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文學(문학)과 젊은 文學(문학)

  최근 동국문단에 선보인 다섯편의 소설을 읽고 나서 우선 떠올리게 된 생각의 대강을, 필자는 ‘늙은 문학과 젊은 문학’이라는 말로 집약하고 싶다.
  물론 문학에 대해 붙이는 이러한 명제가 낯설고 부자연스러워 보이리란 사실을 필자가 간과하는 건 아니다. 가령 늙은 문학과 젊은 문학이라는 명제의 개념규정에 혼란이 야기된 경우를 필자는 상상할 수 있다. 때문에 그러한 말이 적어도 필자에게서 어떻게 이해되어지고 어떠한 뜻으로 받아들여지기를 기대하고 사용되는가를 간략하게나마 밝혀둘 필요를 인정한다.
  대립되는 이 두 명제는 하나의 비유이다. 늙은 문학이란 성숙된 문학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래전부터 잊어온 문학, 삶과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경직되고 그 감각이 둔화된 문학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상투화되고 관념화된 굵은 문학인 것이다. 이에 반해 상상력의 지평 너머로 끊임없이 발돋움하려는 문학, 비록 안정을 얻지는 못했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힘찬 약동을 지닌 문학, 그리고 다소 거칠기는 하지만 치열하고 싱싱한 문학은 젊은 문학이다. 따라서 젊은 문학은 필연적으로 사물과 언어에 대해서 회의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는 문학이며 끊임없이 자신과 세계에 대해 도전하는 문학이고 근본적으로 삶과 세계를 탐구하는 문학인 것이다.
  대학생은 우선 육체적으로 젊은이들이다. 따라서 필자가 육체적으로 젊은 동국문단에서 젊은 문학을 기대하고서 다섯편의 소설을 피했던 건 당연하고도 자연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 같은 필자의 기대는 충족되지 못했다. 물론 다섯편의 소설은 각기 많은 장점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에 못지않는 단점, 즉 늙음의 흔적들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고 필자에게는 판단되어 졌던 것이다.
  金澤根(김택근)의 <덜 익은 한가위>는 봉제공장의 직공 김점순양이 추석 귀성인파에 압사당하는 이야기를 작자, 주인공 자신, 그리고 의인화된 바람 이렇게 삼인의 시점을 통해 기술하고 있다. 이 소설의 결정적인 흠은 작가가 무얼 말하려 했는지가 분명치 않다는 사실이다.
  소설이 반드시 어떤 심장한 의미의 전달을 위해 기도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할 필요는 없지만, 기왕에 무언가 말하려고 했다면 그 의도에는 분명한 초점이 있어야 마땅한 것이다. 물론 <덜 익은 한가위>가 전달하고 있는 의미의 핵심(주제)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다.
  아마도 독자는 이 소설에서, 작가가 사람이 사람에 의해 짓밟혀 죽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목도하고 몹시 충격을 받았으리란 사실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주인공이 그런 터무니없는 사건의 희생자가 되게 된 동기에 전혀 필연성이 결해 있다는데 있다. 주인공은 가족과 고향을 버리고 서울에 와서 봉제공장의 직공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불가피하고 절박한 삶의 어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요약하자면 김점순양의 죽음은 김점순양 개인의 죽음일 뿐이다. 문학은 언제나 특수한 운명을 그리고 싶어하지만 그러나 그 특수성은 다시 보편성으로 내려오지 않으면 안되는 특수성인 것이다. 또는 작자가 혼잡한 귀성인파에 사람이 짓밟혀 죽기까지 하는 우리 현실의 어떤 사건에서 우리 교통행정의 실책에 주목함으로써 우리의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기를 의도했대도 그건 작가의 안이한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삶의 문제를 이런 식의 피상적이고 도식화 된 안목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기대한다면 필자는 그러한 사고체계 속에 숨겨진 안이성과 상투성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徐容範(서용범)의 ‘사랑의 技巧(기교)’ 역시 그 안이성이 지적될 수 있는 작품이다. 불과 육십여매 남짓한 단편에서 작자는 여섯이나 되는 인물을 등장시키고 있다.
  상락, 희수, 혁진, 미영, 서연, 미옥이 그들의 이름이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정작 이들 인물 중 어느 하나도 성격을 부여받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특히 단편에서는, 책임질 수 없는 인물을 끌어들여서는 안된다. 그것은 현명하지 못한 처사일뿐더러 무책임한 일이기도 하다. ‘사랑의 技巧(기교)’에서 시도하고 있는 일은 ‘관계’의 탐구이다. 탐구의 문제는 소설문학의 매우 의의있는 기능이고, 특히 ‘관계’에 대한 탐구는 매달려 봄직한 주제이다. 그러나 상투적인 언어감각과 안이한 작가정신으로 탐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랑의 技巧(기교)’의 작자는 이점을 충실히 반성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李政(이정)의 ‘그 겨울’과 ‘殘影(잔영)’에는 싱싱한 감수성과 진지한 사고의 흔적이 담겨져 있다. 소설에 질서감을 부여하는 일, 즉 구성의 능력도 이만하면 괜찮은 편이다. 말하자면 이 두 편의 소설엔 그런대로 젊음의 의욕이 나타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큰 장점이다. 물론 반성할 점도 없지 않다. 무엇보다도 신텍스의 불안정성이 눈에 띠인다. 가령 ‘하늘은 암울한 구름이 분간할 수 없게 떨쳐있다’ 같은 문장을 보라.
  이러한 불완전한 구분, 부적확하게 사용되고 있는 어휘들이 몇 군데 보인다. 관념어와 추상어의 남용도 거슬린다. 언어를 반성 없이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데서 비롯되는 실수이다. 그리고 다소 지루하다. 너무 많은 것을 보려하고, 지나치게 세밀한 데까지 관심을 갖다 보니 초래된 결과이다. 많은 것을 보는 일과 예리하게 보는 일은 다른 문제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高光旭(고광욱)의 <흐르는 山河(산하)>는 지적할만한 결점을 거의 갖지 않은 작품이다. 잘 썼다. 문장이 아름답고 섬세하고 무엇보다도 정확하다. 당연히 언어감각도 뛰어나다. 이것은 이만저만한 미덕이 아니다. 이만한 언어감각과 문장으로라면 무엇을 다루어도 일단 읽히게는 만들리라. 크게 나무랄 데가 없는 작품이다.
  그러나 바로 그 크게 나무랄 데가 없다는 점이, 다소 모호한 얘기긴 하지만, 바로 결점이다. 무엇보다도 작품의 분위기와 인물의 성격이 너무 자연스럽고 유현하기조차 하다. 결국 필자는 <흐르는 山河(산하))가 그 능숙한 문장과 예민한 언어감각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젊은 문학에 속하지는 않는다는 필자의 <독단>을 말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高光旭(고광욱)은 눈치 챘을 것이다.

  ◇편집자註(주)
  지난號(호) 張文平(장문평)동문의 詩(시) 총평에 이어 이번 號(호)에는 韓容煥(한용환)동문의 小說(소설)총평을 싣는다.
  小說(소설)의 경우 금년 중 本紙(본지)에 게재된 것이 없어, 작년에 게재된 작품 3편과 교지 東國(동국) 14집에 실린 작품으로 代身(대신) 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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