 이 작품도 역시 그런 점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데 대사의 뉴앙스가 이 작품을 한껏 돋보이게 한다.
  그다음 1933년도 말부터는 외국극에까지 손을 대기 시작했으니 싱클레이작 <二層(이층)의 사나이> 마이켈․골드의 <돈>과 같은 극이 그것이다. 
  이때는 주로 李台雨(이태우) 全俊浩(전준호) 玄壽吉(현수길) 등이 극을 이끌어갔다.
  그리고 崔金童(최금동)(琴桐(금동)) 白萬基(백만기), 孫商鉉(손상현), 吳化龍(오화용)씨 대에 이르기까지, 이를테면 1935년과 36년은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져 연극 활동은 중지되다시피 하였다. 특히 崔金童(최금동)씨는 후에 다시 언급되겠지만 시나리오 문예에 관심을 갖고 난 후 白萬基(백만기), 吳化龍(오화용), 孫商鉉(손상현)씨와 함께 開城(개성)의 知足庵(지족암)의 說話(설화)인 ‘十年工夫(십년공부) 南無阿彌陀佛(남무아미타불)’에 대한 이야기를 극화, <僧舞(승무)>라는 舞踊劇(무용극)을 공연하여 주목을 끌었다.
  그리고 趙東卓(조동탁)(芝勳(지훈))씨는 <한낮에 꿈꾸는 사람들>에 출연하였는데 李無影(이무영)씨 작품을 洪思容(홍사용)씨가 연출을 담당했고 白萬基(백만기) 孫商鉉(손상현)씨 등이 공연하였다. 이 작품은 대학생과 소설에 거의 미친 사람 2명 詩狂(시광) 2명, 映畵狂(영화광)(女子(여자)) 美術狂(미술광), 音樂狂(음악광)과 映畵狂(영화광)의 父(부) 및 걸인이 나오는데 출세욕에 모두 불타는 20대의 젊은이들을 北村(북촌)의 어느 藝術狂社(예술광사) 二層(이층)에 가두어 놓음으로써 이들의 생활상의 미묘함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의 공연은 中專講堂(중전강당)에서 이루어졌는데 관객 등의 반응이 하도 좋아 싸인 공세에 못 이겨 뒷문으로 빠져 도망치는 괴로움(?)을 당한 작품이었다.
  그 후 그들 惠專學生(혜전학생)들은 白牛(백우)의 작품, 이차돈의 죽음을 劇化(극화)한 <흰젖>(6막 17장)을 공연했는데 이 작품은 대단히 방대하고 짜임새도 있는 작품으로 東大(동대)연극의 제1기를 장식하듯 뻐근하고 값진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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