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傳統(전통)과 歷史(역사)


  ‘1958년과 59년에 걸쳐 張漢基(장한기)와 柳致眞(유치진)이 국문과 교수로 부임, 당시 總長(총장) 白性郁(백성욱)에게 연극학과의 증설과 그 필연성을 강조, 곧 快諾(쾌락)을 얻어 준비중 59년 하반기에 미국에서 귀국한 英文科(영문과)의 李根三(이근삼)과 더불어 財團側(재단측)의 적극적인 후원아래 취지문, 커리큘럼, 계획표 등을 작성, 문교부에 신청, 그 해 年末(연말)에 인가를 얻어 대망의 연극학과의 창설’(‘東大七十年史(동대칠십년사)’ 참조)이 이루어졌다. 이로서 동대연극은 급속한 확대와 도약의 발전을 보게 되었다.
  60년 한국최초의 연극학과의 정원은 20名(명)이었고, 첫 강의는 4월 4일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4․19, 5․16혁명이 잇달아 계속 일어나 첫해부터 休講事態(휴강사태)가 벌어졌다. 5월초에 李根三(이근삼)교수의 작품 <大王(대왕)은 죽기를 拒否(거부)했다> <原稿紙(원고지)> <東(동)쪽을 渴望(갈망)하는 族屬(족속)들>을 金在衡(김재형), 韓泰媛(한태원)씨에 의해 연출중이었으나 4․19, 5․16은 연습을 중단케 했고 60년 9월 6일 前(전) 東大新聞社(동대신문사) 자리에 동양최초의 소극장이 개관하자 이탈리아에서 당시 귀국한 楊東君(양동군)씨(現漢大敎授(현한대교수)에 의해 제1회 연극발표회를 갖게 되어 東大演劇(동대연극)의 전통은 이어졌다. 첫 작품은 리쳐드作(작) <오 머나먼 나라여>라는 1막극. 金基一(김기일), 李性雄(이성웅), 張貞那(장정나)(당시 영문과3년) 宋龍福(송용복), 池洪子(지홍자)(당시 국문과2년) 필자, 皮世英(피세영), 李相美(이상미), 金鎭洪(김진홍) (湖廷(호정)․作故(작고))이 출연하였다.
  이 開館公演(개관공연)으로 하여 연극계의 초점은 동대로 쏠렸는데, 원인은 <발표의 장>이 없던 극계에 소극장이 탄생되었다는 점도 있지만, 연극계의 쟁쟁한 멤버인 柳致眞(유치진)․金貞桓(김정환)․李光來(이광래)․李海浪(이해랑)․張漢基(장한기)․李根三(이근삼)․呂石基(여석기)․金正鈺(김정옥), 金在相敎授(김재상교수) 등이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東大(동대)가 극단 실험극장의 産室(산실)이 된 것도 그런 이유이며, 新舞臺實驗劇會(신무대실험극회), 實驗劇(실험극) 세미나 등의 극단도 동대소극장이 모체가 되었다.
 특히 같은 해 6월 14일엔 연세대에 이어 두 번째로 대학방송국인가를 맡았으며, 10월 20일부터 시행된 제1회 全國男女中高等學校 演劇競演大會(전국남녀중고등학교 연극경연대회)와 11월 26일에 있었던 유타대학 연극학과의 來韓(내한), 東大中講堂(동대중강당)에서 <뎀양키즈>(저주받은 양키)의 공연은 연극계에 刺戟(자극)뿐 아니라 동대가 연극의 심볼임을 잘 과시했다.
  61년부터는 金在衡(김재형)씨 이후 전통을 있기 시작했으니, 4월 9일부터 연극학과에서 공연된 신입생환영공연(그레고리부인의 <달 뜰 무렵>과 오닐의<고래>)이 그것으로 이는 그 후 계속되어 올해로써 무려 19회에 달하게 되었다.
  63년 필자의 발기로 先後輩合同(선후배합동)으로 동국극회가 창립(대표․兪賢穆(유현목))되면서 吳學榮(오학영)씨의 신작(<그 얼굴에 햇빛을>)을 李光來(이광래)연출로 國立劇場(국립극장)에서 상연, 극계나 교내에 주목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그 후 東國劇會(동국극회)는 재학생중심으로 되어 <제17포로수용소> <償還(상환)> <밧줄> <元曉大師(원효대사)> <釋迦(석가)> 등의 공연을 갖고 겨우 명맥을 유지해오다 74년 중단되고 말았다.
  같은 해 연극과는 연영과로 개칭되고 제1회 卒業公演(졸업공연)을 柳致眞(유치진)씨의 <왜 싸워>로 택해 상연하였으며, 이어 晋州(진주) 및 大邱(대구)공연을 가져 6․25직전 朴英民(박영민)씨의 의해 처음 시도된 지방순회공연의 문을 다시 열게 되었다. 그 후 졸업공연은 올해로 16회에 이르게 되었고, 지방공연도 무려 8회의 공연을 갖게 되었고, 釜山(부산)에 在釜東大(재부동대)연극회를 창단(대표․韓洙喆(한수철))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졸업 공연은 72년 당시 문리대회장 吳出世(오출세)로 하여금 국문과에까지 시도하여 올해 제7회의 공연을 갖은바 있다.
  연영과생은 졸업전 이미 극계․방송계․영화계에 진출했는데 李英植(이영식), 河剛一(하강일),金鶴柱(김학주), 李完浩(이완호), 柳興烈(유흥열) 등이 演出界(연출계)로, 李性雄(이성웅), 金鎭洪(김진홍)(湖廷(호정)), 皮世英(피세영), 金基一(김기일), 李一雄(이일웅), 張時權(장시권)(旭濟(욱제) 金茂生(김무생), 金客昊(김객호), 李昌九(이창구), 李信宰(이신재), 姜眞煥(강진환), 孫京子(손경자) 등이 연기자로 진출했으며, 洪淳昌(홍순창)씨가 무대장치, 필자, 金知鉉(김지현), 尹靑光(윤청광), 禹濟男(우제남)(作故(작고)) 등이 劇作壇(극작단)에 등단하였다.
  65년엔 극단 第三舞臺(제삼무대)를 李英植(이영식), 下武一(하무일), 鄭斗秀(정두수)(國永(국영)), 李成雄(이성웅), 金基一(김기일)씨 등이 조직, 본격적인 음악극을 실험하고 五月藝術賞(오월예술상)에 참가, 作品賞(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그 이듬해엔 宋聖漢(송성한), 金正洙(김정수), 申鉉采(신현채)씨 등이 이끌던 文藝劇場(문예극장)에서 <패스포드와 거짓말>로 특상을 수상, 東大(동대)를 빛냈다. 章湖(장호), 崔載福(최재복), 宋赫(송혁), 韓在壽(한재수)씨 등을 중심으로 국내최초의 詩劇運動(시극운동)도 이때에 시작됐다.
  68년 張漢基(장한기)교수가 演映科(연영과)주임이 되면서 연영과는 실기위주에서 이론위주의 교육으로 바뀌었고, 이듬해엔 국내 유일의 演劇專門誌(연극전문지) ‘演劇學報(연극학보)’를 창간하고 9월엔 全國男女高敎演劇競演(전국남녀고교연극경연)이 부활하기도 했으며 실험극공연을 종용해 패닉․플레이를 朴亢緖(박항서), 鄭采煒(정채위), 林御圭(임어규), 柳在昌(류재창) (成祖(성조))씨로 하여금 실험케도 했다.
  69년엔 金淑賢(김숙현), 金勝珪(김승규), 72년엔 柳成祖(류성조), 金哲鎭(김철진)씨가 각각 극작가로 필자가 69년 국내 初有(초유)로 연극을 종합 이론과 실제를 곁들인 ‘演劇原理(연극원리)’란 단행본을 낸 것도 東大演劇(동대연극)의 큰 수확이다.
  72년엔 大學院(대학원)에 연극영화과가 신설되었고, 소극장옆에 TV스튜디오의 개관이 있었으며, 學訓團(학훈단)최초의 연극공연이 吳出世(오출세)에 의해 시도되었고 동국극회의 명맥도 그에 의해 있게 하였다. 英文科(영문과)의 原語劇(원어극) 시작(The View from the Bridge)이나 民俗劇硏究會(민속극연구회)의 발족, 77년 축제의 일환으로 새마을부에서 시행한 써클 연합 촌극경연도 모두 따지고 보면 東大演劇(동대연극)의 꾸준한 전통과 찬연한 역사적 바탕에 힘입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