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 作家(작가) 新春(신춘) 短篇(단편) 小說(소설)

  戒律論(계율론) 강의를 듣는 둥 마는 둥하고 운연(雲然)은 누구보다 먼저 강의실을 빠져 나왔다. 당장 Q여대로 소영(素榮)을 찾으러 갈 맘에서였다.
  오늘 아침 우연히 종교학과(宗敎學科)과장인 방교수 방에 들렀다가 Q여대신문을 뒤적이던 운연은 거기 소영의 사진과 더불어 ‘안개의 손’이란 단편제목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그것은 분명 소영의 얼굴과 이름 그대로였다. 영영 못 만날 줄 알았던 소영을 당장 만나고 있는 것과 같은 착각과 충격이 왔다. 역시 소영은 이 하늘 아래 살아있었구나. 그것도 시시하게 산 게 아니라 악착같이 공부도 하며 더구나 글까지 쓰면서 살아 있었구나. 운연은 내심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소영이 이렇게 됐다니 믿어지지 않을 만큼 신기하고 한편 고맙기까지 했다.
  Q여대 개교 5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실시된 창작문학부문 현상 소설에 소영의 단편이 당선작으로 뽑혀 간지(間紙)의 한 면을 꽉 채우고 있는 사실이 모든 것을 웅변 이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운연은 신문을 붙들고 눈치 볼 것 없이 그 자리에서 통독하고 말았다. 까짓 여대생이 쓴 소설 하나에 그토록 정신없이 빠지다니 스님답지 못하다고 누가 비웃을지 모르나 운연에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다 읽고 나니 운연은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 그것은 헤어진 지 십년 가까운 소영의 저간의 사정을 쥐뿔도 모르고 살아온 자신의 비정(非情)에 대한 자책 때문이기도 했고, 자신은 미처 상상할 수도 없는 젊은이들의 생태와 아픔과, 그리고 그 그늘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소영의 글 솜씨에 대한 놀라움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아무튼 운연은 자신이 괜히 부끄럽고, 소영에게 뭔가로 꼭 뒤진 것만 같은 열패감(劣敗感) 같은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은 이상하게 열패감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새로운 기쁨과도 손잡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운연은 이제부터 아껴두었던 소영의 당선소감을 읽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내 窓(창)가에 서서 보면 都心(도심)은 뿌우연 氣流(기류)속에 묻혀 있다. 사실 그 氣流(기류)가 안개인지 구름인지 아니면, 흔히 말하는 오염된 大氣(대기)인지 나는 그런 건 잘 모른다.
  그러나 그 잿빛의 氣流(기류)속에서 都心(도심)은 아무래도 천천히 窒息(질식)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 氣流(기류)는 우리의 肉眼(육안)엔 보이지 않는 그러나 크고 억센 손을 뻗쳐 都心(도심)의 목덜미를 조금씩 조금씩 옥죄이고 있는 것만 같은 幻覺(환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는(비록 지금은 내가 都心(도심)과 조금 떨어진 江邊(강변)에 살고 있지만) 나도 그 大氣(대기)의 손에 목 졸려 죽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내가 小說(소설)을 써보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煤煙(매연)같은 안개가 싫기 때문이다. 小說(소설)을 쓰고 있는 시간 안이라도 나는 그 ‘안개의 손’을 뿌리치는 시늉이 될 것이라고 내 나름대로 믿고 있으니 말이다.

  소감은 거기서 몇 줄 더 나가다 끝나 있었다.
  아침 등교할 땐 겨울비가 찔끔거리더니 교문밖에 나오자 진눈개비로 변했다.
  운연은 우산도 없이 진눈개비를 맞으며 되도록 천천히 걸었다. 딴 때 같으면 걸음을 재촉하든가 어디 처마 밑에서라도 비를 긋고 가겠지만 오늘따라 아예 그럴 맘이 생기지를 않았다. 목덜미가 선뜻선뜻하게 내리는 진눈개비가 오히려 오래 잊고 살았던 소영의 얼굴을 문득 문득 되살려 주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까지 일러 주고 있었다. 대학가의 긴 골목을 꺼먹 고무신을 신은 채 철벅거리던 운연은 가까스로 버스정류장까지 찾아내려왔다. 거기서도 한참을 기다려 Q여대 앞을 가는 버스에 올라서도 운연의 머릿속은 소영의 생각으로 가득해 있었다.
  소영과 갑채(甲采(갑채)․雲然(운연)의 俗名(속명))는 동해 바닷가 어느 조그만 갯마을에서 자랐다. 청상과부인 소영의 어머니는 인근 마을에 이름이 파다한 무당이었고 갑채는 마을에선 제법 큰 통통배를 부리는 어부의 아들이었다.
  두 집은 토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가깝게 산 탓도 있었지만 소영의 어머니가 자청해서 갑채의 수양어머니가 되면서부터는 꼭 한 집안식구처럼 흉허물 없이 살았다.
  그 때 소영어머니는 갑채의 부모에게 만일 이 아이에게 수양에미를 점지해주지 않으면 커서 열다섯살을 넘기기 어려울 테니 두고 보라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갑채의 부모는 아무 군소리 없이 그녀 앞으로 아들을 팔았다.
  그러다보니 두 집에서는 그들을 꼭 오누이처럼 키웠다. 명절 때면 두 집에서 서로 옷을 해 입히고 색다른 음식이라도 해먹으면 서로 나누어 먹을 줄 알았다. 비록 나이는 갑채가 하나 위였지만 둘은 같은 초등학교의 동학년 동급반이었고 성적도 서로 1,2등을 다툴 만큼 좋았다. 초등학교를 나온 뒤 걸어서 20리가 버거운 읍내 중학교에도 공교롭게 두사람만이 입학을 했다. 그 둘은 참 의좋게 새벽이면 갯마을을 나갔고 해질녘이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갯마을로 돌아오곤 했다.

  <갑채 오빤 커서 뭐가 될래?>
  집으로 돌아오다 지치면 둘은 바닷가 편편한 바위에 앉아 쉬기도 했는데 가끔 소영이 그렇게 묻곤 했었다.
  <글쎄…난 중학교 선생질이나 했으면 좋겠지만 그게 그리 잘될까 몰라…>
  중학교에 다니는 자신이 대견하기만한 갑채는 그 중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너무 부러워서 그렇게 대꾸하기가 일쑤였다.
  <피, 제우 중학교 선생질, 대학 선생이라면 또 몰라두, 오빠는 욕심이 없어서 탈이구, 그래서 난 싫어!>
  눈이 유난히 반득거리던 소영은 곱잖게 갑채를 흘겨본다.
  <허허, 그럼 소영이 넌 뭐헐래?>
  갑채는 계면쩍게 되물었다.
  <음, 난 도지사 마누라나 국회의원 마누라, 안 그러면 장군 마누라, 호호>
  꿈꾸듯 눈은 지긋이 감았다 뜨면서 소영은 그런 자신이 재밌다는 듯 웃어버리곤 했다.
  소영이 그럴 때마다 갑채는 고기 먹고 체한 뒤처럼 괜히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제길헐, 난 중학교 선생노릇도 할까 말까 한데, 도지사 마누라가 되면 소영이가 얼마나 거드럭거리고 다닐까….
  <하긴 넌 얼굴이 예쁘니까…>
  갑채가 바위에 붙은 꿀막지를 하나 따서 바닷쪽으로 홱 내던지며 마지못해 한 말이었다.     <호호, 오빤 왜 인물이 나뻐서 그래? 오빠두 그럼 신성일이처럼 배우가 되든가 최희준이처럼 가수가 한번 돼보지 그래>
  소영의 눈이 또 반짝였다.
  <그럼 너 도지사 마누라나 국회의원 마누라 안할래?>
  <음, 오빠가 그렇게만 된다면 난 오빠 마누라 될래>
  <……….>
  갑채는 더 할 말이 없었다. 맥모로 대봐두 신성일이나 최희준이처럼 되는 건 중학교 선생 되기보다 열배도 더 어려울 것만 같아서였다. 갑채는 차라리 울고 싶었다. 그 울고 싶은 마음을 어쩌지 못해서 갑채는 먼 바다의 수평선만을 넘보고 앉아있었다.
  <호호, 그러니까 오빠도 방구석에 앉아 공부만 하지 말고 딴 애들처럼 운동을 하든지, 노래를 부르든지 안 그러면 웅변 같은 걸 배우든지 그래보란 말야.>
  등 뒤에서 소영이 더 약을 올려줬지만 갑채는 차라리 바닷물에 텀벙 빠져 죽었으면 죽었지 그런 맘에도 없는 짓은 하나도 못할 것만 같았다. 따라서 갑채에게 소영이는 늘 가깝고도 먼 아이였다. 더구나 그 뒤 갑채네 집에 예기치 않았던 먹구름이 몰려오면서부터 소영이는 감히 넘을 수도 없는 먼 나라의 아이만 같았다.
  그러니까 갑채가 열여섯살 때 일이었다. 중학교 졸업을 서너달 앞둔 초겨울에 고기잡이를 나간 그의 아버지가 조난을 당해 그만 고기밥이 되고 만 것이었다. 갑채의 어머니는 사흘낮 사흘밤을 아이고 땜을 놓고 울었다. 그러나 상을 치르고 두달이 채 못돼서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버린 채 어딘가로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마침 갑채가 고등학교 입시준비를 위해 읍내에 나가 하숙을 하고 공부하던 무렵이었다. 청상은 몰라도 30대 과부는 혼자 못산다는 옛말이 그대로 적중한 셈이었다. 그것도 빈손으로 나간 게 아니라 곡식이나 세간, 쓸만한 것은 감쪽같이 빼돌리고 나서 빈 집만 한 채 놔두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집에 돌아온 갑채는 우선 소영의 집 신세를 져야만 했다. 잠은 제집에서 잤지만 밥은 으레 소영의 집에서 얻어먹곤 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역시 여자의 마음이었다. 부모가 살아있을 때는 수양아들이라고 그렇게 잘 대하던 소영어머니가 막상 혈혈단신 고아가 되니 오뉴월 감주 변하듯 싹 달라져서 갑채를 노골적으로 꺼려하기 시작했다. 그런 어머니의 표변을 보고 누구보다도 분개한 것은 소영이었다. 세상에 자청해서 수양아들 삼을 때는 언제고, 혼자되니 땡감처럼 뱉을 때는 언제냐고 대들기도 했다.
  그러나 소영의 어머니는 막무가내였다.
  <흥, 이년아, 무당이 수양아들로 삼은 놈이 어디하나 둘이냐? 그리고 제 친에미도 떼놓고 도망을 친 판인데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 앨 평생 멕이고 가르쳐 주니? 네년도 이젠 눈밝아서 그 애 본숭만숭하고 나중에 딴 녀석에게 시집갈 궁리나 하거라>
  이런 말을 하는 소영어머니를 갑채가 더 가까이 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갑채는 그날로 소영의 집에 발을 끊고 읍내 친구네 집으로 나왔다. 세상에 믿을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어린 갑채는 뼈아프게 알았다. 고등학교 입시도 포기하고 가까스로 중학졸업장을 탄 갑채는 그 길로 내설악 깊숙이 있는 어느 절로 들어가 산승(山僧)이 되고만 것이다.
  Q여대 어구에서 버스를 내린 운연은 태연히 교문 안으로 들어섰다. 수위실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던 수위가 노트 크기만한 창을 열고,
  <어디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저어, 국문과 3학년 강의실로 사람을 하나 찾으러 가는데요.>
  운연은 가볍게 대꾸했다.
  <글쎄요, 대개 종강을 해놔서… 암튼 저 동쪽 큰 건물로 나가보시죠.>
  수위는 읽기 어려운 어떤 웃음을 문채 말했다. 운연은 누가 자신을 어떻게 봐도 좋았다. 아직 진눈깨비가 심술을 부리는 캠퍼스 길을 걸어 오르며 운연은 많은 여대생들과 마주쳐야 했다. 그들도 중이 대학배지를 찬 게 신기한지 호기심에 찬 눈으로 스쳐가며 키들거렸다.  10층이 넘을 듯싶은 큰 건물 현관에 들어서서 운연은 또 한 학생에게 물었다. 3층에 가보라고 했다. 운연은 승강기를 탈까하다가 그냥 걸어서 3층까지 올랐다. 복도에서  또 한 떼의 여대생들을 만났다. 다시 국문과 3학년의 강의실이 어딘가고 물었다. 빨간 스웨터를 입은 긴 머리의 학생이,
  <글쎄요 스님, 삼학년들은 오늘 수업이 오전뿐이 없었을 텐데요, 누굴 찾으시죠?>
  하고 물었다. 그때 운연은 퍼뜩 머릿속에 생각 키우는 게 하나 있었다. 교내신문의 현상소설에 당선된 소영이라면 아무래도 교내신문사와는 어떤 연락이 닿을 것 같다는 예감이 그것이었다.
  <아, 그럼, 교내신문사는 어딥니까?> 운연은 소영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게 잘됐다 싶었다.
  <네, 이 건물 현관 바로 옆에 지하실입구가 있는데 그리로 내려가셔서 맨 첫 번째 방인데요.>
  운연은 가볍게 합장을 하고 다시 층계를 내려왔다. 신문사에는 아닌 게 아니라 기자들인 듯싶은 여대생들이 책상을 차고 앉아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운연은 그중 한 학생에게 다가가 소영의 얘기를 하고 혹 주소나 전화번호를 알 수 없겠는가고 물었다.
  <아 이번에 소설 당선된 언니 말이죠? 가만 계세요, 내 어디에 전화번홀 적어뒀는데…> 
  그 학생은 서랍을 열고 뭘 뒤적이더니 이내 전화번호를 찾아내었다. 운연은 너무 고마워서 몇 번이나 합장을 했다. 운연은 아예 거기서 전화까지 빌려 다이알을 돌리기 시작했다. 
  4××-7×××번, 신호가 가자 전화는 짤막하고 이내 떨어졌다.
  <여보세요->
  분명 소영의 목소린가본데 너무 낯설다.
  <아, 윤소영양 댁입니까?>
  운연은 되도록 차분히 말했다.
  <네, 그런데요, 누구시죠?>
  <이거 너무 오랜만이라, 혹시 저… 동햇 바닷가 갯마을에 살던 갑채라는 사람 기억나십니까? 갑채말입니다 갑채…>
  <어머나! 갑채오빠, 아니 스님이 되셨다더니, 아니 지금 거기가 어디세요?>
  소영은 너무 반갑고 뜻밖인 모양이었다.
  <허허, 여기가 바로 Q대학 교내신문사입니다. 그동안 소식을 전연 몰랐다가 이번에 쓴 단편을 대학신문에서 우연히 읽고 하도 반가와서 내 이렇게 당장 학교로 찾아왔지 않았겠우. 나도 뒤늦게나마 D대학 종교학과에 적을 두고 있소만….>
  운연도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나? 그러세요, 이거 너무너무 반갑군요, 가만있자, 우리 오늘 당장 좀 만나요, 만나서 실컷 얘기 좀 하게요. 저어, 제가 무교동에 있는 한강호텔커피숍으로 나갈테니까요, 갑채오빠도 거기로 다섯시까지만 나와계세요. 아셨죠? 호옷…>
  소영은 진심으로 반가운 모양이었다.
  <뭐 아무렇게나 합시다…>
  운연은 약속을 하고 수화기를 놓았다. 한강호텔 커피숍은 한마디로 난장판 같았다. 웬 사람이 그렇게 많이 득실대는지, 남들 틈에 겨우 끼어않은 운연으로서는 삭발에 회색옷도 그렇고 괜히 민망하기까지 했다. 특히 여대생인지 뭔지는 몰라도 앳되고 반들반들한 얼굴을 가진 여자들이 새떼처럼 몰려다니는 데는 신기하기만 했다. 소영도 이런 곳을 택한 걸 보니 저런 여대생들과 개진 도진인 것 같고,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그녀를 만나고자 했던 기대나 기쁨도 반감당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섯시 좀 넘어서 나타난 소영은 첫눈에 봐도 예사 여대생이 아니라는 예감이 퍼뜩 들었다.
  까만 투피스에 연초록 블라우스를 받쳐 입었는데 얼굴이 그렇게 해사할 수 없었고, 특히 까풀진 눈매하며 오똑한 콧날이 어렸을 때와는 딴판인 미모를 풍기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제가 바루 그 갯마을에 살던 무당의 딸 윤소영이올씨다.>
  소영은 처음부터 서글서글하게 말했다.
  <…허허 이거 원.>
  운연은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자아, 악수, 우리의 해후를 축하하는 뜻으로…>
  그러면서 소영은 손톱에 연두색 물을 들인 손을 불쑥 내밀었다.
  운연은 어정쩡한 마음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보다 이내 놓고 말았다.
  <오빠 법명은 뭐죠?>
  <운연이라고, 구름운자, 그럴연자….>
  운연은 비로소 입가에 웃음을 띠우고 말했다.
  <운연스님, 아 운연?자, 거 이름 한번 좋네요. 그 뭐야, 갑챈지 잡챈지보다는 훨씬 윗질인 것 같아요.>
  소영은 거침없이 나왔다.
  <허, 오빠보고 잡채라니 그 무슨 해괴한 소리야?>
  <호호, 오빤 무슨 얼어 죽을 오빠유? 이젠 내 친구 갑채씨지, 허지만 내 운연 스님이라고 부를게.>
  헤어진 지 칠, 팔년의 세월이 이렇게 사람을 엉뚱하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운연은 내심 언짢기도 하고 기이하기도해서 소영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지금 몇학년에요?>
  커피를 들며 소영은 궁금한 게 많았다.
  <이학년,  그러니까 소영이보다 이젠 일년 후배가 됐군.>
  <어머나 그래요? 아이 신난다. 하긴 나도 이년인가 늦어서 대학에 들어갔으니까 스님은 꽤 늦었군요. 하지만 아무러면 어때요? 스님마다 대학에 다닐 수도 없을 텐데, 스님은 생각할수록 대단한 것 같아요. 내가 달려오면서 얼마나 장하게 느꼈는지 몰라요.>
  병주고 약주는 판인가, 아무튼 조금은 다소곳해진 소영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한참 꽃을 피우고 나서였다.
  <스님, 우리 어디 가서 한잔해요. 호호 스님이라고 괜히 빼면 재미없어요. 우리가 이렇게 거의 10년 만에 만났는데 어디 그냥 헤어질 수가 있어요? 내 아늑하고 멋진데 안내할 테니 같이 나가요.>
  소영은 갈수록 태산이었다.
  <허허 이사람, 중보고 술을 마시러가자면 어떡하나?>
  운연은 괜히 짐스럽기만 해서 우선은 사양을 해보았다. 그러나 소영은 그리 쉽게 운연을 놔줄 것 같지가 않았다. 놔주기는 고사하고 온몸으로 운연을 사로잡을 눈치가 역력했다. 운연은 내심 겁이 더럭 났다. 옛날의 소꿉친구가 보고 싶어 찾아 나왔다가 이상하게 말려들고 보니 심란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운연은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소영과 어울릴 작정을 했다. 아무리 머리 깎은 자신이긴 하지만 사내는 사낸데 사내체면에 나이 아래인 여대생에게 마지못해 끌려만 다닌다는 인상은 주고 싶지가 앉아서였다. 커피숍을 나온 두 사람은 무교동 골목을 천천히 걸어서 어느 싸롱으로 들어섰다. 45도 각도로 길게 나있는 계단을 밟고 오르니 밖은 아직 이른 시간인데 싸롱안은 밤처럼 등불이 은은했다.
  소영은 어리둥절해하는 운연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또 다른 출입구의 카텐을 걷는다. 거기 희미한 불빛아래 긴 복도가 보이고 그 양편엔 칸막이 한 방이 즐비하다. 소영은 그 복도의 거의 끝까지 앞장서서 걸어가더니 방 한 칸을 차지하고는 운연에게 빨리 들어오라고 손짓을 한다. 운연은 참 난감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이상 그냥 돌아설 수는 없지 않은가? 그는 마지못해 카텐을 쪼개고 들어섰다. 식탁 양편에 장의자가 하나씩 놓여있고 천장엔 권태롭게 등이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꼭 시골에서 쓰는 소쿠리를 거꾸로 매단 것 같은 등피 속에 촉수 얕은 전구가 빛을 흘리고 있는 꼴이었다. 물수건을 가지고 온 웨이터에게 척척 주문을 시킨 소영은 회심의 미소를 띄운 채 운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님, 미안해요, 어디 가서 따뜻하게 저녁식사라도 대접해야하는 건데. 하지만 난 마음에 없는 짓은 못하는 성미예요.>
  <원 별말을…>
  그러나 운연은 갈수록 아리송하기만 했다.
  <그래 제 소설 다 읽어보셨어요?>
  <아 참 좋습니다. 그나저나 언제도 소설공부를 그렇게 했오?>
  <공부는요, 괜히 답답해서 한두 편 써본걸요>
  <답답하다고 사람마다 소설이 써지나? 책도 많이 읽고 습작도 했겠지>
  <하긴 요즘 읽는 것은 소설책 밖에 없어요, 그러나 학교성적도 엉망이구.>
  술이 나왔다. 맥주 세병. 안주는 야채 샐러드 하나와 마른 안주, 마른 안주는 타원형의 접시에 네프킨 두어장을 받쳐 깔고, 그 위에 4열 종대로 호두알 한줄, 까맣게 볶은 메뚜기 한줄, 잣 한줄, 그리고 건포도 한줄이 얇게 깔린 것이었다.
  소영은 운연에게 술을 따랐다. 어쩌자는 것인가, 나는 중인데, 중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이래도 되는 것인가? 운연은 한편 거북하기도 하고, 한편 괘씸하기도 했지만 이젠 어쩌는 수가 없었다. 운연은 꾹 참고 마실 작정을 했다.
  <반가워요. 스님, 우리의 재회를 위해서 건배!>
  잔과 잔이 부딪혔다. 눈과 눈이 부딪혔다. 소영의 술 마시는 솜씨는 첫눈에 봐도 대단했다. 이 여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학교에 다니는 시간외에 도대체 무얼 하는 여자이기에 이렇게 태연스레 술을 마실까?
  <우리 어머니 생각하면 밉죠?>
  <허허 이제 새삼 무슨 얘기야?>
  <아녜요, 그 여잔 저주받아야 해요. 아 글쎄 오빠가 떠난 뒤 얼마 있다 기어이 새서방을 얻었지 뭐예요, 그것도 어디서 굴러온 젊디젊은 뱃놈에게 말에요. 그래서 난 고등학교 1학년 때 서울로 가출하고 만 거예요.>
  <아, 그래요? 우린 둘 다 부모 복이 없군.>
  <그래요, 서울에 와서 제가 얼마나 고생을 한지 아세요? 생각하면 지긋지긋해요. 학교급사, 엘리베이터 걸, 가정교사, 백화점 점원, 회사 경리사원, 아무튼 별별 것을 다하고 돌아 다녔어요.>
  <그래애? 그럼 지금은 무얼로 학비를 대나?>
  <호호, 그런 건 묻지 마세요. 이젠 돈 같은 건 걱정 안 해도 되니까요. 자, 마셔요!>
  마시자, 마실 때는 마시는 것 외엔 딴 생각은 말자, 까짓 중노릇 하건, 학생노릇하건 하나의 방편(方便)아닌가? 살아가는 방편 아닌가, 방편이야 아무려면 어떠냐? 엿장수면 어떻고 채소장사면 어떠냐, 중도 부처가 못된다면 말짱 꽝이요, 채소장사도 진실하게 벌어서 잘살면 땡초보다 낫지 않은가.
  운연은 연신 컵을 비웠다.
  <스님, 술 잘 하시네요.>
  소영은 의외라는 듯 건너다 봤다.
  두 사람이 살롱을 나온 것은 여덟시가 가까워서였다. 운연은 이제 그만 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미리 대중스님에게 허락을 받은 것도 아니고 하니 지금이라도 왕십리 염화사(抩華寺)로 가야할 계제였다. 그러나 소영은 운연을 놔줄 맘이 손톱만큼도 없는 것 같았다.
  <나 나쁜 여자죠, 스님? 하지만 오늘밤은 제가 좀 맘대로 모셔야 하겠어요, 절 따라와요.>
  소영은 벌써 운연의 팔을 낀 채 걷고 있었다. 이 여자는 도대체 나를 어떻게 하자는  속셈인가?
  <내, 다음에 또 전활하지, 오늘은 너무 늦어서 돌아가야겠어.>
  <천만의 말씀, 이 불쌍한 소영이를 버리고 달아나면 스님 성불은 고사하고 지옥에 가요!> 
  <지옥? 아귀 축생이 되어 소영에게 다시 나타날까?>
  <그러니 저랑 드라이브나 우선 합시다.>
  <시간 없대두…>
  <시간은 만들면 돼요>
  소영은 빈차를 세웠다. 소영은 일방적으로 운연을 차속에 우겨넣었다.
  <한강 △△아파트로 가요>
  <아니 이건 납치 아냐?>
  <납치든 체포든 걱정마세요.>
  차는 쾌속으로 달렸다. 찻속에서도 소영은 운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꿈꾸듯 눈을 감고 있었다.
  <274동 앞에 세우세요.>
  둘은 차에서 내려 승강기 앞에 서 있었다.
  <어디야, 여기가?>
  운연이 어색하게 물었다.
  <저 혼자 쓰는 아파트예요, 마음 푹 놓고 따라오세요.>
  두 개의 삼각형(△▽)중에 △을 누르고 나서 소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너에게 잡혀온 애완동물인가? 뭐가 그리 신명나서 이러는가? 승강기 문이 짝 벌어졌다. 운연은 어쩔 수없이 박스안에 들어섰다.
  13층, 문을 클로스 시킨 소영은 ⑬이란 숫자에 손가락 끝을 대었다. 1307호실, 소영의 거실과 침실은 너무 화사했다.
  <옷 벗어, 그리고 내게로 와!>
  아파트에 돌아와 양주까지 더 마신 소영은 백모로 뜯어봐도 여대생 같지 않더니, 드디어 목욕을 끝내고 큰 불을 소등까지 한 뒤엔 거의 광녀(狂女)로 변해 있었다.
  운연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하하, 내 정체가 수상하지. 난 바로 그거야 그거, 그게 뭔지 알아? 하하 내가 바로 일본놈의 현지처(現地妻)라 그말야. 요즘 제나라에 잠깐 다니러 갔지만 언제 또 날아올지 모르지>
  운연은 귀를 막고 싶었다. 달아날 수만 있으면 당장 달아나고도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잠옷 바람인 채 운연을 붙들고 놓아 주지를 않았다.
  <내가 왜 이 짓을 하는지 알아? 별별 짓을 다하며 먹고 살고 공부해보려고 해도 안되는 걸 어떻게 해. 도무지 구질구질하고 죽도록 지겨운 걸 어떻게 더 버텨. 그래서 천번만번 생각하다가 이 짓을 택했어. 까짓 이따위 몸둥이 헌신짝처럼 팽개치기로 했어, 더럽지? 불쾌하지? 더 참고 더 버티지 못한 내가 송충이처럼 징그럽지?>
  운연은 아무 할 말이 없었다. 깊고 어두운 수렁 속으로 한없이 빠져 들어가는 혼미를 느꼈다.
  <난 갑채를 좋아했어, 산으로 가버린 뒤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 보고 싶었다구. 정말야. 성난 사자처럼 덤벼봐. 뭘 꾸물거리고 있어? 바보, 바보>
  운연은 더 참을 수가 없었다. 까짓 이 황폐해진 여자의 살 속에 내 살을 비벼 넣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인가. 막된 여자, 겁 없는 여자, 먹다 남은 빵조각 같은 여자․찬밥, 날개 부러진 나비…. 그러나 불쌍한 나비가 아닌가. 누가 이 나비에게 침을 뱉을 수 있겠는가? 운연은 와락 슬픔을 느끼었다. 그 슬픔은 운연에게 새로운 용기를 주었다. 운연의 가슴이 활랑활랑 불탔다. 침대는 가깝게 있었다. 운연은 소영을 소중하게 침대에 뉘었다. 그리고 천천히 거추장스럽고 칙칙한 옷을 벗어버릴 다짐을 했다. 나신(裸身)과 나심(裸心), 두 개의 벌거벗은 몸은 하나가 될 판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운연은 이제껏 깊고 어두운 수렁 속에서 헤어날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것은 지독한 덫이었다. 도무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온몸이 천길 수렁 속에 빠진 듯 한치도 옴싹을 못하고 있었다. 운연은 환멸을 느꼈다. 식은땀만 등때기를 타고 흘러 내렸다. 운연은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었다. 소영이 운연의 가슴을 확 밀어 올렸다.
  <역시 그렇군. 스님은 역시 거룩해. 알았어. 그러나 가! 가란 말야. 위선자, 벌레만도 못한 여자 하나도 구제하지 못하는 스님이 무슨 스님야? 가라구. 난 나야. 난 혼자란 말야. 하긴 혼자라야 난 소설을 쓸 수 있어. 혼자니까 소설이나 써 봤는지도 모르지. 소설은 고독한 내 분신이야.>
  소영은 흐느껴 울고 있었다.
  <소영, 미안하구나. 좋은 소설이나 쓰거라.>
  그 말 한마디만 남기고 운연은 문을 밀었다. 난간 안쪽의 복도에 발을 내놓으니 기다렸다는 듯이 겨울바람이 확 대들어 운연의 얼굴을 할켰다.  그는 허둥허둥 승가기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표의 버튼을 눌렀다. 이내 상자의 문이 열렸다. 아무도 없었다.
  클로스․1층․그러나 그 때 운연은 깊고 어두운 새로운 수렁을 향해 천천히 추락하고 있는 어지러운 자신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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