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 권력탈취에 저항해 민주화의 단초(端初) 마련한 현대사의 비극

▲민주 회복을 요구하며 거리시위를 벌이고 있는 광주 시민들의 모습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1980년 5월은 신군부의 쿠데타에 대한 대학생의 저항이 무섭게 타오르던 시기였다. 이른바 ‘서울의 봄’의 절정이었다. 이에 당황한 쿠데타 세력은 불법적으로 계엄령(戒嚴令)을 발포했고 대학에는 휴교령이 떨어졌다. 이 계엄령에 따라 전국의 주요 대학을 급습한 공수부대가 전남대학에 진주(進駐)하여 학교에 있던 학생들을 무차별적으로 체포한 것은 새벽 2시경이었다.

전남대 학생에 공수부대 무차별 폭력

5월 18일 아침이 밝았다. ‘휴교령이 내리더라도 학교 앞에서 만나자’는 약속에 따라 등교한 학생들은 정문에서 진을 치고 있는 공수부대와 마주쳤다. 학생들이 물러서지 않자 M16총검으로 무장한 공수부대는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恣行)했다. 이전에 경찰들은 학생들의 시위를 해산시키려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이 공수부대는 도피하여 집안에 숨어있는 학생들도 끌어내서 가리지 않고 진압봉을 휘둘렀다. 학생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고 실신하여 병원으로 실려 갔다.
분노한 대학생들은 시내로 진출하여 시위를 계속했다. 소문을 듣고 몰려든 학생들의 수는 급격히 증가했다. 경찰이 밀리기 시작하자 중무장한 공수부대가 직접 투입(投入)되어 학살적 폭력을 자행하기 시작한 것은 18일 오후 3시 경이었다. 이들은 당구장에 들어와 손에 초크가 묻어있지 않은 청년들을 가려내어 진압봉으로 후려쳐 끌고 갔다. 데이트하다 잡혀서 애원하는 여성에게도 진압봉을 휘둘러 쓰러뜨렸고, 도심의 큰 거리에서 옷을 벗기고 대검으로 난자(亂刺)하며 희롱했다. 이것은 그 당시 국민의 군대가 국민을 향해 광주에서 저지른 잔혹한 만행의 시작에 불과했다.

학생 · 노동자 등 수백명 사망

분노에 몸을 떨던 시민들이 대학생들의 시위에 합세했고, 뒤이어 고등학생들까지도 가세했다. 증강(增强)된 시민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고 공격적이었다. 바리케이드가 쳐지고, 시민들과 공수대원 간에 육탄전도 벌어졌다. 공수부대의 총격으로 시민들이 죽어가자, 시민들은 인근지역 예비군 무기고에서 가져온 총으로 무장하고 시가전에 들어갔다. 여자들은 음료수와 빵, 김밥과 주먹밥, 라면과 수건을 준비하여 시위대에게 나누어주었다. 광주시민 80만 인구 중에서 30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시민이 무장하여 시가전으로 맞서자 계엄군은 도처에서 시민에 의해 포위되는 상황이 발생했고 결국에는 시 외곽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민의 힘이 탱크로 무장한 폭력을 이겨냈던 것이다. 그리하여 광주는 야만적인 권력의 폭력으로부터 해방(解放)되었다. 시민들 스스로 각종 위원회를 구성하여 자치공동체를 건설해나갔다. 피로 얼룩진 거리를 청소하고, 시민적 질서를 확립했다. 부족한 생필품을 서로 나누어 쓰고, 창고를 열어 식량도 배급했다. 매일 도청 앞 광장에서 시민대회를 열어 중요한 일을 토론하고 결정했다. 자치기간 동안에 은행은 안전했으며, 범죄와 약탈도 거의 없었다. 아직 안정된 체계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시민들은 자유로웠고 진정한 주인이 되었던 것이다. ‘해방 광주’의 이 경험은 현대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값진 유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27일 새벽에 계엄군의 점령 작전이 시작되었다. 탱크를 앞세운 중무장 정규군의 공격에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다 알면서도 시민군은 결사항전의 길을 선택했다. 먼저 간 열사들의 죽음을 생각했고, 폭력 앞에 굴종(屈從)할 수 없다는 역사의식의 발로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그 자리에서 장렬하게 산화(散華)했다.

민주화의 초석 제공한 현대사의 비극

30년 전에 있었던 이 10일간의 항쟁은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사회운동에 꺼지지 않는 횃불을 비추고 있다. 그 핵심은 부당한 폭력에는 목숨을 걸고 굴종하지 않는 무장투쟁의 치열성이다. 우리사회에서 한국전쟁 이후 계속된 반인간적 독재 권력에 그 어느 공동체도 감히 실천할 수 없었던 강력한 투쟁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 치열성은 그 후 한국 사회운동사에서 불멸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그 힘이 80년대 한국 사회운동의 원천이 되었고 마침내 신군부 학살만행의 주역들을 법정에서 단죄(斷罪)할 수 있게 했다. 말하자면, 80년 5월 27일에 죽은 항쟁을 17년 후에 부활시킨 ‘항쟁승리의 역사’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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