昇降機(승강기)

  휴식기간이 끝날 무렵 샛길로부터 서너 명의 병사가 띄엄띄엄 나타났다. 맨 뒤의 박일병은 바지 혁대의 이중바클을 채우며 밭장다리의 꼬락서니로 뒤따라왔다.
  ‘출발!’
  우리는 다시 민가를 찾아 계곡을 타고 내려갔다. 드디어 산턱을 휘감고 돌아간 길모퉁이에 곳집같은 작은 초가가 보였다. 여러 해 동안 새 이엉을 얹지 않았는지 썩은 지지랑물이 똑똑 떨어져 내렸다.
  토방(土房()에 올라서자 해솟병을 앓는 늙은 영감의 밭은 기침소리가 눅눅한 벽을 긁어댔다. ‘콜록! 콜록! 콜록콜록!’
  ‘영감님 혼자십니까?’
  ‘아니우. 딸년이 고구마밭에... 콜록... 갔는디 와 이리 ...콜록... 안오나.’
  내가 김상병을 쏘아보다 쏜살같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고구마밭 옆 다복솔 사이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운 뒤였다. 다복솔 사이의 그중 큰 소나무 가지에는 갈갈이 찢긴 하얀 치마를 머리에 덮어 쓴 소녀의 시신(屍身)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치마폭을 건어내자 쏙 내민 혓바닥은 끝이 말린 채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후송병원의 병실 안이었소. 최초로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하얀 벽에 걸려있는 십자가였소. 허나 거기 못 박혀 있는 괴로운 성자(聖者)의 모습은 내게 아무런 감흥도 안겨주지 않았소. 대관절 죽은 자의 영혼이 산 자의 육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오? 나는 차라리 동강난 다리를 바둥거려 죽은 자의 영혼을 조롱하고 싶어졌소. 나는 하마터면 한 여자의 환영(幻影) 때문에 부서져 버릴뻔한 내육신이 이렇게라도 아직 살아있음을 감사하고 있소. 나는 그 여자를....’
  ‘무척 사랑했던 모양이죠?’
  ‘사랑이요? 사랑이라...’
  그는 끄응 신음소리를 냈다.
  그의 이마에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맺혔다. 나는 그의 영혼의 밑바닥에 앙금이 되어 가라앉아 있을 믿음과 사랑을 기포(氣泡)처럼 떠오르게 하고 싶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촛불을 켰다. 그리고는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묵상에 잠겼다.
  신학교(神學校) 시절. 나의 가슴에 못을 박은 것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상(十字架像)의 주인이 행한 희생은 잘못 저질러진 역사적 과오라는 점이었다. 즉 그것은 신(神)이 사탄에게 패한 불명예의 기록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후세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조상(弔喪)할 수는 있어도 경모(敬慕)할 수는 없다는 것이 나의 견해였다.
  사내가 목발을 당기며 앉은뱅이걸음을 쳐서 마룻바닥에 걸쳤던 엉덩이를 떼어놓았다. 그러더니 민첩하게 겨드랑이 속으로 목발을 끼웠다. 그는 아마 그가 나의 묵상을 방해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 문득 그가 무엇 때문에 미첼을 찾아왔는지에 관하여 묻지 않았음을 상기하였다.
  ‘참. 미첼씨를 찾아온 용건은 뭐죠?’
  ‘...’
  ‘난 미첼씨를 전혀 모르오. 용건도 있을 리 없소.’
  ‘그럼?’
  ‘옆집 1004호를 찾아왔다가 우연히 들렀을 뿐이요. 하두 오랜만이라 1004호에 사는 사람들이 과연 나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하였소. 그래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누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내 편으로 걸어왔소. 나는 내 행동이 수상쩍게 보이지나 않을까 염려되었소. 사실 난 오늘 밤에... 아니오. 그런 얘긴 필요 없고... 그래서 나도 떳떳한 용무가 있는 것처럼 이 집 문을 두드린 거요. 난 이 집이 비어있을 줄 알았더니 뜻밖에 선생이 계셨소. 거기 좀 보시오.
  그가 가리키는 현관 밖의 편지꽃이함에는 <미첼을 찾아오신 분은 선교회 사무실로 연락바람>이라고 적힌 메모지가 압핀에 눌려 있었다. 나는 이제까지 아파트를 드나들면서도 왜 저것을 한번도 눈여겨보지 못했는지 이상하였다.
  ‘실례했소. 이만 안녕히. 주무실 땐 잊지 말고 꼭 촛불을 끄시오.’
  문을 닫고 어안렌즈로 밖을 내다보니 그는 1004호 현관 앞에 꼿꼿이 서있었다. 얼른 노크를 하지 못하는 폼이 또 주저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현관의 불을 켰다. 촛불은 독사의 혀 마냥 날름거리며 타올랐다. 나는 마치 선잠을 깬 듯 의식이 몽롱하였다. 천군(天軍)과 악마군(惡魔軍) 격전장인 <아마겟돈>은 바야흐로 세계 도처로 확대되어 이념전쟁(理念戰爭)을 야기시켰다. 천군도 악마군도 명분 없는 싸움터에 총알받이로 나선지 오래였다. 나는 촛불을 혹 불어 꺼버렸다.
  ‘최근 동해안의 한 어촌에서 발생한 괴질(怪疾)로 여러 어린이들이 죽어 갔습니다. 생선은 날것을 먹지 말며, 물은 반드시 끓여서 먹을 것 등 위생준수사항을 숙지시켜 주시고, 죽은 어린이들의 가엾은 혼(魂)을 위해 기도하여 주십시오’ 이상은 이번 주 목사님의 설교 노트에 메모해 넣을 간지(間紙)의 내용이었다. 그것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맨 먼저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기도 하였다.
  나는 잠시 기지개를 켜면서 간밤의 숙면(熟眠)이 실어온 상쾌한 아침의 뚜껑을 열 준비를 하였다. 나는 누운 채로 두 다리를 공중으로 쳐들어서 몇 번 상하로 흔들어 보았다. 그런 다음 다리의 반동을 이용하여 가볍게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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