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시민군에게 듣는 5월 민주화운동의 기억

▲ 강연중인 이덕준씨

올해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30년이 되는 해이다. 이에 우리대학 ‘5.18 광주민주화운동 30주년 기념 광주 역사기행 준비 위원회’의 주최 하에 5.18 광주민주화운동 30주년을 맞아,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피 흘렸던 시민들을 기념(記念)하기 위한 행사가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런 기념행사의 일환(一環)으로 지난 11일 학림관 소강당에서는 총학생회의 후원으로 ‘광주 시민군에게 듣는 80년 5월 이야기’라는 주제의 강연이 개최됐다. 이번 강연은 80년 당시 광주 대동고 3학년 때 광주시민군에 직접 참여(參與)했던 이덕준 씨가 맡아서 진행했다.
이덕준 씨는 강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여러분에게 평화가 함께하길 바란다”며 이야기의 첫머리를 풀어놓았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교련(敎鍊)과목을 배우고, 그게 당연시되는 사회를 살았다는 이덕준 씨. 그는 강의를 통해 학생들에게 민주화운동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이덕준 씨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당시 학교 선생님들은 군부정권의 문제점을 지적(指摘)해 학생들에게 자주 이야기했다고 한다. 또한 학생들이 보충수업비 폐지를 위해 시위를 하는 등 그 당시 광주에는 이미 민주화 바람이 불고 있었다.
80년 5월 18일, 그는 트럭에서 공수부대가 뛰어내려와 시민들을 무차별 구타(毆打)하는 것을 목격했다. 또한 공수부대 6명이 40대 중반으로 보이던 아저씨 한명을 구타하는 모습을 생생히 봤다고 한다. 이덕준 씨는 “그 때 처음으로 사람이 맞아죽는걸 봤다”며, “살려달라고 외치던 그 아저씨의 목소리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다음날, 시위에 가담하기 위해 대동고 3학년들이 전교생을 이끌고 학교를 나섰다. 하지만 전투경찰이 이미 교문을 봉쇄(封鎖)한 상태였다. 학생들은 봉쇄된 정문을 피해 학교 뒷산을 넘어 버스를 타고 금남로 쪽으로 가고 있었는데 버스가 갑자기 멈췄다. 무슨 일인지 살펴보니 공수부대가 탑승한 트럭이 줄줄이 금남로로 들어서고 있었다. 한 시민이 공수부대가 타고 있는 트럭에 돌을 던지자 공수부대가 트럭에서 내려와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구타하기 시작했다. 이덕준 씨는 “당시 돌을 던진 시민이 결국 공수부대에게 잡혔는데, 공수부대에게 구타당했고, 그로 인해 그 사람은 무릎연골이 깨졌다”며 공수부대의 잔혹한 만행(蠻行)에 분노를 표했다.
이어서 이덕준 씨는 목멘 소리로 5월 23일을 회상했다. 단짝친구가 23일에 공수부대가 난사(亂射)한 총알을 얼굴에 맞고 숨을 거뒀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난사된 총알에 목숨을 잃은 친구를 생각하면 총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27일 새벽, 마지막까지 항쟁하던 이덕준 씨는 결국 계엄군에게 붙잡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을 짓밟혔다. 또한 체포되어 영창(營倉)으로 후송됐는데, 바로 영창으로 가지 않고 도중에 어딘가에 들러서 공수부대에게 구타당했다고 한다. 그는 “영창에 들어가서도 수사할 때 ‘맞고 시작하자’면서 질문도 없이 무조건 맞고는 했다”고 밝혔다.
이덕준 씨는 18일부터 27일까지의 민주화 운동을 회상하며 “그때야말로 스스로 선택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행복한 시간이었고, 독재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이었다”고 말했다. 또 그는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시민군이 가장 많이 불렀던 노래 소절은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잠 이룬다’였고, 부를 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눈시울을 붉혔다”고 밝혔다.
이덕준 씨는 광주시민이 당시 총을 들고 나선 이유는 나와 내 가족, 이웃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우리나라의 민주화는 중단된 상태”라며 완성되지 못한 민주화를 완성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강연은 30년이 지난 그날의 현장과, 시민들의 피로 이뤄진 민주화의 역사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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