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로오드 원피스

<입선소감>
그림 그리다 저질러본 음흉한 外道(외도)

  그림 그리다 싫증이 나서 저질러 본 음흉한 外道(외도), 그 일이 오늘 잔잔한 기쁨을 안겨왔다. 그렇다고 앞으로도 이 外道(외도)를 즐길 것인가? 그렇다 그 일이 앞으로도 나의 본분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비행기를 처음 탄 시골 아저씨가 스튜어디스의 방송이 나올 때마다 공연히 안전벨트를 끌렀다 채었다 하던 것처럼 나도 처음 타보는 ‘글 비행기’속의 촌아이, 그래서 지금은 공연스레 쑥스럽다.
  이제 자꾸 써 나간다면 그 아저씨가 신사가 될 때쯤엔 나도 멋진 글 숙녀가 될 수 있겠지.
  심사에 수고하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1949年(년) 경남生(생)
▲69年(년) 부산진여상고 졸


  어느 모로 두고 보나 그녀의 몸매는 눈에 걸리지 않는 데가 없었다. 깡마른 체구- 그렇다고 코스모스처럼 가냘픈 것과는 영 다른 - 마치 앙상한 고목의 껍질 벗겨진 잔가지를 연상시키는 그 사지(四肢), 그러면서도 투박하게 딱 벌어진 어깨며, 그 어깨위로 심하게 생략된 목과 함께 바로 시작된 얼굴이며, 좁은 이마에 흉터처럼 뻗지른 두 줄기 주름살, 가늘고 짧다란 눈 밑으로 볼록볼록 솟은 광대뼈, 때문에 동그럼한 뺨 대신 급경사로 뻗어내린 근육은 상악골(上顎骨)에 와서 한숨 놓는 듯 봉분(封墳)을 이루어 입 언저리는 원시인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대개 얼굴을 중심하여 이렇게 생겨버린 여자 대학생 김상희(金常熙)였다.
  나이 서른에 대학 4년을 마무리 짓는 4학년 11월을 맞이할 때까지 이렇다 할 러브스토리 한편 엮어내지 못한 채로, 태연하게 지나온 과거도 다 그녀의 미감(美感)과는 너무 먼 그 모습 덕분이었으리라. 그래서 그녀는 어쩌다가 양장점에서 옷을 맞출 때면 열 번도 더 당부하는 말이 ‘나는 어깨가 두텁고 넓어 양장만 하면 남자처럼 보이니 어깨를 좀 잘 빼주셔야 됩니다’ 하는 것이었지만 어깨가 잘 빠진 여자답게 보이는 양복을 입게 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학교생활만은 만학생(晩學生)같지 않게 마냥 즐겁고도 성실스러웠다. 그녀의 즐거움이란 남과 어울려 어떤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보고 듣고 행하는 모든 일이 다 즐겁기만 한 거였다. 세간칭(世間稱), 삼류대학 삼류학과생이었지만 그녀에겐 일류대학 일류학과가 부럽지 않을 만큼 즐겁고 재미있는 학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로서는 꿈에나 그려 볼 뿐이었던 대학생활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집안은 끼니 걱정도 벗어나지 못하게 가난했고, 10여년 중풍에 누운 아버지와 아버지 만큼 편찮으신 엄마, 또 끝없이 병고(病苦)에 울고 있는 여동생, 이렇게 생명의 중환자들만이 그녀의 고향 단칸방을 닳히고 있었기 때문에 우여곡절을 넘기면서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그녀의 손에 의해 가사(家事)는 이어져 왔고, 7여년 동안 화장품 외판원, 일수 계주, 월부가구 판매, 고추 메주 장수 등 겹치기 벌이로 뛰어 다니면서 가정을 도우고 아껴 저축한 돈이 백만여원, 그 돈으로 그녀는 대학에의 꿈을 실현하고자 빈약한 실력으로도 들 수 있음직한 학교 학과를 선택하고 응시하고 합격하여 입학했다.
  그것은 오래전에 그녀의 마음으로부터 무시해 내버렸던 자신의 생(生)을 되찾는 작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학원의 모든 일이 늘 감격스럽기만 했던 것이다.
  버스길 시간반쯤 되는 변두리에 마름모꼴의 긴 대각선으로 누어야 발을 펼 수 있는 작은 셋방에서 근심스럽게 서울의 생활을 노크했던 그녀는 소처럼 참고 파도처럼 미는 꾸준한 성격으로 모든 고비를 참아내어 넘기면서 교정을 오르내리는 발길은 결코 무겁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듯 입학 후 천지(天地)를 모르게 홍안심(紅顔心)으로만 지났던 그녀의 심경(心境)에도 해가 가고 달이 스무번도 더 지난 3학년 가을에 이르러 어떤 일이 한번 있었다. 그 일은 가을에 핀 진달래처럼 어색하고 애련한 일이었다. 막연하나마 그리워지는 얼굴은 그녀에게는 당치도 않을 만큼 훤칠한 미남에다 넉넉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장학생이었다.
  그 남학생을 의식하면서 그녀의 외모에도 변화가 생겼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남자처럼 우락부락스레 생긴 그녀의 몸매를 미화시키는 작업을 단행키 위해 낡은 바지와 T샤스를 벗고 치마와 블라우스를 입었다. 그렇게 치마와 블라우스를 바꾸어 입었다 해서 조금도 여자다워 보이는 미(美)는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을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치마를 입게 되면서부터 스타킹 값 때문에 혹은 옷값을 마련키 위해 주부식비를 잘라 배 굶기를 잘했고, 청계천의 고서가(古書街)에도 발을 끊어야 했다.
  때마침 그녀의 친구가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면서 그녀에게 나누어준 옷가지와 구두는 그녀를 도우려고 하늘마저 애쓰시는 것으로 오해되었다. (하늘도 도와주는 일이라면) 그녀는 가슴이 벅찼다. 그 남학생도 어느덧 나를 좋아하게 되겠구나 하고....
  이 무모한 그녀의 희망이 은행잎과 함께 화려한 빛으로 익어갈 무렵 어느 날, 그 희망은 무지개처럼 스러지고 말았다.
  어느 날 수업 시작 10분이 지나도록 교수님이 안 오시자 그녀 앞에 앉았던 꼬마 경숙이가 그녀를 향해 앉더니 ‘상희언닌 결혼 안해? 혜숙이는 어제 약혼 했어’라고 말을 붙였다. ‘혜숙이가 벌써? 졸업도 안하고?’ ‘아냐, 남자가 딴 여자한테 갈까봐 미리 약혼만 해 두나봐’ ‘그래? 뭐 하는 사람인데?’ ‘우리학교 학생이야. 그 왜 ○○과에 5․16장학금 받는 사람 있잖아, 언니도 알텐데…신명철이라고’ 그녀의 귀가 갑자기 커진 것을 경숙이는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다.
(신명철, 신명철…동명이인은 아닐테고…지금이 꿈이 아니라면…) 아, 어쩌면 그녀가 하늘의 도움을 받으면서까지 가꾸고 있는 그 은밀한 비밀을 눈치 채어 버렸을까?
  혜숙이 아버지가 바로 그 학과 교수인데, 아마 다 인연 있는 사람들이었나 보다.
  그녀는 박살난 가슴을 금방 치료하여 완쾌시켰다. 어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인가?
  그날 밤에 돌아온 그녀는 발에 맞지 않아 발가락이 아프던 친구의 구두를 벗어 상자 속에 담고 그 속에 두었던 운동화를 꺼냈다. 블라우스와 치마도 세탁대야에 담그고 대신 바지와 남방 저고리를 꺼내어 손질했다. 그리고는 끼니로 때우던 삶은 감자를 그대로 두고 밖에 나가서 500원 짜리 백반으로 성찬을 했다.
  세월이 흘렀다.
  4학년 11월이 왔던 것이다. 냉방의 찬기에 떨리는 몸만큼이나 그녀의 마음도 떨렸다.
  작품 전시회도 끝났다. 졸업 논문도 끝났다. 이제 정말 졸업이었다.
  4년 동안 책과 이불 보따리를 들고 철마다, 때로는 달마다 옮기며 떠돌던 서울의 추녀밑 골목길들.
  이렇듯 감회어린 기분으로 11월을 맞이한 그녀에게 ‘상희씨 미팅 안하겠어요?’ 그녀와 나이가 비슷했던 P군이 느닷없는 미팅주선이었다. ‘상희씬 미팅 한번도 안했잖아, 졸업후에 후회하지 말고 이번에 나가봐, 상대편 남자들도 상희씨 만큼 나이가 들었으니까 충분히 이야기 할 수 있을꺼야’ ‘충분이가 아니라 만분이라도 나는 그만 두겠어요’ 그녀는 거절하기 바빴다. ‘왜 그래요. 그러고 있다간 시집도 못 간다구요, 요즘은 자기가 찾아 다녀야지 그냥 졸업한다고 뭐 별 수나 있나요?’ ‘별수나 달수나 P씨 걱정일게 뭐유’ ‘그래도 3년 반이나 고락을 같이해온 우리가 무심할 수 있어?’
  이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목덜미가 석연찮아 진다. (무심 할 수 있어?) (그래 무심 할 수 없지. 나는 무심을 가장 싫어한다. 아! 서울인들의 그 무심함. 한기(寒氣)서린 무무심심(無無心心)을.)
  그녀는 약속했다.
  미팅날짜는 꼭 일주일 후, 토요일 오후 2시였다.
  이리하여 그녀는 또 한번 여자로 변장(?)하기에 전력을 다했다.
  그녀는 그날 밤에 돌아오자마자 입을만한 옷가지를 몽땅 꺼내어 입어보기 시작했다. 아하! 그러나 애달게도 그녀의 짧은 목과 두껍고 벌어진 어깨나마 카버 할 만한 말쑥한 옷 한 벌 없었다. 매양 그렇고 그렇게 입으면 입는 대로 유독 어깨가 더 넓어 보이고 목은 더욱 없어져 버리니 어찌하랴. (거절해 버릴걸 공연히 허락했제) 뉘우침 해 가며 또 한 차례 입어보았으나 아무리 보아도 야근하고 나오는 새벽 거리의 공원 아줌마처럼 초라한 모습을 벗어 날 수는 없었다. (에이, 못났으면 못난대로 만나는 거지 못 보일 염려는 미리 알게 뭐람)
  이렇게 마음을 되잡던 그녀의 눈에 번쩍 띄는 물건이 있었다. 옷가방 맨 밑에 깔려있는 빨간 빌로오드 천이었다. 그것은 별로 비싸지 않은 흔한 무늬 빌로오드였지마는 그녀에겐 얼마나 훌륭한 고급 옷감이었으랴, 바로 작년 겨울 그녀의 어머니가 집안 결혼식에 갔다가 받은 예단물이었는데, 색이 붉다하여 옷을 안해 입고 둔 것을 그녀가 무엇이든 응용해 보려고 갖다 두었던 거였다. (그렇다 이것으로 드레스를 해 입자!) 그녀의 가슴은 기쁨으로 종일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그해 정은이가 이와 같은 빨간 빌로오드 원피스를 해 입었을 때, 얼마나 이뻐 보였던가. 그녀는 자신의 주름진 나이도 못생긴 몸매도 잊고 희망에 부풀어 설레었다.
  곧 천을 들고 평소 지나쳐 눈 익은 <眞(진)>양장점에 갔다. ‘빌로오드는 수공이 특히 비싸요 아무리 못 받아도 2만2천원은 받아야 해’ 양장점 마담은 진실로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죄송하단 말만 남기고, 이번에는 <善(선)>양장점에 갔다. ‘빌로오드야? 이것 2만 5천원 이하는 받을 수 없는데…’ 마담의 휴지 같은 미소를 뒤로 하고 이번에는 좀 낡은 양장점 문을 밀었다. ‘시내에서 3만 5천원 이상 가지만 우리 집에선 3만원에 해 주지’
  결국 씁쓸한 말을 안고 천을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2만 5천원? 3만원? 어쩌면 그렇게들 노래하듯 말할까?)
  그녀는 일단 이불을 쓰고 누웠다. 피곤했다.
  (어떻게 옷을 만들어 입을 수는 없을까?) 한참 생각던 그녀는 가만히 일어났다. 그리고 …방 가득 천을 펼친 후 스스로 자기 몸의 칫수를 재어가면서 주먹구구식의 마름질(裁斷(재단))을 시작했다.
  가위질을 끝내고 손으로 혼자서 가봉을 하고 주인집 재봉틀로 옷을 만들어 입을 작정이었다. 하여 3일간의 옷 만들기 각고가 시작되었다.
  빌로오드 천의 바늘 먹는 특성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 박음질한 치마폭부터 계속 따고 깁고 따고 깁고 했다. 매끄러운 털이 바늘 밑의 쇠판에서 뒤로 잘 나아가지 못하거나, 털쪽을 맞대어 박을 때는 부피 때문에 항상 우글쭈글 우는 것이 말이 아니었다. (아하! 이래서 빌로오드는 옷삯이 그렇게 비싼 모양이었군) 그녀는 비로소 양장점 사람들이 꽈리 불듯 쉽게 불러 대었던 엄청난 공전(工錢)을 이해 해줘 가면서 조심조심 땀을 흘렸다.
  한바람 넘기고 나면 비뚤어지고 한 차례 깁고 나면 잘못되기 일쑤여서 따고 깁고 따고 깁고… 한곳에 여러 번 땄을 때는 털울이 다 빠겨서 바늘밥이 거의 아슬하게 남는가 하면 주름이 모이는 부분은 투박하여 요모조모 다듬기 어려운 고빗길이나마 포기하지 않고 꼬박 이틀 동안의 틀질을 끝내고 3일째는 치마단과 빈시마다 감치기작업을 끝냈다.
  연 4일만에 겨우 완성시킨 빨간 빌로오드 원피스.
  그러나 이게 웬일이랴. 그것을 입고 내려다보았을 때, 앞가슴에서 조금 내려간 허리위의 양측에는 풀칠로 단단히 쓸어 붙인 것 같이 빌로오드의 털이 온통 눕혀져서 찬란스레 번뜩거리고 있지 않는가. 살펴보니, 그건 그곳뿐이 아니었다. 바느질 도중에 잘 눕지 않는 솔기를 눕히기 위해 다림질을 했던 곳은 모두 그 모양으로 찬란히 빛을 내고 있었다. 그녀의 이런 부지(不知)는 결코 그녀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솔질만 하면 되겠거니 하고 솔질을 했다. 그러나 물솔로 아무리 세워 보아도, 뜨거운 물에 담구었다 다시 말려 보아도, 세찬 김에 씌어 보아도 꼼짝 않고 번뜩대는 흉터였다. 하지만 절망하지 않고 세탁소로 달려가서 의논해 보았다. ‘다림질로 누운 털은 안 세워지죠. 하지만 크리닝을 하면 좀 나아질 수도 있으니까 두고 가 봐요. 나아지지 않으면 돈 안 받을 테니까.’
  3일후 토요일 그날. 아침에 세탁소로 가 보았더니, 휘발유 냄새만 흠씬 붙여 물고 있을 뿐 털빛은 여전했다.
  시계는 10시. 오후 2시가 되려면 4시간이 남은 데서 1시간반 가는 시간 말고 2시간이 넉넉 남았다.
  2시간 동안 다시 물솔로 털을 세우기 시작했다. 물칠이 된 때만은 번뜩임이 좀 덜했다. 그래서 우선 번뜩대는 솔기마다 물솔질을 했다. 어찌 보면 괜찮은 것도 같았다.
  손질이 끝나자 주인집 딸을 불렀다. 초등학교 1년생 동생도 따라 왔다. ‘내가 옷을 몇 가지 입을 테니 그중 제일 나은 것을 꼴라줘’하면서 원피스 말고 가장 유력한 후보복인 양복저고리를 걸쳐 보였다. 그때 꼬마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줌마가 아빠 같애.’ 그녀는 유일한 그 양복저고리를 절대 입지 않기로 결정, 이것저것 다 아빠 같을, 혹은 초라한 공원 같을 옷은 두고 바로 빌로오드 원피스를 입었다.
  ‘그게 제일 나은 것 같애, 언니 그걸로 입고가요,’ 주인집 딸이 말했다.
  본인은 거울을 들고 아무리 비춰보았자 손바닥만한 거울 속에서 어디가 어떻게 어색한지 알 길이 없다. 그저 그 고급스런 빌로오드의 촉감만이 그녀를 만족스럽게 해주고 얼굴의 초라함을 덜어주는 거였다. 원피스로 결정한 그녀는 세수를 하고 로숀을 발랐다. 거울속의 얼굴에서 자신의 눈이 새삼스럽게 너무 작다고 원망했다.(눈을 좀 이뻐 보이게 할 방법은 없을까.) 문구류를 담은 볼 박스 속을 뒤졌으되 화장꺼리가 있을 턱이 없다. 다만 인주(印朱)가 눈에 띄자 그녀의 응용력은 그것을 손으로 찍어 창백스런 두 뺨과 눈 부위에 설핏 발라 문질렀다. 훨씬 나아 보였다.(훌륭한 화장품을 두고도 몰랐군.) 그녀는 이제 스스로 기쁨에 뜨기 시작했다. ‘찬란한 해는 솟아서 트랄라 트랄라 온 누리는 잘 깨었네. 트랄랄랄라~’ 콧노래까지 흥얼대면서 작년 이맘때 절망과 함께 넣어 두었던 구두를 꺼내어 신고 자신의 모습을 한번 훌쳐 보았다. (이만하면… 미녀는 아니지만 얌전한 생김생김 정도는…)
  버스 타러 큰길까지 가는 도중에 빈대떡집, 양복수선, 삼일연탄, 백반 250원이 쓰여진 땟국 절은 유리창 마다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을 일일이 보아가면서 흐뭇해했다.
  적어도 5~6만원이란 거액이 없이는 입어볼 수 없는 값비싼 옷을 돈 한푼 안들이고 입을 수 있게 된 것이 그렇게 기쁨을 짜내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또 그러나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이 자꾸 그녀를…아니, 그녀의 원피스를 쳐다보는 바람에 어떤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눈빛은 결코, 그녀의 못생긴 얼굴을 보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히 원피스, 솔기가 번뜩거리고 울이 쭈글쭈글 우는 그런 부분마다 머물다 떠나가는 측은한 표정들…
  (방으로 돌아 가버릴까.) 망설임을 막으며 버스가 닥아 섰다. (옷이 아름다워서 본 것인지도 몰라 마음 쓰지 말고 가자. 나는 너무 소심해서 탈이라 했지.)
  그녀는 만원 뻐스 속에서 한결 편해진 마음을 가졌다. 차창밖의 하늘은 물빛으로 맑다.
  버스는 정류장에 얽매이지 않고 손만 들면 정차하여 사람들을 낚아채고는 들들들 흔들려갔다.
  으스럼 눈을 뜨고, 그녀는 고향 논길을 가던 달구지 바퀴 소리로 전청(轉聽)하면서 흔들려갔다.
  그렇게 하안참을 지나자 차는 점점 빨라지다가 얼마 후에는 버스 속의 사람들을 협동 단결시켜서 광화문 네거리에다 토해 놓았다. 그녀도.

  물어물어 찾아낸 다방 <양지>에는 양지답지 않게 시끄러웠다.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던 8명의 남자들 앞에 맨 먼저 도착되어진 그녀를 두고 정작 짝 맞추기 책임자인 P군은 조금도 당황할 필요가 없었다.
  남버 적힌 종이를 그녀에게 주었다. 남자들은 침묵을 지켰다. 여자는 나직히 숫자를 외었다.
  조금 있다가야 어떤 남자가 그녀앞으로 왔다. 그녀는 갑자기 입안이 깔깔했다. 보리깍지를 넘긴 것 같았다.
  남자는 반도팻션의 마네킹보다 더 매끈했다. 병신스러울 정도로 어수룩한 사람을 고대한 마음과는 반대였다. 그는 앉자마자 ‘옷이 퍽 우아하군요’라고 말했다.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펴지도 오므리지도 못한 오른손으로 가슴 아래를 엉거주춤 가렸다. 그리고 혼자가 된 왼손은 테이블 위에 놓았다가 무릎 아래로 내렸다가를 계속했다.
  그 남자는 매우 유연하고도 숙련된 자세로 상대방의 일거일동을 한눈에 바라보면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때, 여학생들이 도착하여 서로 짝을 찾아 자리를 잡는 모습을 보던 그녀는 비참일로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여자들은, 그렇다. 7명의 여자대학생들은 한결같이 이쁘고 아름답고 발랄했다.
  너무나 잘 어울리는 투피스, 쓰리피스의 화려하고 멋진 복장들은 사치스럽다기보다 자연스러웠다.
  ‘남들은 삼만원짜리 블라우스도 예사로 사 입는데 나는 만2천원짜리 하나 못 입겠나 싶어 그냥 사버렸지.’
  친구 영숙의 말이 생각났다.
  ‘얘, 청이 청바지 육만원 줬대더라.’
  ‘뭐 그게 자랑이라고 하나봐, 걔네집 부자니?’
  ‘아니 뭐 별론가 봐’
  삼년전 도서관 옆 자리의 여학생들 대화도 떠내려 왔다.
  ‘언니도 시장에서 몇천원짜리로만 사 입으니까 그렇게 초라하지. 육만원 팔만원짜리로 맞춰 입어봐. 다들 예사로 입은 옷 같애도 얼마나 신경을 써서 해 입는다고…’ 주인집 아가씨의 말도 장단을 맞추고 나왔다.
  그녀는 끝내 가슴 아래의 오른손을 떼지 못한 채 그 자리를 끝내었다.
  며칠 후 P군을 만났더니 그녀의 파트너가 ‘옷은 잘 입었는데 그 여자 손이 병신이더구먼’ P군에게 하더라는 이 말을 듣고 나서야 어떤 궁금증을 비로소 풀었다는 듯이 시원하게 웃었다.
  그날,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한자락 깔고 한자락 덮은 이불 밑으로 빠꼼이 나온 두 발이 서로 이불 속으로 들어가려고 싸우는 것을 해결해줄 생각도 않고 벽에 걸린 울울이 땀이 베인 화려한 빌로오드 원피스만 바라보고 있었다. (원피스야 괜찮다 괜찮아, 그날 정말 수고 많았어)
  동창이 밝도록 그녀는 빌로오드 원피스를 입지 않아도 되는 어느 시골마을로 선생이 되어가는 꿈에서 깨어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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