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형은 과묵했지만 불의보면 참지 못했던 의리파

 

▲노희두 열사.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거(抗拒)한 1960년 4ㆍ19혁명은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사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된 사건이다.

우리대학 또한 4ㆍ19혁명과 깊은 관련이 있다. 4월 19일, 우리대학 학생들은 동국대학교의 이름이 적힌 붉은 현수막을 앞세우고 경무대, 즉 지금의 청와대로 돌진했다. 경무대 앞에는 수백 명의 무장경관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다. 우리대학 학생들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전진해 나갔다. 그러자 경무대 앞의 무장한 군경들이 무자비하게 발포해 우리대학 법학과 3학년 고(故) 노희두 열사가 산화(散華)했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목숨을 걸었던 4ㆍ19혁명에서 노희두 열사는 우리대학이 흘렸던 피와 그날의 결의를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의 희생을 후대에도 기리고자 동국대 4.19혁명유공계승자회는 내일(4일) 동우탑 옆에 노희두 상(像)을 건립한다. 이렇듯 우리대학 4ㆍ19혁명의 상징인 노희두 열사를 많은 선ㆍ후배, 동기들은 4월마다 추모하지만, 그의 생전의 모습과 개인적인 이야기에 대해 알려진 바는 그리 많지 않다.

동대신문은 고(故) 노희두 열사의 동생인 노희태(법64졸) 동문을 만나, 노희두 열사의 생전 모습과 노희두 열사의 희생이 오늘날 4.19혁명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들어봤다.

노희두ㆍ노희태 동문은 충청남도 서천 출생으로 3남 2녀 중 각각 장남ㆍ차남이다. 이제는 백발이 성성한, 일흔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그리운 형님에 대한 기억은 생생하기만 하다. 노희두(1939년생)ㆍ노희태(1942년생) 형제는 어릴 적부터 두터운 우애를 자랑했다. 나이차가 많지 않아 다른 동기들보다 더욱 절친했다고 한다.

생전의 형은 어떤 인물이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노희태 동문은 “형은 한마디로 의리파”라고 정의(定義)했다. 노희두 열사는 평소에는 과묵하고 예의바른 청년이었지만 불의를 보면 참지않고 무조건 나섰다고 한다. 또 노희두 열사는 형에 대해 “리더십이 강해 항상 친구들 사이에선 소위 ‘왕초’ 역할을 도맡았다”고 말했다. 이렇듯 의협심이 강한 노희두 열사가 독재정권에 대한 항거에 동참했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독재에 항거한 노희두 열사

1960년, 당시 법학과 3학년생이었던 노희두 열사는 장래의 법조인을 꿈꾸며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고 있던 차에 3ㆍ15 부정선거가 발생했다. 마산에서의 시위, 고(故) 김주열 학생의 시신 발견 등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독재정권에 대한 분노가 오를 대로 오른 상황이었다.

4월 19일 당일, 도서관에서 고시 공부를 하고 있던 노희두 열사는 의기에 찬 동기, 선ㆍ후배들과 함께 거리로 나섰다. 경무대로 향하는 와중에도 노희두 열사는 한치의 망설임은 커녕 누구보다 앞장서서 행렬의 선두에 섰다. 당시의 상황을 전해들었던 노희태 동문은 “4.18 시위때만해도 사망자가 없어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형의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며 당시의 심정을 토로(吐露)했다. 노희두 열사는 계엄령 선포 이후 즉각 시행된 발포명령에 희생당해 첫 번째 4ㆍ19혁명 사망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희두 열사는 발포명령이 떨어진 오후 1시에 바로 총격을 받고 백병원으로 이송되는 도중 숨을 거두고 말았다.

▲장항농업고등학교 재학시절 출전했던 군 탁구대회에서 우승 한 후,

형의 사망 소식을 듣고 부모님과 함께 상경(上京)한 노 동문은 형의 시신을 보고 독재정권의 참혹함을 느낄 수 있었다. 유족이 노희두 열사의 시신을 살펴보니 탄환이 흉부 바로 밑을 뚫고 척추까지 관통했다고 한다. 노 동문은 “코앞에서 발포하지 않는 한 그런 총상이 나올 수 없다”고 독재정권의 잔인함에 치를 떨었다.  듬직한 아들, 자랑스러운 형을 잃은 유족의 애통함은 노 열사의 동기, 선후배 뿐만 아니라 그 소식을 들은 모든 이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만들었다. 형의 싸늘한 주검 앞에 유족들의 애통한 마음은 지금도 변치 않는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형을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이 저민다”며 비통한 마음을 나타냈다. 

▲노희태(법64 졸업) 동문.

유족으로서 형의 유지 이어

하지만 고(故) 노희두 열사를 위해서라도 유족들은 더 이상 가만히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 노희두 열사의 아버지 노종래 씨는 4ㆍ19혁명희생자유족회의 초대 이사장(현재 회장직)을 맡았고, 혁명재판소에서 정부촉탁검사로 활동하며 4ㆍ19혁명의 희생자들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노희태 동문이 동국대와 인연을 맺은 것도 이때부터다. 학교 측에서 유족을 위한 배려 차원에서 노희태 동문에게 형의 유지를 이어나갈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노희태 동문은 “억울하게 죽은 형의 꿈을 대신 이루기 위해서 대학의 제의를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비록 형의 유지를 끝까지 이어나가진 못했지만 노 동문은 형과 같은 교정을 거닐며 형에 대한 자랑스러운 마음을 평생토록 지니고 살아갈 수 있었다.

독재정권에 항거했던 고(故) 노희두 열사의 유족으로서 항상 긍지를 가지고 살아왔지만 안타까운 점도 있다. 바로 유족들에 대한 정부와 유족회의 태도다. 현재의 법령상 방계 가족인 노희태 동문은 유족으로서 어떠한 대우도 받을 수 없다. 올해에 들어서야 국가보훈처나 유족회로부터 4ㆍ19추모 행사 초청장이 왔을 뿐, 이전만 하더라도 유족회나 국가보훈처에서 방계 가족이라는 이유로 외면 받았다. 노 동문은 “4ㆍ19혁명 희생자 많은 사람들이 슬하에 자녀를 두지 않은 학생들이다”며 “방계 가족들을 배제하면, 희생자들을 추모할 유족의 명맥이 끊어진다”며 제도의 개선을 촉구했다. 

고(故) 노희두 열사의 고향인 서천에서는 매년 4월 19일마다 노희두 열사의 희생정신을 기리는 추모행사를 연다. 뿐만 아니라 우리대학에서도 매년 4.19 추모 행사때마다 노희두 열사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노희태 동문은 “50년이 지났음에도 많은 이들이 형의 유지를 이어나가서 기쁘다”고 말했다. 다만 노 동문은 “요즘 젊은이들이 4.19혁명의 의미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4.19혁명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이라며 많은 이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당부했다.

노희두 열사의 숭고한 정신이 없었더라면 민족사학 동국대라는 영예가 남아있을 수 있을까. 그의 꺼지지 않는 순수한 의기를 이번 흉상 건립과 함께 다시 한번 동국인들의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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