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族文化(민족문화)의 源流(원류) 新羅硏究(신라연구)와 그 課題(과제) : 美術(미술) 分野(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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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미술은 눈요기나 장식정도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미술의 일면에 지나지 않을 뿐이고, 그 본질은 어디까지나 인간생활의 본질적이고 필수적이라는데 있다. 이런 면은 古代(고대)이면 古代(고대)일수록 확연하였던 것이다. 다만 시대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 제각기 달랐기 때문에 우리는 미술을 가끔 다르게 생각할 뿐이다. 이런 다른 미술 구실을 그 양식에 따라 분류하고 비교․고찰하는 것을 미술사연구의 기본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신라시대의 이 같은 특징적인 미술의 문제이며, 이를 연구하고 있는 현황과 그 과제까지 여기서 간략하게나마 더듬어 보고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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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미술의 본질을 한마디로 잘라 말하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뒤따른다. 그러나 가장 오랜 기간 그리고 모든 면에서 제일 깊은 영향을 끼친 미술은 불교미술이었다. 따라서 신라의 미술이라면 곧 불교미술로 통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의 불교는 국가통치의 기본원리였고, 국민사상의 원천이었으며, 모든 생활의 기준이 되었던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즉 법흥왕 때부터 안으로는 제도가 정비되고, 밖으로는 김해의 본가야를 정복하는 등 일대 웅비의 계기를 마련하여 국위를 크게 드날리었으니 ‘建元(건원)’이라는 독자의 연호를 사용하면서 대등한 나라로 자부가 대단하였다. 그는 이러한 정복국가인 대국 신라를 다스리는데 하나의 통치원리가 절실히 필요했던 모양이다.
  여기에 등장한 것이 불교의 공인이었으며, 이차돈의 순교를 거쳐 불교는 점차 신라사회에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당시의 불교는 모든 백성을 압도하고 이끌기에 부족함이 없는 위엄과 종교적인 힘을 갖고 있는 그런 불교이었다. 당시의 불교미술은 이러한 불교를 눈으로 보여주는 산 증거였으며, 산 교재였던 것이다. 535년부터 시작한 흥륜사의 창건을 계기로 불교미술은 많이 제작되고 있다.  544년에 창건된 이 흥륜사는 광대한 규모의 대사원으로 그 장엄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모양이며, 본존불상은 그 위엄과 자비가 전 신라국민을 압도할 당당한 불상이었다.
  이것은 574년에 완성된 皇寺龍(황룡사) 金銅丈六像(금동장육상)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구리가 3만5천7근, 금이 1만1백98분이 든 이 거대한 불상은 울흥하던 신라의 패기와 당시 함경도까지 영토를 넓히었던 진흥왕의 위엄을 그대로 표현한 당당한 불상이었던 것이다. 경주 분황사에서 출토된 귀면와의 툭 불거진 눈망울 무서운 형상의 입동 힘찬 볼륨에서도 이런 점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이런 장엄한 미술의 절정은 황룡사목조 9층탑이었다.
  이 탑은 아홉 나라를 복속하여 대신라제국을 이룩하려던 당대 신라인들의 패기와 자신감을 표현하였던 것으로 그 높이가 상륜부를 제외하더라도 무려 50m가 넘는 일대 장관의 대탑이었다.
  이러한 장엄한 신라미술은 바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의 표현이었던 것이고 그것은 불교미술의 양식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이와 아울러 이러한 신라를 강력하게 지탱해주는 종파불교(宗派佛敎)도 신라사회에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다.
  즉 화엄종, 법상종, 신인종 등 여러 종파가 제각기 문호를 열어 번성을 자랑하고 있었다. 특히 이들 종파불교는 자기종파의 교리가 다른 여러 종파의 갖가지 교리보다 월등히 높은 것이기 때문에 자기네의 우수한 교리를 중심으로 다른 잡다한 종파의 교리를 흡수․통합하는 것을 지상의 목표로 삼고 있어서 이것을 통일전제왕권의 정책원리와 완전 일치한 것이다. 그래서 종파불교의 완성은 중국의 경우도 당나라 때 이루어졌던 것이며, 이러한 상황은 신라 역시 동일하여 통일신라의 수립과 더불어 종파불교가 강력히 등장한 것이다.
  이렇게 사회가 정비되고, 국력이 크게 신장함에 따라 신라문화는 최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화려한 국제적 대제국으로 번성한 당문화를 직수입하였고, 서역내지 인도문화는 물론 멀리 페르시아문화까지도 받아들이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제 국제적문화가 꽃핀 대왕국으로 성장하였으며, 수도 경주는 국제도시로서 번영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문화를 적절히 소화․수용한 신라는 신라 독자의 화려한 문화를 창조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문화의 황금기였던 것이다.
  이때의 화려한 미술은 본질적으로 종파불교의 미술이었다. 당대의 국민들은 그들 교리로써 감화시키고, 통일시키던 그 교재는 바로 이러한 불교미술이었던 것이다. 사천왕사나 감은사의 대불상, 거기의 석탑이나 목탑 또는 종들은 통일신라의 잡다한 국민들을 하나인 원리로 통합시키고 하나의 사상으로 감화시킬 수 있었던 위대한 시청각 교재였던 셈이다. 석굴암의 모든 불상, 경주 남산의 수많은 불상들은 이상적인 우아한 불보살로서 당대의 민심을 강열하게 이끌었으며, 봉덕사신종이나 황룡사 대종 같은 불교공예품은 그 신묘한 소리로써 당시 사람들의 신금을 울렸을 것이다. 이상적 우아한 형태, 긴장된 선 등 이상적 사실주의 작품의 이런 위대한 불교미술은 모두 당대 신라사회의 모든 국민계층의 절실한 소망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마음을 승화시켜주었던 산 교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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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이 신라의 미술은 시대에 따라 그 성격을 달리하며, 또한 양식적인 변화도 거기에 알맞게 변화하고 있었다. 그것은 당대의 신앙을 상징하던 불상이나 탑은 말할 필요도 없고 공예, 회화나 건축 등 모든 분야에서도 같은 길을 걸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신라미술의 연구는 따라서 적어도 이런 관점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은 당연하며, 만약 그렇지 못하면 도저히 신라미술의 진면목에 접근 할 수 없게 될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런데 현재 이러한 관점에서 모든 신라미술을 분석하고, 해석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지는 만족하게 대답할 수 없다. 미술사의 연구는 흔히 미술의 현상, 가령 탑이나 불상 또는 종이나 기와 등의 형식 분류에 그치는 경우가 많으며, 기껏 역사적 배경 정도의 피상적인 해석정도만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 고작일 경우가 많지 않나싶다.
  우리는 적어도 미술의 양식을 시대별로 철저하게 분석하여 그 특징을 비교 고찰하여야 할 것이며, 그러한 특징이 일정한 시대에 대두되었다면 그러한 양식이 어떻게 나타날 수 있었을까를 광범한 역사적 지식과 정확한 사상적 배경을 통하여 깊이 있고 예리하게 파헤쳐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눈에 보이는 미술의 양식이 시대가 달라지면서 어떤 까닭으로 다시 변해야 하며, 그 이유는 바로 멀리서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자체의 언어 문맥에서 밝혀낼 수 있음을 직시할 줄 알아야 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라미술의 본질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밝혀낼 수 있다면 적어도 찬란한 신라미술의 전통이 오늘날 다시 우리의 눈앞에 전개시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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