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말이 요즘처럼 실감나는 때도 없다. 봄이 왔건만, 도무지 봄 같지 않다. 예년 같으면 캠퍼스 곳곳마다 온갖 꽃들이 앞을 다투며 피어나 설레는 봄의 향연을 맛볼 수 있었지만, 드문드문 핀 꽃들은 봄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봄은 아직인데  ‘벌써 4월인가’하며 허무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봄 향기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곳, 빠르게 지나가는 일상생활에 지친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곳이 있다. 그 곳은 바로 길상사를 향해 걸어가는 ‘성북동 순례(巡禮)길’이다. 볼거리와 생각 거리를 모두 안겨주는 ‘성북동 순례길’ 위에 발을 올려 놓아보자. 

참 나를 찾아 떠나는 길, 성북동 순례길
‘순례’란 종교상의 성지나 영장(靈場)을 찾아다니면서 참배하는 여행을 의미함과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가치와 삶의 새로운 의미를 찾는 여정을 뜻한다. 일본의 작은 섬 시코쿠에는 자신의 삶을 성찰하며 88개의 절을 걸어서 순례할 수 있는 ‘오헨로(お遍路)’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오헨로’와 같이 1200㎞에 달하는 긴 거리는 아니지만, 성북동에는 세속적인 가치를 좇으며 아등바등 살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기에는 충분한, 아름다운 길이 길상사를 향해 고즈넉하게 펼쳐져 있다. 길상사가 자리 잡은 성북동은 크고 작은 이야기들을 가득 안고 있어 절을 향해 가는 도중이 즐겁다.

꼿꼿했던 만해스님의 자취 서린 심우장에서 나를 찾다
법정 스님이 삶의 끝자락에서 머물렀던 서울 성북동 길상사까지 가는 순례길은 유려한 곡선이다. 지하철 4호선 한성대 입구 역에서 시작되는 첫 발걸음부터 서울 한복판에 이런 골목길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꼬불꼬불해 찾아가는 재미가 있다. 길상사까지 가는 길에는 사연이 있는 고택이 있다. 이는 바로 우리대학의 전신인 명진학교 1회 졸업생이었던 만해(卍海) 한용운이 한때 기거하며 원고를 썼던 ‘심우장(尋牛莊)’이다. 성북동 돌계단을 가파르게 올라가면 멋지게 휘어진 소나무가 있는 집이 보이는데, 그 곳이 바로 심우장이다.

심우장은 남향을 선호하는 한옥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북향집인데 독립 운동가였던 그가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게 되므로 이를 거부하고 반대편 산비탈의 북향터를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당 너머 한 눈에 들어오는 성북동 전경은 놓칠 수 없는 볼거리다. 마당의 향나무는 만해가 손수 심었다고 한다. 그곳에 심어진 목련은 봄을 알려주는 듯 몽우리를 머금고 있었다.

차(茶)와 문학의 향기 어우러진 월북작가 이태준 저택
길상사를 향해 걸어가는 순례길이 힘들다고 느껴질 땐 ‘수정 산방’에 들러 한숨 쉬었다 가는 것이 좋다. 김유정, 정지용 등과 더불어 모더니즘 문학을 이끈 고(故) 이태준 작가의 저택을 개조해 만든 전통 찻집 ‘수연산방’은 짙은 전통차(傳統茶)와 문학의 향기가 진동한다. 조용히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풀벌레 우는 작은 마당과 아담한 한옥이 나타나는데 봄을 나타내듯 진분홍빛의 화려한 진달래가 마당 곳곳에 피어있다. 전통 찻집 ‘수정 산방’ 내에는 삼면이 모두 유리창으로 되어있는 누마루가 있는데,  고 이태준 작가가 글을 쓰거나 친구들을 만났던 곳으로 제일 인기가 좋은 자리이다. 이곳에선 전통차를 즐기며 화사하게 핀 꽃과 초록으로 물든 나무들을 볼 수 있다.

법정스님 떠나신 길상사에도 봄은 어김없이
약 1시간의 순례길 코스를 거쳐 도착한 길상사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소나무 밑에 서 무소유(無所有)를 읽으며 마음을 정리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길상사는 원래 ‘요정정치의 현장’이라 불렸던 대원각이었다. 법정 스님의 대표 산문집 ‘무소유’를 읽고 감명 받은 대원각 소유주 고 김영한 보살이 스님에게 시주, 절을 세워 주기를 청하면서 길상사가 탄생했다고 한다.

법정 스님이 입적한 후 세상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은 이곳은 여전히 아름다운 침묵이 흐르는 사찰로 남아있었다. 봄이 왔음을 제일 먼저 알린다는 의미에서 이름이 유래된 샛노란 빛의 영춘화(迎春花)는 사찰 내 순례길 주변에 곱게 피어 있다. 봄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샛노란 순례 길을 따라 사찰을 맴도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무소유의 평온이 흘렀다. 그들은 발끝의 힘을 빼고 모두 가볍게 날아갈 듯 걷고 있었다.

성북동 순례길에는 이야기가 숨어 있다. 자신을 돌아보는 기쁨과 느림의 미학(美學)을 배울 수 있다. 더불어 따스한 봄의 기운을 눈으로도 즐길 수 있다. 일본 시코쿠의 오헨로 88개의 순례길 못지 않은 성북동 순례길은 지나치게 빠른 일상의 속도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자신의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성찰할 수 있는 가르침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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