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族文化(민족문화)의 源流(원류) 新羅硏究(신라연구)와 그 課題(과제) : 歷史(역사) 分野(분야)

  4세기 후반 印度(인도)의 佛敎(불교)는 中國(중국)을 거쳐서 韓半島(한반도)에 전달되었고 그 후 신라 고려 두 왕조에 걸쳐서 國敎(국교)로서 隆盛(융성)하였다. 그리하여 大小(대소)의 寺院(사원)들이 ‘寺寺星張(사사성장) 塔塔雁行(탑탑안행)’이란 옛 記錄(기록)과 같이 山野(산야)에 이르는 곳마다 건립되었으며 이에 따라 古代(고대)의 美術(미술) 또한 크게 발달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반도의 三國統一(삼국통일)이 이루어진 7세기 후반부터 8世紀(세기)에 걸쳐서는 印度(인도) 또는 中國(중국)과 깊은 관련을 맺고 佛敎美術(불교미술)의 黃金時代(황금시대)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신라王國(왕국)의 수많은 僧侶(승려)와 유학생이 中國(중국)과 印度(인도)를 찾은 것도 바로 이 시대였다. 그런데 당시의 서울이었던 慶州(경주)에 건립된 수많은 寺院(사원) 중 오늘에 전래하는 것으로서는 먼저 佛國寺(불국사)와 石窟庵(석굴암)을 들 수가 있다. 그런데 이들 두 寺庵(사암)은 모두 8世紀(세기) 중엽인 景德王代(경덕왕대)에 당시의 宰相(재상)인 金大城(김대성)에 의하여 吐含山(토함산)의 西南(서남)과 그 山頂(산정) 가까운 東面(동면)에 동시에 건립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 같은 兩大(양대) 寺院(사원)의 건립에 얽힌 전설에 의하면 金大城(김대성)은 前世(전세)에서의 功德(공덕)에 보답으로서 現世(현세)에서는 新羅王國(신라왕국)의 宰相(재상)의 아들로서 재생하였다고 한다. 그는 실재의 역사적 人物(인물)(700~774)로서 신라의 金氏(김씨)王族(왕족)으로 태어났으며 景德王(경덕왕)의 治世(치세) 중에는 5年間(년간)(745~750) 宰相(재상)의 자리에 있었다. 그리하여 그가 이 관직을 떠난 翌年(익년)(751)부터 그는 王命(왕명)에 따라서 위와 같은 金氏(김씨)王家(왕가)의 祈福(기복)을 위한 兩大(양대) 寺院(사원)의 건립을 위하여 헌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가 死亡(사망)하던 774年(년)에 이르는 24年間(년간) 그는 이 土木工事(토목공사)를 감독하였는바 옛 기록에는 그가 死亡(사망)한 후 國家(국가)가 畢成(필성)하였다고 보이고 있다. 이 같은 기록에서 미루어 그는 당시의 政權(정권)을 잡았던 金氏(김씨)王族(왕족)의 한사람이며 동시에 국왕인 景德王(경덕왕)과도 매우 가까운 신분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그러므로 이 같은 신분에서 金大城(김대성)은 국왕의 命(명)을 받아들여 現世(현세)의 국왕과 그 一族(일족), 그리고 다시 이미 세상을 떠난 그들 金氏(김씨)王家(왕가)의 先代祖靈(선대조령)을 위하여 이 같은 兩寺院(양사원)을 세우는데 투신하였다고 추정된다. 석굴암은 바로 후자에 해당하는바 그의 ‘前世(전세) 父母(부모)’란 다음에 說明(설명)하려는 東海(동해)에 葬事(장사)지낸 그의 선조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上記(상기)와 같이 석굴암은 토함산의 東面(동면)에 위치하여 東海(동해)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곳에는 두 가지 역사적 배경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 하나는 토함산 그 자체가 신라왕국의 바로 東方(동방)에 있어 왕국과 그 서울을 방위하는 자연적 장벽을 이루어 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일찍부터 동해를 건너오는 外敵(외적)이 자주 이 山(산)을 넘어서 王都(왕도)를 攻略(공략)하고저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山(산)을 신라왕국의 ‘東岳(동악)’을 삼아서 국가는 祭祀(제사)를 받들었으며 혹은 그 山頂(산정)으로 天下無敵之力士(천하무적지력사)라고 信仰(신앙)되던 신라 제4대 脫解王(탈해왕)(57~79AD)의 遺骨(유골)을 옮겨서 사당을 짓고 그를 이곳의 山神(산신)을 삼기도 하였던 것이다.
  다음에 이 석굴이 동해를 바라보는 곳에는 또 다른 한 중대한 史實(사실)이 숨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 석굴과 ‘東海口(동해구)의 遺蹟(유적)’과의 깊은 관계이다. ‘東海口(동해구)’란 문자 그대로 ‘東海(동해)의 입’으로서 토함산의 溪水(계수)가 모여서 동해로 들어가는 지역을 신라인이 命名(명명)한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는 7世紀(세기)후반에 건립된 護國寺院(호국사원)인 感恩寺(감은사)와 이곳 海中(해중)의 ‘大石上(대석상)’에 葬事(장사) 지낸 신라 文武王陵(문무왕릉) 그리고 그를 예배하기 위하여 海岸(해안)에 쌓은 ‘利見臺(이견대)’ 등이 집중되어 있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7세기 중엽에 한반도를 통일한 文武王(문무왕)의 陵(능)인데 그는 火葬(화장)후 東海(동해)의 護國龍(호국용)이 되어서, ‘나라를 수호하고 佛法(불법)을 崇奉(숭봉)하기를 遺言(유언)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大王陵(대왕릉)이 마련된 후에도 이 석굴이 건설되기에 앞서서 다시 孝成王(효성왕)(734~741)이 ‘東海散骨(동해산골)’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 ‘東海口(동해구)’는 당시 국권을 잡았던 金氏(김씨)王族(왕족)의 공동묘지라고 추정할 수가 있다. 우리 석굴과 그 主尊佛(주존불)이 똑바로 東東南(동동남)의 이곳 東海口(동해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또한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신라의 석굴은 印度(인도)나 中國(중국)의 石窟(석굴)寺院(사원)과는 달라서 대소의 화강암으로서 석굴을 築成(축성)한 곳에 그 가장 큰 특색이 있다. 바꾸어 말하면 이같이 건립된 인공의 석굴이기에 처음부터 일정한 방향을 석굴 그 자체에게 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東海口(동해구)’에 葬事(장사) 지낸 신라 歷代(역대)의 임금과 귀족들은 모두 석굴을 건설한 金氏(김씨)王家(왕가)의 ‘前世(전세) 父母(부모)’라고 해석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석굴은 둥근 龕室(감실)을 主室(주실)로 삼았으며 그 앞에 예배를 위한 長方形(장방형)의 前室(전실)을 달았다. 그리하여 이 석굴은 그 창건 당초부터 主室(주실)은 대소의 石材(석재)로서 그 周壁(주벽)과 천정이 구성되었고, 前室(전실)은 木造瓦葺(목조와즙)의 屋蓋(옥개)를 지니도록 하였는데 이 같은 방식은 한국 石窟寺院(석굴사원)의 오랜 전통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같은 前方後面(전방후면)의 평면을 지니는 석굴을 印度(인도)의 가장 오랜 석굴이나 기타의 塔窟(탑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이 같은 兩室(양실)로서 설계된 이 석굴에는 오늘 모두 38軆(체)의 佛像(불상)이 전래하고 잇는데 前室(전실) 左右壁(좌우벽)의 八部神衆(팔부신중) 立像(입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主室(주실)인 石龕(석감)안에 배열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佛像(불상)은 中央大佛坐像(중앙대불좌상)과 천정 가까운 小龕佛坐像(소감불좌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花崗石(화강석)에 浮彫(부조)된 立像(입상)의 작품들이다.
  다음에 이들 석굴의 佛像配置(불상배치)를 간단하게 설명한다. 먼저 입구 좌우에는 仁王像(인왕상)이 각 一軀式(일구식) 巖座(암좌)위에 서있어 손을 들어 守門將(수문장)으로서의 엄격한 표정을 보이고 있다. 이어서 圓室(원실)에 이르는 左右壁(좌우벽)에는 各(각) 2軀(구)의 四夫王像(사부왕상)이 대립하고 있어 혹은 무기를 혹은 寶塔(보탑)을 들고 甲胃(갑위)를 입었는데 특히 各像(각상) 兩足(양족) 밑에 새겨진 惡鬼(악귀)의 표정이 매우 우수하다. 이곳에서 蓮花紋(연화문)으로 장식된 八角柱(팔각주)를 지나 窟內(굴내)로 들어서면 周壁(주벽)에는 4菩薩(보살)과 10羅漢(나한)이 각기 좌우에 배치되어 있으며 그 중앙에는 11面觀音(면관음)이 正面(정면)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周壁像(주벽상)의 上部(상부)에는 다시 작은 龕室(감실)안에 8軀(구)의 작은 菩薩坐像(보살좌상)(2軀(구)는 日本(일본)으로 搬出(반출))이 남북으로 안치되어 있다. 그리고 이 圓室(원실)의 중앙에는 거대한 圓形蓮花臺(원형연화대)위에 如來像(여래상)이 앉아있어 이 石窟(석굴)의 主佛(주불)을 이루고 있다.
  이 主佛(주불)은 높이 3.26m로서 먼저 그 크기에서도 주목되거니와 그 坐勢(좌세)의 단정함이나 相好(상호)의 온화함과 身部(신부)의 寫實性(사실성), 그리고 彫法(조법)의 우아함에서 일찍부터 東洋第一(동양제일)의 石像(석상)으로서 예배와 칭찬을 받아왔다. 특히 그 手印(수인)은 7,8世紀(세기)의 신라의 石佛坐像(석불좌상)에서 크게 유행하던 양식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천정과 後壁(후벽)에 둥근 蓮花紋石(연화문석)이 있어 이 本尊(본존)의 夫蓋(부개)와 頭光(두광)을 이루고 있는 것과 奇妙(기묘)한 착상이다. 그런데 이 主尊(주존)의 명칭이 最近年(최근년)의 연구에서 阿彌陀佛(아미타불)로 새롭게 고찰된 것은 또한 주목할 만하다.
  기왕에 있어서는 주로 外國學者(외국학자)에 의하여 釋迦如來(석가여래)라고 불러왔으나 이 石窟建立(석굴건립)에 관련된 문헌이나 당대 信仰(신앙)의 내용 그리고 石窟建立(석굴건립)의 여러 背景(배경)들에서 새롭게 해석된 것이다. 사실 石窟建立(석굴건립)에서는 근세에 이르기까지 이 主佛(주불)을 西方極樂淨土(서방극락정토)의 主佛(주불)인 阿彌陀佛(아미타불)로 신앙하여 왔기에 이 석굴을 가리켜 ‘彌陀窟(미타굴)’이라고 부르고 그같이 기록하였던 것이다.
  石室(석실) 周壁(주벽)의 中央(중앙)이며 本尊(본존) 바로 뒤에 觀音(관음)을 배치한 까닭도 主尊(주존)과의 관계에서 넉넉히 이해될 수가 있을 것이다.


  印度(인도)에서 비롯한 佛敎(불교)의 石窟美術(석굴미술)은 8세기 중엽 멀리 그 종착점인 韓國(한국)에 이르러 最優(최우)의 걸작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옛 기록이 잘 표현하였듯이 ‘織造石龕(직조석감)’하였으며 그 석굴 안에는 佛像(불상)과 菩薩坐像(보살좌상)(일본에 搬出(반출)된 것으로 추정)을 아울러 奉安(봉안)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석굴의 규모는 비록 작다하더라도 創建(창건)이래 1천2百年(백년)이 넘도록 가장 소중하게 수호되어온 것은 그사이 많은 佛徒(불도)의 두터운 신앙과 보호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금세기에 이르러 석굴의 천정 일부가 붕괴하였을 때 대규모의 修理(수리)가 있었다. 그후 다시 1960년대에 이르러 보존상의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UNESCO는 그 보호책을 위하여 각별한 배려를 한바 있었고 이어서 그후 1961년부터 3년간 이 石窟(석굴)의 수리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이 석굴에 대한 더욱 세심의 관리와 한층의  연구는 세계적 보물인 이 石窟(석굴)의 보호를 위하여 마땅하다.
(이글은 유네스코 ‘꾸리에’ 12月(월)號(호)에 번역 게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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