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새책 -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몇 해 전 한 출판사에서 번역의뢰를 받았다. 선뜻 하겠노라 확답을 주지 못하고 우선 텍스트를 건네받았다. 내가 주저했던 이유는 번역을 과소평가하는 현실 때문이었다. 요즘 텍스트에 대한 특별한 소명감이 없이는 쉽게 할 수 없는 것이 번역 일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텍스트를 읽어보니 그런 이유 말고 더 근본적인 이유에서 내가 번역할 수 있는 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 책의 필자는 이미 한국에도 여러 권의 번역서가 나온 바 있는 재일조선인 서경식 교수였다. 그는 1971년에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잘 알려진, 지금도 ‘기억’하는 것조차 끔찍한 박정희 유신독재가 저지른 잔혹함의 피해자 서승ㆍ서준식 형제의 동생이다. ‘고국’이 그 가족사에 입힌 고통은 한 개인도 떠안기에는 너무도 버거운 암울했던 민족사의 한 페이지가 이미 되었다. 아니, 그 고통은 아직 아물거나 화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저자와 그의 형제들은 식민지와 분단의 민족사가 자신들에게 안겨준 버거운 고통을 마다 않고 그 무게를 짊어진 채 살아왔다. 우선, 그런 삶의 무게를 내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웠기에 나는 번역을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사실, 그 보다 더 주저하게 만든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것은 서경식 교수가 그 책에서 다루고 있는 ‘쁘리모 레비’라는 이탈리아 작가에 대한 나의 무지함 때문이었다. 홀로코스트, 나치의 집단적 광기에서 비롯된 대량학살. 거기에서 살아남은 증언자 중 한 명인 쁘리모 레비의 소설을 나는 읽은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창비, 2006)라는 텍스트에 대해 특별한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고, 어렵게 번역하기로 결정한 후 일본에서 출간된 쁘리모 레비의 번역서 몇 권을 우선 구해 읽었다. 또한 서경식 교수가 자신의 저서를 저본으로 NHK에서 제작한 ‘아우슈비츠 증언자는 왜 자살했는가-프리모 레비를 찾아서’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그리고 번역하는 동안, 아니 번역 후에도 줄곧 왜 한국에서는 아우슈비츠에 대한 관심이 적을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식민지배와 전쟁, 그리고 민중항쟁과 인권탄압의 역사로 점철된 한반도의 역사를 생각할 때, 어쩌면 아우슈비츠보다 서대문형무소가 지근거리에 있고, 그리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생생한 증언, 노근리 학살, 광주학살 등이 아직 다 ‘증언’되지 못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어느 학자는 20세기 후반기를 ‘증언의 시대’라고 명명한다. 특히 나치의 잔혹한 폭정과 학살,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 기록이 증언문학의 형태로 세계 각지에서 각국의 언어로 출간되었다. 안네 프랑크를 비롯해 빅터 프랭클, 엘리 비젤, 그리고 쁘리모 레비의 작품들이 그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하지만 서경식 교수의 책을 번역하는 동안 그들의 책은 일본어판으로 참조할 수밖에 없었다. 아우슈비츠와 관련된 한국어 자료의 빈곤함을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들어 빅터 프랭클의 작품을 비롯해 번역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 중 쁘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돌베개, 2007)는 제목부터가 왜 우리는 아직 아우슈비츠를 읽어야 하는가를 일러준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아우슈비츠라는 디스토피아에서조차 소멸될 수 없었던 인간성에 대해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작가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생환해왔지만, 그의 목소리에 무관심한 세계의 무서움에 쫓기다 결국 그는 1986년에 자살했다. 그를 죽음으로까지 내몰았던 작가가 그토록 ‘증언’하고자 했던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이 작품과 함께 그의 증언문학 3부작이라 불리는 ‘주기율표’(돌베개, 2007)와 ‘휴전’(돌베개, 2010)도 읽어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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