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하데비치

믿음이란 질문이지 해답(解答)이 아니다. 믿음이 맹신과 다른 까닭은 쉽게 답을 내주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어떤 것 혹은 누군가를 향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며 이정표 없는 길을 걸어 나간다. 상처가 벌어지고 피가 흘러도 고통 안에서 자신이 누구이고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발견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과정이다.

그렇게 절대자를 향해, 어쩌면 절대자에 비친 자신을 향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분명 괴롭고 불편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유유히 떠다니는 구름이 사실 잔잔한 호수에 비친 그림자에 불과한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그림자를 일그러트려 줄 물결이 필요하다. 평온(平穩)한 마음에 일어난 파문은 분명 괴롭지만 그런 후에야 비로소 ‘나’를 제대로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올해 전주영화제에서 브루노 뒤몽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최근 프랑스의 가장 논쟁적인 시네아스트 중 하나인 브루노 뒤몽은 신작 ‘하데비치’를 통해 또 한 번 인간의 실존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그의 영화는 관객이 의자에 편안히 몸을 기대지 못하도록 많은 논란과 해석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브레송으로부터 이어져 온 이른바 ‘시네마틱’한 것의 핵심이다.

자발적으로 수도원에 머물고 있는 하데비치는 신의 사랑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고뇌하는 소녀다. 하지만 수도원의 규율을 마다한 채 고행을 통한 수행에 매달리는 그녀는 결국 수도원에서 내쳐져 세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바깥세상에서 만난 이슬람 소년 야신, 그의 형인 독실한 무슬림 니시르를 통해 그녀는 신과 믿음에 대한 또 다른 풍경을 접한다. 허나 해답이라 믿으며 자신과 믿음을 교감하던 어떤 무슬림은 끝내 폭탄테러로 사망하고, 답을 쉽게 내어 주지 않는 잔인함으로 가득 찬 부조리한 세계는 그녀를, 혹은 그녀를 관찰해야만 하는 우리에게까지 절망과 무력감을 안겨준다.

그럼에도 끝내 희망적인 움직임은 화면을 떠날 수 없다. 브루노 뒤몽은 인간의 조건 자체로 존재하는 악을 통해 거꾸로 인간의 실존을 드러내는 문제적 감독이다. 자살하려는 하데비치가 수도원에서 일하는 전과자의 손에 구해진 엔딩이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인 까닭이다.

종교와 믿음에 관한 한 소녀의 방황을 통해 전작보다 더욱 첨예해진 질문을 영화적으로 폭발시키는 ‘하데비치’는 쉽게 답을 내어주는 영화는 아니지만, 관찰하고 질문하는 이미지 속에서 우리는 진정 영화 이미지의 힘을 믿을 수 있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즐기기 위해 관람석에 몸을 맡긴 채 영화를 따라갈 수도 있다. 그것도 좋다. 하지만 영화는 그 이상의 것을 보여줄 수 있다. 쉽게 이해되지 않고, 어쩌면 굳이 극장까지 찾아가서 마주치고 싶지는 않은 진실 혹은 물음들. 우리는 이런 불편함과 대면하기 위해 시간을 쪼개고 굳이 그 먼 길을 달려 영화제까지 찾아간다. 어쩌면 그것은 일생 단 한 번뿐인 소중한 만남이다. 영화의 축제에서 모든 영화들은 ‘일기일회(一期一會)’의 믿음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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