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族文化(민족문화)의 源流(원류) 新羅硏究(신라연구)와 그 課題(과제) : 鄕歌(향가) 硏究(연구)

  말은 사람이 지닌 것 가운데 가장 값어치가 높은 것이라고 모든 학자가 말한다. 사람이 목숨을 지니려면 ‘물’과 ‘갈’(빛갈의 갈․햇볕)이 가장 아쉽듯이 겨레의 목숨을 지니고 번지게 하려면 ‘말과 글’이 그리도 아쉽건만 사람들이 꼭 잘 알고 있다고 하기 어렵다. 사람들이 ‘몬누리’(물질세계)에 눈이 어두워 제 목숨에 무엇이 가장 아쉬운 것인지조차도 잊고 있는 듯하다. 가라겨레가 사람다움을 지니게 된 것부터가 가라말을 만들어 낸 때부터 온 가라겨레가 다른 겨레와 달리 따로 설수 있게 하는 것도 가라말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러나 하루살이가 등불에 눈이 어둡듯이 몬누리에 마음을 앗기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게 한다. 학계도 세속에 좆아 그런지 가라말의 갈닦음이 모든 깨침의 비롯이오, 마감이건만 가장 버림받은 것이 나라말씀이 아닌가 뉘우치게 한다.


  붇다의 가르치심에서 마음이 으뜸이라 하셨다. 그 마음도 말이 있기 때문에 그 있음이 밝아오건만 ‘몬’(물질) 때문에 마음을 내동댕이친 누리라 그런지 헌신짝같이 돌아다보지 않는 듯하다. 이제 깨달아 알아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말은 마음의 수레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저으기 근심하여 이런 말을 남긴다.


  무애 양주동의 ‘향가 연구’는 즈믄 가람 위에 비취는 외로운 달빛이었다. 또 가라말의 옛적말을 밝혀 놓는데도 아주 큰 구실을 하였다. 오구라 박사가 향가를 오늘날의 가라말로 풀어놓은 것을 다섯은 (백) 해나 거슬러 올려놓은 큰 공로가 무애에게 있다. 또 오구라박사가 잘못 본 것을 여러 군데 바로잡아 놓았다. 그러나 하늘이 내 무애의 시래(재로)도 ‘때’와 ‘곳’의 울타리는 벗어나지 못하였다.
  신라말을 다시 얽어 옛적노래의 얼굴을 밝히는 데까지는 채 이르지 못하였다. 그것은 무애의 잘못이 아니라 온 학계에 알타이 비교언어학이 채 이룩되지 아니하였는지라 어지 할 일이 없었다고 본다. 오구라박사가 겨우 오늘날 가라말로 뜻을 더듬어 찾아 놓았는데 그도 하는 수가 없었다. 가옷누리 가라말도 채 밝혀지지 아니한 채 있었으니까 알길 없었다. 가람에 물이 쉴 새 없듯이 말이란 흘러 바뀌는 것이야 알고 있었겠지만 가라말의 역사가 밝혀지지 아니한 때였고 ‘소리글자’를 바로 읽는 일도 ‘한자 어음 발달사’같은 오리무중이었으니까 어찌 제대로 볼 수가 있었으랴. 그러나 그는 이 두 글을 갈닦아 세나랏적 말을 엿보려고 애쓴 자취는 뚜렷하다. 그러나 ‘下(하)’가 ‘까’(ga)로 읽어야 할 것은 꿈밖이었다. ‘하’를 (ga)로 읽음에서 오는 풀이가 얼마나 달라질 것은 뻔한 일이다. 朕(짐)은 ‘뜻글자’이므로 새겨 읽어야 할 것을 소리글자로 읽어 ‘힐/홀’로 읽었으니 어찌 바로 읽을 수가 있었으랴. 신라말의 ‘마침임겿’(목적조사)은 깔=까+ㄹ인데 오구라박사는 ‘(홀)ㄴ(히)ㄷ(을)()ㄹ(를)/()ㅁ(ㄹ) 다섯 가지로 어수선하게 읽었다. 옛적 (깔)이 가옷누리에 와선 (알)로 읽다가 (알)이 다시 ()(을)로 되었다가 다시 오늘날에 (을)/(ㄹ)로 흐르고 흘러왔다. 이러한 가라말의 발달사가 채 밝혀지지 아니한 때라 오구라박사가 아무리 성품이 온후, 정중, 신중한 성품이라도 ‘시대의 제한’을 벗어날 길이 없었다. 또 쓴 웃음을 누를 수 없는 것은 支(지), 只(지)를 ‘디기’로 읽어야 함을 깨닫지 못하였고 이 발음이 주진시대의 발음임도 깨닫지 못하였다. 한 대에 와서는 벌써 그러한 발음이 사라졌고 딴 소리로 읽어야 하였다. 이렇게 읽어야 하는 것을 까마득히 깨닫지 못하였으니까 풀리지 않았고 풀리지 아니하니까 ‘뷘글자’(헛자)라고 하여 쓸데없는 글자라고 허술히 다루었다. 이러한 실수는 시대의 제한 때문에 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1929년에 ‘향가 및 이두 연구’가 나오자 국학계에 커다란 물결을 일으켜 한국사람으로 하여금 흥분의 도가니 속에 몰아넣었던 것도 사실이다. 무애가 이 도가니 속에 함께 빠졌었다. 그가 열두 해 동안 물을 건너고, 뫼를 넘고 하여 다다른 언덕이 바로 ‘조선 고가 연구’였다. 우리는 모두 무애 있음을 기뻐하였고 자랑삼게 된 것이다. 그가 높은 피라미드를 싼 것은 향가풀이를 가옷누리 말로까지 거슬러 풀어놓은 것이다. 무애의 쌓은 공든 탑은 다보답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길이 길이 기쁘게 하리라. 무애가 동대강당에서 향가를 강의하던 목소리는 삼천대천 세계 구석구석 사무치리라. 무애의 넋은 동대 어느 곳에 서려있을 것이 틀림없으리.


  해방앞엔 지헌영, 장지영, 정열모, 이탁과 같은 분들이 향가의 연구에 심혈을 기울인 일이 있다. 그러나 향가를 전면적으로 연구한 분은 지헌영씨를 손꼽을 수가 있는데 그도 어느덧 노경에 들어 병석에 누운 몸이 되었다. 장지영선생은 연세대학교에서 강의한바 있는데 강의초록 유인물을 남기시고 가신 뒤 별로 공포된 것이 없다.
  정열모씨는 한글 풀이를 공포는 하였으나 아무 설명이 없으니 어찌하여 그렇게 풀었는지 알 길이 없다. ‘비교 언어학’ 이전의 해석들이라 그 방법론에선 오구라박사의 그것보다 더 나아간 것이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이 붓은 1967년 정월초(통권 145호)에 향가의 새로운 풀이가 아쉽다고 말하고 이 붓이 다음 일곱 가지 새로운 점에서 향가를 모두 서로 풀어 모았다.
  첫째, 원전을 바로 잡을 것.
  둘째, ‘유형’과 ‘균형’갈라볼 것.
  셋째, 소리글자(음소자)는 중한어의 음운변천사의 연구로 새로 읽어야 할 것.
  넷째, ‘뜻글자’(석독자)는 알타이비교언어학적 방법을 되얽을 것.
  다섯째, 노래마다 그 노래가 생긴 사회적 또는 역사적 배경을 철저히 갈고 닦을 것.
  여섯째, 이른바 쓸데없는 뷘글자(허자)란 하나도 없다고 볼 것.
  일곱째, 향가를 낱말로 바로 떼어 읽을 것.
  이 붓이 위와 같은 주장 밑에서 풀어 놓은 지도 벌써 어느덧 열해가 되어간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전면적 비관을 받아보지 못한 것을 몹시 유감으로 생각한다. 근자에 대구 영남대학 교수로 유창균씨가 ‘新羅時代(신라시대)의 言語(언어)와 文學(문학)’(1974)이란 책 속에서 처음으로 의문을 일으키고 또 묻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정식으로 대답도 못한 채 해달은 흘러가고 있다. 그는 크게 세 가지 갈래로 문제를 삼았다.


  첫째, ①北所音(북소음)을 化所音(화소음)으로 고쳤는데 그 근거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②邪(사)와 耶(야)의 관계는 ‘통용자’로 모아야 하지 않느냐 ③耶(야)는 羅(라)의 후세형이라 하여 그 ‘증거’가 없다.
  둘째, ①신라의 음운체계가 어떠하였던가, ②한대음은 동국정운식 발음인데 납득이 가지 않는다.
  셋째, 뜻글자를 비교언어학적 방법에 의한 신라어 재구를 하여 본 것은 절대 아쉬운 작업(동시 32재쪽)이라 하여 크게 찬동하였다.
  여기에 장황히 설명할 수도 없고 그런 자리도 아니라 모두 대답은 뒤로 미룬다.


  해방 뒤 벌써 해달은 흘러 한넛(대)도 지났다. 그리하여 향가의 연구도 제법 무러익어가고 있다.
  ㄱ. 이숭녕교수의 1955년에 낸 ‘신라시대의 표기법 체계에 의한 시론’,
  ㄴ. 남광우교수의 1962 ‘향가연구’(중앙대문과 제 13호)
  ㄷ. 최학선 교수의 1959년 ‘향가해석신고’(백성욱박사 송수론문집)
  ㄹ. 박명채교수의 향가 표기의 원류적 고찰(국어국문학 제 32호 1966)
  ㅁ. 김준영교수의 ‘향가상해’(1964)
  ㅂ. 서재극 교수의 ‘경주방언의 부사형 a와 향찰 1良(량)’(1969)

  이밖에도 여러 학자들이 향가를 여러 면에서 보고 다룬 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 어찌 성사가 아니라. 장차 크게 발전이 있으리라고 기대하여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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