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인이 일궈낸 ‘4월 민주주의’

1955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출마한 신익희 선생이 자유당 독재와 싸우다가 원인모를 사인으로 서거하시어 온 국민이 울분으로 개탄하던 적이 있었다. 또 1960년에는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3.15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데모가 마산에서 일어나, 고(故) 김주열군의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수장된 시체가 떠오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4.19혁명은 우리대학이 주도
이에 대한 분노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가던 4월 18일, 우리대학 지하식당에서 3.15 부정선거 규탄 대책 회의가 진행되던 중에 ‘고대생들이 구속학생 석방과 학원의 자유를 달라며 현 시청 근처에 위치했던 국회 앞까지 데모를 하다가 유진호 박사와 이철승 국회의원 등 선배들의 만류로 귀교하던 길에 천일백화점(현 청계천4가) 앞에서 정치깡패들에게 테러를 당했다’는 방송이 터져 나왔다. 이날 오후, 우리대학의 59학번을 중심으로 30여명이 동참하여 4월 19일, 3.15부정선거 규탄대회에 앞장서기로 다짐하였다.

4천여 동대생 경무대 앞서 시위
1960년 4월 19일 오전9시 우리 대학 농학과 2학년 40~50여명은 농장실습을 포기하고 농학과 대의원 김창배, 심재익 등이 주도하여 동국대학교의 이름이 적힌 붉은 현수막을 앞세우고 4.19민주혁명 대열에 스크럼을 짜고 앞장서게 되었다.

동국의 4천여 건아들은 선발대로 2천여 명이 교정에 운집하여 본 대학 교문을 바리케이드로 중부경찰서 무장경관들과 대치했으나, 짱돌과 육탄으로 돌파했다. 노도와 같이 교문을 박차고 을지로입구 내무부(현 외환은행) 앞에서 “3.15 부정선거 다시 하라”라고 구호를 외치며 시청 앞을 돌았다.

동국대 학생들은 경무대, 즉 지금의 청와대로 돌진하여 중앙청을 돌아 해무청(현 통의동 종합청사) 앞에 도착해보니 수백 명의 무장경관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붉은 물감을 탄 불자동차를 대기해 놓고 최루탄과 붉은 물대포를 우리 동국의 4.19혁명 대열에 쏘아댔다.

하지만 용맹스러운 우리 동국의 4.19혁명 대열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대형 수도관을 굴리고 최루탄을 주워 다시 던지면서 효자동 종점 운전기사가 두고 간 전차를 밀어 전진하며 경무대 앞 바리케이드를 제쳤다.

그러자 경무대 앞의 무장한 군경들이 무자비하게 총탄을 쏘아 최초로 우리대학 법과 3학년 고 노희두 동지가 장렬하게 쓰러지고 수십 명의 피를 흘린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3.1당 뒤로 부상자들을 부축하여 목숨을 내걸고 방탄조끼가 된 우리대학의 4.19학생 민주혁명 주역에 본인도 한 사람이다.  세계역사에 길이 빛날, 목숨을 걸었던  4.19민주학생혁명에 본인을 포함한 동국대학교 4.19혁명 동지들은 이렇게 적극적으로 4.19민주혁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노희두 군 등 수십명 총탄세례
피를 본 동국의 4.19혁명 동지들은 경무대 앞에서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하다가 부상당한 농학과 59학번 박흥규, 이종학 등을 들쳐 업고 3.1당 뒤로 피신하면서 “이승만 독재정권 하야하라” “3.15부정선거 다시 하라”라고 외쳤다. 표주동 뒷골목에서 이제 3.15부정선거의 원흉인 이기붕 국회의장 집을 쳐부수러 가자고 외치며 광화문에서 서소문으로 해서 서대문 로터리를 돌아 적십자병원 옆의 이기붕 집 앞에 도착하니 이미 선발대에 의하여 이기붕의 집은 점거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동국의 4.19혁명대열은 “이기붕 일가는 자폭하고 3.15부정선거 다시 하자”고 구호를 외치면서 다시 광화문 종로 1, 2, 3, 4, 5가를 질서 정연하게 민주시민들의 궐기를 위한 시가행진을 하였다.  이때 서울 장안의 학생과 시민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흥분의 도가니가 되어 이미 계엄령이 선포 되었으며 4.19민주학생혁명은 군, 관, 민들의 지지가 절대적이었다. 이렇게 시위를 하며 서울 운동장에 도착하니 석양 무렵이 되었고, 동국의 4.19혁명대열은 일단 해산하였다.


동우탑 세우고 소중한 뜻 기려
4월 25일, 대학교수들의 4.19학생 혁명지지 성명과 동국대 김영달 교수의 발의로 이날 3백여 명의 대학교수들의 시위에 학생과 시민들도 합류하였다. 그리고 26일에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고, 이기붕 일가는 아들 이강석에 의해 자살하였으며, 전 내무부장관 최인규는 사형 당하고 말았다.  27일에는 시민들의 안녕과 질서 유지를 위해 과도 정부의 허정 내각수반과 송요찬 계엄사령관의 요청에 따라 우리대학이 시경과 종로경찰서를 담당하게 됐다.

이에 동국대학교 선도부가 중심이 되어 거리질서 확립과 시민들의 치안유지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됐다.  그리고 29일, 모든 대학들이 개강하면서 동국의 4.19혁명 동지들도 학생 본연의 자세로 돌아와 학업에 열중하였다.

그 후 4.19혁명 정신을 후배들에게 계승시키기 위하여 우리대학에 ‘동우탑’을 세워 매년 4.19민주학생혁명 기념일에는 고(故) 노희두 동지의 추도식을 거행하고, 4.19혁명 기념 등산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또한 본인은 1999년 10월 19일에 동국대학교 4.19혁명 동지회를 창립하여 동국의 4.19혁명 정신을 재조명하고 2003년 12월 19일, 역사적인 ‘동국대학교 4.19혁명사’를 편집인으로서 출판하였다.

숭고한 혁명정신계승사업 절실
고(故) 노희두 동지의 동상을 동우탑 앞에 세우고, 이제 4.19혁명 50주년 기념일에 정부에서 4.19혁명 공로훈장 건국포장을 전국에 289명 가운데 동국대학교에 35명이 수여 받게 된다. 

본인은 지난 2004년 1월 29일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국가보훈처장과 본 대학 4.19혁명동지 회장단의 대담에서 ‘동국대학교 4.19혁명사’ 12쪽에 실린 화보사진에 대해 설명하고, 국가보훈처장에게 4.19혁명의 주역은 동국대 학생이라는 내용의 건의서를 제출한 바 있다. 앞으로 4.19혁명사를 재조명하여 후배들에게 4.19혁명정신을 계승시키기 위해서는 관련 내용의 영상미디어가 만들어져야 하고 4.19혁명 기념 등산대회를 북한산에서 백두산과 한라산 그리고 금강산에 이르기까지 확대실시해야 한다.

또한 전국 초, 중, 고, 대학생들의 4.19혁명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웅변대회를 본 대학 총장과 국회의장 그리고 대통령 봉황기를 걸고 개최해야 하고 넷째로, 우리나라에 민주주의를 토착화시키기 위해 세미나와 포럼 등을 통해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와 시장경제를 이룩하여 선진국 대열에 우뚝 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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