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어떤 대학도서관에는 등불이 하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미 실용적 기능은 상실된 그 불빛은 대학이 창설된 이래로 지금까지 한번도 꺼져본 적이 없다고 한다. 한번 생각해보자. 전기가 발명되지 않았던 중세 말기부터 한 도시 전체를 밝히고도 남을 거대한 발전소가 들어선 현재까지 그 등불이 밝힌 어둠침침한 회랑과 서가의 곳곳을.
  르네상스시대, 말살당한 진리를 되찾기 위해 고민했던 인문주의자의 발걸음도 인도했을 것이고, 커다란 국난이 있을 적마다 학문이 핍박받던 시대에도 올바른 길을 가고자 했던 많은 선각자들의 책장 사이에도 스며들어 그들의 용기있는 결단과 행동도 재촉했을 것이다. 문득 생각해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 같은 그 끈질긴 등불의 생명력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한평생 등불에 기름을 대준 충실한 불빛지기가 떠오르거나 밝은 형광등 아래서 공부해도 좋을 걸 정말 우직하기도 하단 느낌도 든다. 그러나 그런 등불 아래서 오늘날의 찬란한 서구문명을 창조했고 계승했던 그들의 지칠 줄 모르는 정신력에 새삼 고개 숙여지기도 한다.
  서양사의 몇 페이지만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대지식인들이 얼마나 어렵게 자신들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렸던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비약적인 과학문명의 발전을 있게 한, 수많은 예술가와 예술작품을 지탱해준, 神(신)과 正義(정의)의 문제에 해결의 실마리를 던져준 위대한 선각들의 삶을 지킨 이 모든 힘 앞에 우리 스스로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을 하던지 간에 은근히 끈기있게 밀고 나가는 힘이 최상이다. 황소는 걸어도 千里(천리)요, 토끼는 뛰어봤자 十里(십리)란 속담도 아마 이런 생각에서 구전된 말일 것이다.
  예로부터 학문에 대한 경구는 무수히 많았다. 東洋(동양)을 보자. 螢雪之功(형설지공)이란 말이 있다. 전국시대 유명한 변설가였던 吳起(오기)는 아내를 옆구리에 끼고 있으면서도 책만은 놓지 않았다고 하고, 조선시대 유학자였던 金守溫(김수온) 같은 분은 책을 베개 삼아 살았다고 한다.
  책 속에 재산이 있고 권세가 있다는 다소 실리적인 勸學文(권학문)도 있다. 이 모든 말이 꾸준한 연마의 태도를 권장하는 이야기들이다. 西洋(서양)을 보더라도 아르키메데스는 수학문제를 풀고 있는 자신을 방해한 적군병사와 말다툼 끝에 칼에 맞아 죽었고, 뉴우턴은 독서삼매에 빠져 달걀을 끊인다고 시계를 집어넣었다는 일화도 있다. 밀턴은 失明(실명)을 했으면서도 딸에게 구술시켜 ‘失樂園(실낙원)’을 집필했다고 한다.
  삼백년을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는 등불을 지탱시켜 준 그 힘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해주는 일이다.
  서구적인 의미에서 우리 학문이 제 궤도에 오른 지는 이제 고작 30년 안팎이 된다. 3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서구에 비했을 때 아직 걸음마도 디디지 못한 여리디여린 상태다.
  우리를 떠받들어 준 탄탄한 學風(학풍)이 일제의 강점으로 말미암아 맥이 끊어진 현실에서 안타까운 일이다. 더구나 지금처럼 끊임없이 민족적인 시련과 신산이 계속되는 시기에 모든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부지런히 학문적인 풍토의 진작에 힘써야 할 때가 이 시점이 아닌가 여겨진다. 삶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려는 사람에게는 어떤 堯舜時節(요순시절)도 고통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굳이 그 어려운 환경을 인위적으로 더욱 어렵게 만들어 이제 갓 싹트기 시작한 학구의욕을 말살하려는 행위가 만연한다면 더욱 큰일일 것이다. 역사상 어떤 권력이고 지식인을 가해한 사람들이 잘된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 미국의 독립전쟁이나 프랑스혁명, 그리고 가깝게는 히틀러나 무솔리니와 같은 독재자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최후는 항상 죽음이 있을 뿐이었다.
  더 좋은 실례를 우리는 바로 얼마 전에도 목격한 바 있다.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
  머지않아 9월이 오면 우리나라에서 아시안 게임이 치러진다고 한다. 그래서 이 행사를 성대하게 거행하기 위해 이 기간인 약 보름간 일부 학교를 휴업시킨다고 한다. 언뜻 타당한 것 같으면서도 너무나 무서운 소식이다.
  도대체 그와 같은 해괴한 발상을 한 이가 누구인지 의심스럽다. 우리는 지난주 이틀 동안 3시간 가까이 교수회관을 비롯한 도서관 건물에 전기가 나가 수업에 지장을 받은 일이 있다. 사방에 멀쩡히 전기가 들어온 마당에 하필이면 학생들이 학업에 열중해야 할 도서관에만 불이 나간 데에는 그만한 사건의 단초가 있었을 것이다. 3시간은 극히 짧은 시간일지 모르지만 천여명의 학생들이 놓쳐버린 3시간은 여러 면에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하물며 부지런히 공부해야 할 보름이라는 시간을 수만명의 학생에게서 빼앗아 간다면 어떻게 될까. 가공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교육은 백년대계요,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 일이라 했다.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오늘날의 사회현실이 안타깝기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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