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族文化(민족문화)의 源流(원류) 新羅硏究(신라연구)와 그 課題(과제) : 文學(문학) 分野(분야)

  내가 일찍 半生(반생)의 심혈을 傾注(경주)하여 우리 先民(선민)이 남긴 문학유산 중의 現存(현존) 最高作(최고작)인 新羅古歌謠(신라고가요)를 해독․주석하여 이를 公刊(공간)할 때 (‘조선古歌硏究(고가연구)’ 1942) 그 독해와 語學的(어학적) 證釋(증석)에 골몰하여 그 ‘문화적 鑑想(감상)․비평 내지 文化史的(문화사적) 고찰은 이를 闊略(활약)’했고 이어 麗代(여대)歌謠(가요)의 注解(주해)(‘麗謠箋注(여요전주)’ 1947)에서도 同樣(동양)의 이유에 의하여 ‘그 의도와 성과는 순수한 古語學的(고어학적)․考證學的(고증학적)태도를 벗어나지 않았고 ‘그 以上(이상)의 것, 다시 말하면, 재료의 음미나 평설 - 그 비관적인 견해주장’같은 것엔 대개 언급이 없었다. 그러나 사실 古歌謠(고가요) 연구에 있어서 前者(전자)는 오히려 後者(후자)를 위한 學的(학적)준비와 토대라 이를 것이므로 古歌(고가)의 문학적․사상적 연구가 더 근본적인 요청임은 말할 것도 없는데 이적서가 모두 그것에 미치지 못했음은 한스러운 일이었다.  爾來(이래) 또 여간한 雜事(잡사)에 휘몰려 겨우 麗謠(여요) 몇 편에 관한 戲評(희평)의에 아직도 그 소위 ‘第三卷(제삼권)’에의 염원을 이루지 못하고 있음을 부끄러워한다. 어서 누구의 손으로라도 羅(라)․麗(여)古歌(고가)의 문학적 해석․비평, 더구나 그 이데올로기적 연구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詞腦歌(사뇌가)’의 문학적 탁월성-그야 현존 羅歌(라가) 十四首(십사수)가 모두 개개 ‘걸작’이랴마는, 그중의 대부분은 확실히 ‘皿上(명상)의 김치’나 ‘遼東(요동)의 白豕(백시)’ 아닌, 문학적으로 극히 우수한 걸작임이 사실이다. 우선 현존 詞腦歌(사뇌가)의 제작된 年代(연대)로부터 보자. 最古(최고) ‘薯童謠(서동요)’가 서기 6백년 이전 최근 ‘處容歌(처용가)’가 同(동) 8백79년의 所成(소성)인 즉, 대략 6世紀(세기) 末(말)로부터 9世紀(세기)까지의 作(작)등. 당시 西歐(서구)엔 그리이스․로마를 제하곤 이에 比擬(비의)할 詩歌(시가)가 싹조차 없던 시대이니, 우리의 古歌(고가)는 年條(연조)로 보아 중국․인도․그리이스 쯤을 제외한 세계 詩歌史上(시가사상)의 넘버 4位(위)쯤을 차지할 만하다. 이러한 古詩歌(고시가)-그것도 문학적으로 극히 우수한 작품이 이 極東(극동)의 小邦(소방)에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만도 세계文化(문화)에 당당히 자랑할 만하나 아깝게도 지금은 우리만이 외치는 ‘독 안의 자랑’일뿐, 세계에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老舖(노포)’라도 상품이 훌륭해야-‘큰어머니 떡도 크고 맛좋아야 사먹는다’하리라. 그러면 우리 古詩歌(고시가)의 질적 수준은? 羅歌(라가) 14首(수) 전부가 개개의 특질로 보아 어느 것이나 뜻 깊은 秀作(수작)아님이 아니나 순연한 문학적 안목으로 보아 모르긴 몰라도 그 약 반수는 참으로 뛰어난 경이로운 작품들이다. 이를테면 연대순으로-저 融天師(융천사) ‘藝星歌(예성)(가)’의 교묘한 메타포어와 경쾌한 유우머, ‘風謠(풍요)’의 ‘江南多蓮葉曲(강남다연엽곡)’을 무색케 할 만한 그 소박․悠遠性(유원성), 佚名老人(일명노인) ‘獻歌花(헌화가)’의 그 修辭的(수사적) 기법과 語法(어법)을 통한 멋진 풍류, 明月師(명월사) ‘祭亡妹歌(제망매가)’의 漢(한)․晋(진) 古詩(고시)를 훨씬 능가하는 애절한 인생관과 그 깊디깊은 悲傷(비상), 忠談師(충담사) ‘讚耆婆郞歌(찬기파랑가)’의 저 劈空選出(벽공선출)의 고매한 託意(탁의)와 희랍창극의 三部樂(삼부락)을 연상케 하는 그 탁월한 구성, 그리고 저 ‘處容歌(처용가)’의 그 기상천외의 ‘이데(想(상))’와 독특한 노래법 등등-어느 것이 문학적으로 우수한 ‘걸작’아님이 있는가. 이제 그 한 본보기를 ‘讚耆婆郞歌(찬기파랑가)’ 한 首(수)만을 여기 잠깐 전시해보자. ‘讚耆婆郞歌(찬기파랑가)’는 저 羅代人(라대인)의 정치적 理想(이상)을 노래한 ‘安民歌(안민가)’와 함께 當代(당대)의 異僧(이승) 겸 名歌人(명가인) 忠談師(충담사)의 作(작)-.

  3월 3일에 王(왕)이 歸正門(귀정문) 누상에 납시와 좌우에게 이르되 ‘누가 도중에서 ‘榮服(영복)’僧(승) 한 분을 데려오료?’ 그때에 마침 한 大德(대덕)이 말쑥한 威儀(위의)로 힝뚱거리며 가는지라 좌우가 바라보고 引見(인견)하니, 王(왕)이 가로되 ‘나의 소위 ‘榮(영)’僧(승)이 아니로다. 물릴지어다.’ 다시 한 중이 누비옷을 입고 櫻筒(앵통)을 지고 남쪽으로 오거늘 , 왕이 반가이 보고 누상에 불러다가 그 筒(통)속을 들여다보니 茶具(다구)뿐이다. ‘네가 누구냐?’ 중이 가로되, ‘忠談(충담)이로소이다’ ‘어데 갔다 어느뇨?’ 가로되 ‘제가 해마다 3월 3일, 9월 9일에 차를 끓여 南山(남산) 三花嶺(삼화령) 彌勒世尊(미륵세존)께 드리옵는데, 지금 바로 드리고 돌아오나이다.’ 왕이 가로되 ‘과인도 한번 차를 얻어 마실 연분이 있을까?’ 중이 차를 다려 드리는데, 차의 풍미가 이상하고 병속의 향내가 코를 찌른다. 왕이 가로되,  朕(짐)이 일찍 들으니 師(사)가 지은 ‘耆婆郞(기파랑)을 기리(讚(찬))는 노래’ 가 그 뜻이 매우 고상하다 하니 과연인가?’ ‘그러하오이다.’ 왕이 가로되 ‘그러면 朕(짐)을 위하여 백성을 다스려 편안케 하는 노래를 지으라,’ 중이 당장에 勅命(칙명)을 받들어 노래하여 바치니, 왕이 갸륵히 여겨 王師(왕사)를 封(봉)했으나 중이 再拜(재배)하며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三國遺事(삼국유사) 卷二(권이)>

  이 名歌(명가)의 작자를 소개키 위하여 좀 긴 引文(인문)을 꺼리지 않았다. 詞腦歌(사뇌가) 40首(수) 중에서도 鄙見(비견)으로 최고의 걸작이라 생각되는 그의 作(작) ‘讚耆婆郞歌(찬기파랑가)’를 독자의 편의를 위하여 약간 현대어로 고쳐 그 全(전) 首(수)를 다음에 보인다. ‘耆婆(기파)’(‘기보’-‘長命男(장명남)’의 뜻)란 젊은 花郞長(화랑장)은 달리 傳(전)과 소견이 없으나 그의 화랑으로서의 인품과 인격․지조를 찬양한 노래가 얼마나 기상천외의 ‘아이디어’로 되었는가를 보라.   
  耆婆郞(기파랑)을 기리는 노래
  ‘열치매 나타난 달이  흰 구름을 좆아 떠가는 것 아니아?’ ‘새파란 내(川(천))에 ??의 모양이 있어라! 이로 냇가 조약(小石(소석))에 郞(랑)이 지니시던 ‘마음의 끝’을 좇과저.’
  아으, 잣(柏(백))가지가 높아 서리를 모르을 花(화)반(花郞長(화랑장))이여! 이 노래는 진작 그 ‘높은 뜻’-고매한 詩想(시상)으로 新羅(신라) 당시에 국내에 喧傳(훤전)되었던 名歌(명가), 그러기에 景德王(경덕왕)의 말에도 ‘朕嘗聞師讚耆婆郞歌(짐상문사찬기파랑가), 基意甚高(기의심고)’ 云云(운운)이라 한 것이다.
  우선 그 기상천외의 詩法(시법)! 작자는 ‘耆婆郞(기파랑)’이란 젊은 花郞長(화랑장)의 드높은 인격과 이상․지조를 기림에 있어서 한마디도 그것에 직접 언급함이 없이 돌연히 劈空撰出(벽공산출)의 ‘달’과의 問答體(문답체)를 빌어와 前八句(전팔구)에서 그것을 은연중 暗喩(암유)로 傍叙(방서)하고 (얼마나 的確(적확)한 ‘이미지’를 주는 효과적 수법인가!). 結二句(결이구)에서 ‘잣가지’를 빌어 그것을 正叙(정서)했다. 그러나 우선 그 ‘問答體(문답체)’의 ‘天衣無縫(천의무봉)’한 솜씨를 보라! 독자의 편의를 위하여 右解詩(우해시)에 내가 인용付(부)를 사족으로 덧붙여 제1-3句(구)가 ‘달에게 擬答(의답)’임을 보였으나, 原詩(원시)엔 무론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고, 오로지 독자의 문학적 상상력을 기다릴 뿐. (이런 경우에 平明(평명)만을 爲主(위주)하는 西詩(서시)라면 필시 ‘내가 달에게 묻되…’ ‘달이 대답하기를…’ 운운의 군소리를 붙여 詩興(시흥)을 平板化(평판화)할 것이다)
  ◇前八句(전팔구)의 詩意(시의)-
  ‘구름 장막을 홱 열어젖히매 등 두렷이 나타나는 달아, 너는 흰 구름을 좆아 西(서)쪽으로 떠감이 아니냐?’
  (달이 대답하되)  ‘나는 흰 구름을 좇아감이 아니로다,
  멀리 地上(지상)을 굽어보니, 새파란 開川(개천) 냇가에
  耆郞(기랑)의 모양이 있어라! 이제로부터 냇가 모래벌 위에
  郞(랑)의 가지고 있던 그 ‘마음의 끝’을 좇으려 하옵네.‘
  後二句(후이구)-‘亂(란)’(結亂(결란))에 가로되, ‘아아, 잣가지가 드놓아 서리를 모르을 花郞長(화랑장)이여!’
  우선 그 問(문)․答(답)․結亂(결란)로 된 三部體(삼부체). 이는 위에 잠깐 언급한 대로 저 希腦(희뇌)희곡의 ‘男(남)․女(여)․合(합)’ 唱(창)과 不期而同(불기이동)되는 희한한 기법이다. 또 이 詩(시) 벽두에 냅다 던지는 ‘열치매-’라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같은 異樣(이양)의 수법 그 위에 ‘구름장막을 홱 열어젖히매’라는 구구한 補註(보주)를 더했으나, 그런 부질없는 ‘客語(객어)’까지를 사족으로 덧붙임은 庸才(용재)의 수법. 저 鄭松江(정송강)의 네 長歌(장가) (‘關東別曲(관동별곡)’, ‘思美人曲(사미인곡)’, ‘續美人曲(속미인곡)’, ‘星山別曲(성산별곡)’)의 멋들어진 각 허두- ‘江湖(강호)에 病(병)이 기퍼’ ‘이몸 삼기실제’, ‘데 가 더 각시’, ‘엇던 디날 손이’ 등도 이에 비하면 당초 문제가 안되는 凡庸(범용)한 發聲法(발성법)이랄 수밖에.  그러나 이 노래의 妙處(묘처), 奇絕(기절)한 詩想(시상)은 무론 저 第(제) 8句(구)의 ‘마음의 끝을 좆과저’의 ‘마음의 끝’ (心際(심제))이란 한 句(구)에 있다. 달이 서쪽으로 같은 그저 뜻 없이 같이 아니다. ‘냇가 모래위에 耆郞(기랑)이 서서 지녔던 ‘마음의 끝’을 좇아감’이라고 달이 답하는 것이다. 이로써 천년 뒤에 나서 이 詩(시)를 읽는 독자 우리들은 눈을 감으면 문득, 천년전 어느 달밤 東方(동방) 新羅(신라) 서울 閼川(알천) 냇가 흰 모래 위에 홀로 우뚝, 혹은 고개를 약간 뒤로 젖힌 채, 멀리 아득히 西天(서천)을 바라보며 무한한 동경과 머나먼 理想(이상)을 그곳에 부쳐 보내며 외로이 섰던 젊은 花郞長(화랑장) 耆婆(기파)의 그 곱고도 고고한 자태, 그 드높은 포부와 교양과 인격이 눈앞에 역력히 나타날 만큼 그 ‘이미지’가 실로 놀랍게 선연하지 않은가! 하필 ‘西方(서방)’은? 想必(상필) ‘淨土(정토)’에의 동경․想念(상념)일시 분명하나, 구태어 佛說(불설)에만 의지할 것도 아니다. ‘현실’의 세계를 초월한 미지의, 不可見(불가견)의 영원한 궁극적 ‘彼岸(피안)의 세계’.
  ‘耆郞(기랑)의 ‘마음의 끝’을 쫓아 달은 서쪽으로 간다!’는 한갓 耆郞(기랑)의 고매한 ‘정신’의 표시일 뿐 아니라, 실로 민족의, 인류의 理想(이상)의 또는 詩(시)의 문학의 영원한 문제.
  結局(결국) ‘잣가지’ 운운은 또 얼마나 힘찬, 耆郞(기랑)의 드높은 지조를 나타낸 正叙法(정서법)인가! 나의 譯注(역주)에 덧붙였던 漢譯(한역)-
  栢枝點兮不知宷(백지점혜불지심), 若有人兮彼花郞(약유인혜피화랑) ‘讚耆婆郞歌(찬기파랑가)’ 한 篇(편)의 至妙(지묘)한 소식을 어찌 筆舌(필설)로 다하랴! ‘표현을 絶(절)’하단 말은 이런 作(작)을 두고 이름이겠다.
  詞腦歌(사뇌가) 十四首(십사수) - 그 중 절묘한 上記(상기) 六(육), 七(칠)篇(편)만도 모조리 그 문학적 우수성을 詳說(상설)할 겨를이 없기에, 이 한 首(수)만으로써 그 一班(일반)을 엿본 것이다.

  <編輯者註(편집자주)>
  이글은 故(고) 梁柱東(양주동)박사의 ‘增訂(증정)古歌硏究(고가연구)’중에서 발췌한 것으로, 新羅歌謠(신라가요)의 文學的(문학적) 우수성에 대하여 특히 ‘찬기파랑가’를 예로 들어 서술하고 있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