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동서)교차로’…숙명적 도전에 적절한 응답

간다라의 흥망성쇠

  도도한 인더스의 물줄기가 굽이쳐 흐르는 곳에 불교문화의 寶庫(보고), 간다라(Gandhara)는 자리 잡고 있다. 오늘날은 파키스탄의 영토이지만, 적어도 기원전 6세기 무렵부터 숱한 이민족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한 역사의 고장이다. 간다라라는 지명이 구체적으로 어디까지를 지적하는가는 분명하지 않지만, 대략 인더스의 서부일대를 가리키는 말인 듯하다. 즉 페샤와르(Peshawar)계곡 일대의 스왓트(Swat), 바쟈우르(Bajaur)를 비롯하여 북쪽으로는 칠래스(Chillas), 길깃트(Gilgit)에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다.
 카라코람 연봉(連峰)이 만년설(萬年雪)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으며, 황량한 산악일대에는 무심한 흙먼지가 흩날리고 있다. 인도대륙의 젖줄, 인더스가 있고, 기후도 그다지 춥지는 않아서 인간생존의 조건은 그렇게 나쁜 편만은 아니다. 더구나 이 지역은 서양과 동양을 잇는 중요한 루트이다. 유명한 실크로드의 길목이며, 중앙아시아의 여러 민족들에게는 그들의 힘을 과시하는 격전장이기도 하였다.
  BC 6세기에서 5세기까지 이 일대는 페르시아의 아케메니드(Achaemenid)제국이 다스리던 곳이었다. BC 4세기가 되면 알렉산더 大帝(대제)가 이곳을 점령한다. 그는 페샤와르를 점령하고, 여세를 몰아 중국 쪽을 넘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妖絶(요절)하였다. 그의 死後(사후) 이곳에는 그리스인에 의한 통치정부가 들어선다. 그러나 이민족의 침입은 인도인들의 각성과 단합을 불러일으킨다.
  민족적 자각에 편승하여 인도대륙의 통일을 이룩한 者(자)가 아쇼카대왕이다. 그는 챤드라굽타(chandragupta)대제의 손자로서 데칸고원 이남의 일부를 제외하고 오늘날의 아프간 일대까지를 석권하였다. BC 3세기에서 2세기 무렵까지 마우리야왕조는 이 일대에 숱한 조각 건축들을 조성하였다.
  아쇼카대왕은 불교적 治世(치세)를 이상으로 삼았던 군주이었느니 만큼, 술츠불교사원과 탑파 등이 건립되었고, 오늘날까지 그 일부가 남아 있다. 그러나 대왕의 사후 마우리야왕조는 급속히 붕괴되었으며, 이 일대에는 여러 민족들이 각축을 벌였다. 그리스의 제국들뿐 아니라, 스키탄(scy-thians) 파티안스(Parthians)등이 번갈아 통치를 거듭하였다.
  기원후 3세기, 이 일대는 쿠샨(Kushan)이라는 새로운 주인을 맞는다. 그 왕조의 카니쉬카왕때는 또다시 불교문화가 융성하였다. 오늘날 이 일대에 남아있는 건축물이나 조각품들은 대부분 이 시대의 작품들이다. 마지막으로 이 일대를 짓밟은 사람들은 훈즈(Huns)이다. 흉노라고 부르는 이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은 기원후 四六五(사육오)년 간다라 일대를 휩쓸었다. 그들은 잔인한 살육과 방화를 일삼으면서 닥치는 대로 불교문화를 부수었다.
  오늘날도 필라스라는 인더스 유역에는 그 당시의 상처와 함께, 남으로 피신하던 불교도들의 눈물겨운 흔적이 남아 있다. 기약 없는 발길을 남으로 돌리던 불교인들은 간곡한 정성을 바위 위에 불상을 새겼다. 因緣(인연)있는 국토를 만들고자 그들의 마지막 信心(신심)을 凝集(응집)시켰던 것이다. 세월의 수레바퀴는 흘러 승자와 패자를 모두 永却(영각) 속에 묻어 버린 채 무심한 구름은 산허리를 맴돌고 있었다.


간다라의 문화

  간다라의 문화는 서양과 동양의 절충이다. 특히 佛像(불상)의 경우, 그 조각기법의 아이디어를 당시 인도인들은 희랍인을 통해서 배웠다. 그래서 소재는 인도 것이지만, 조형기법은 그리스式(식)인 독특한 양식으로 발전하게 된다.
  다호르나, 폐샤와르의 박물관에는 이러한 특성을 지닌 불상들이 많다. 옷도 통견이며, 얼굴 모습은 완연한 서양인이다.
  이것은 훗날 마투라(Mathura)에서 일어난 문화와 좋은 對照(대조)를 이룬다. 즉 서양식의 기법이 인도적인 모습으로 정착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의 특성은 바로 인간 살육의 역사적 배경이 빚은 필연적인 因果應報(인과응보)인지도 모른다. 파키스탄의 북부인들은 생김새가 완연한 서양인이다.
  키가 크고 피부가 희며 코가 높다. 그러나 이슬라마바드쯤에서부터는 그런 얼굴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피부가 검고, 털이 많은 전형적인 인도인의 모습만이 뜨일 뿐이다. 이들은 결국 동서교차로라는 숙명 앞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도전’들이 적절이 ‘응답’해 온 것이다.
  그리스도와 인도인들이 共存(공존)했던 흔적은 씨르카프(Sicrkap)에서 찾을 수 있다.
  도시는 탁실라(Taxila)에서 멀지 않은 곳인데, 남북으로 길게 뻗은 정연한 도시계획을 가추고 있다. 이곳에는 세 곳의 佛塔址(불탑지)가 있고, 상당한 문화를 누렸던 면모가 완연하다. 도시의 입구 佛塔址(불탑지) 곁에는 조로아스터의 神殿(신전)이 있다. 아마 기원전후의 시기 때에는 이 두 宗敎(종교)가 담을 맞댄 채 서로의 儀式(의식)을 집행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佛塔(불탑)은 지금 허물어진 채 基壇部(기단부)만이 남아 있는데, 그 樣式(양식)이 매우 異彩(이채)롭다. 즉 二重(이중)기단에 원형의 첨탑을 얹는다면 의심없이 인도식의 典型的(전형적) 기법이다.
  그런데 그 기단에 새겨진 기둥모습은 코린트이사, 기둥만을 떼어서 생각한다면 그것은 제우스의 신전을 연상시킨다. 이와 같은 기법은 씨르카프에서 뿐만 아니라 스캇트 부근의 부트카라(Butkara)사원등에서도 볼 수 있어서 이 당시의 일반적 조형기법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동과 서는 이렇게 서로를 이해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해왔다.


이곳을 찾은 한국인들

  한국인으로서 이곳에 관한 견문기록을 남긴 이로는 慧超(혜초)가 있다. 그는 ‘往五天竺國傳(왕오천축국전)’을 남겨서 이 일대의 풍물을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혜초스님이외에도 이리야발마 慧業(혜업) 등 숱한 신라스님들이 이곳을 답사하였다. 그들 중 대부분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異域(이역)에서 世俗(세속)의 인연을 다 하였다.
  우리 선조들이 인도대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불교 때문이었다. 불교를 배우면서, 그 고마움을 느꼈고 불교의 고향을 찾으려는 願力(원력)을 품었던 것은 人之常情(인지상정)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촉과 맹수가 곳곳에 도사린 天竺(천축)을 찾는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목숨을 건 여행이었을 것이다. 대략 뱃길로는 6개월, 육로로는 2년 남짓이 걸려서 이들은 天竺(천축)에 닿을 수 있었다.
  혜초는 인도의 남쪽에서부터 거슬러와서 이곳을 답사하였다. 폐샤와르를 비롯하여 카불에 이르기까지 그는 당시의 풍물과 인심을 소상히 기록하였다. 비록 玄裝(현장)의 ‘大唐西域記(대당서역기)’와 비교할 때 史料的(사료적) 가치는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객관적인 記述(기술)내용과 신빙도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그 옛날 求法僧(구법승)들은 ‘새도 날기 힘든’ 泰山(태산)준령과 ‘다람쥐도 넘나들기 어려운’ 벼랑길을 따라서 이 일대를 답사하였다. 이미 그가 방문했던 9세기초반만 해도, 이 일대의 불교문화는 황폐해 가고 있었다. 그보다도 더욱 한심스러운 일은 그들의 메마른 가슴들이 이미 불교문화를 망각의 늪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우리는 혜초가 걸었을 그 길을 따라 간다라를 더듬으면서 초없는 감회를 느껴본다.
  죽고 죽여야 하는 인간생멸의 無常性(무상성), 그리고 이천년의 세월을 말없이 견뎌온 佛像(불상)의 주름진 미소를 지긋이 음미해 본다. 지금 이곳의 주인들도 역시 불교문화의 이방인들이다. 이곳의 불교문화 보존상태가 만족하지 못한 것은 반드시 예산상의 문제만은 아닌 줄 안다. 信心(신심)없는 이들 틈 속에서 단순히 ‘진열의 의미’ 밖에 없는 佛頭(불두)들이 자주 처량하게만 느껴진다. 千年(천년)넘은 恨(한)을 가졌을 관세음보살상을 향해 두 손을 모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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