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독재의 검열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동대신문

동국월보와 동대신문
1947년 가을, 박종선, 정익용 등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신문창간 준비가 이뤄졌다. 타블로이드 4면 ‘동국월보’의 창간이 그것이다.

그러나 게재된 몇 편의 논문이 정치적으로 불순하다는 점과 정 동문이 쓴 교수 프로필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배부되지도 못한 채 압수처분을 당하게 된다.

당시 전국 38개 대학 중 최초의 대학신문이 될 수 있었지만 문학부내에서 만들어져 완전한 신문의 형태로 보기는 힘들다.

지금까지 창간호라 이름 붙여진 신문은 1950년 4월 15일 당시 중앙학생회 회장이었던 신국주와 이외윤, 박내춘, 이종한, 오봉열 등 신문 동호인들이 유산되고 만 ‘동국월보’의 뒤를 이어 만든 대판 4면의 동대신문이다.

창간호를 내기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었듯 동대신문이 걸어온 길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해방 직후 봇물 터지듯 급격히 증가한 좌우익 사상의 혼란과 그로 인한 좌익사상에 대한 탄압은 교육의 현장에서도 가시화됐고 사상이 아닌 사실보도에서 조차 자유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전쟁 중 만든 제 2호
1950년 6월 동대신문 제 2호 조판 중 6.25 전쟁이 발발한다. 결국 본지 2호는 피난지인 부산에서 1952년 6월 발간하게 되지만 조연현 동문의 ‘동국대학과 나’라는 글이 학교의 명예를 훼손시킨다는 이유로 보일러실에서 불태워지고 만다.

동대신문은 그해 10월 1일 발행된 타블로이드 4면 ‘동국월보’로 간신히 명맥을 잇는다.
이 신문 역시 1면에 게재된 이형기의 논문과 학장의 격려사 이종출의 ‘경사진 항구’라는 시가 말썽이 되어 중단되고 11월 20일 발행된 동대신문이 실질적인 2호가 된다. 결국 환도 후 1953년 4월부터 양주동 교수의 지도하에 3호가 속간되면서 동대신문은 기반을 다지게 된다.

한편 동국월보는 1955년 7월 7일자로 ‘동대신보’로 제호가 바뀌고 같은 해 9월 5일 ‘동대시보’로 제호를 변경한다. 현재의 동대신문이라는 제호는 200호(1962년 7월 12일자 )부터 쓰이게 된다.

깨져가는 운동장의 꿈
5.16 군사쿠데타 이후 장충단 쪽에 느닷없이 중앙공무원교육원이 착공됐다. 운동장이 없어 발전하지 못하고 있던 우리대학으로서는 그야말로 절망적인 소식이었다. 중앙도서관 남쪽 장충단 공원에 운동장을 설치하는 게 당시 학생들의 유일한 꿈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꿈의 자리에 정부가 중앙공무원 교육원 건물을 착공한다는 것은 전교생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동대신문사 기자들이 밤 새워 만든 동대신문 호외가 아침 일찍 뿌려지며 전교생이 데모를 벌이게 된다.
이렇게 태어나게 된 동대신문의 호외는 대학신문 사상 최초의 호외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 지어진 건물이 후에 본교가 인수한 혜화관이다.

검열 속 빛난 재치
1964년 4월 24일자에 4.21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와 관련하여 ‘다시 이 거리에 피를 뿌리다니’ 기사와 함께 실린 사진 3장이 문제돼 학교당국은 신문을 압수, 소각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해 8월 7일 6.3 사태로 비상계엄이 내려지고 계엄군이 대학에 진주한다.

동대신문도 어김없이 전면적 검열을 받게 된다. 그 당시 ‘필동고지’라는 표현으로 우리의 캠퍼스가 군인들에게 점령당했음을 알리기도 한다. 결국 7월 30일 계엄령이 해제된 바로 다음날의 사건을 본지 회전무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사 일행, 공갈협박차 내교’라는 제목으로 ‘데모가 다시 일어나면 계엄령을 10년 선포하여 뿌리를 뽑겠다’ ‘xxx들 다시 데모하면 총살을 시키겠다는 등의 내용이 올랐던 것이다. 신문은 여지 없이 소각처분 된다.

이렇듯 재치와 함께 어떠한 탄압에도 사그라지지 않는 빛이 돼 공정함과 비판적 사명감으로 대학의 주체를 이끌어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상초유의 853.4호
80년대 초반에는 국가정보기관원들이 대학본관 한 편에 사무실을 갖고 있었고 학생 대표로는 ‘호국단’이라는 유신정권의 산물이 존재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대학언론 역시 자유롭지 못했다. 제 5공화국 초기에는 유신시절과 마찬가지로 사전 검열을 받아야만 했으니 ‘전두환’의 ‘전’자만 실려도 배포중지가 될 정도였다.

본지 765호 (80년 5월 13일자) 12면에 실린 ‘유신독재 반대 각계 시국선언문’은 주요 내용이 삭제된 채 허연 여백을 남기며 게재된다. 이런 신문을 벽돌신문이라 하는데 80년대의 암울한 시대상황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또한 이 당시에는 4.19나 5.16, 삼청교육대, 군사정권 이라는 단어를 신문에 담기위해 현역 기자들의 투쟁이 필요했고 이는 853.4호라는 이상한 지령의 신문으로 나타났다. 4.19 기념호로 발간예정이었던 853호 동대신문은 당시 쓰지 못했던 시위기사와 4.19의 민주정신을 기리는 동우탑 추모행사, 4.19와 관련된 사설이 문제돼 배포 금지를 당한 것이다.

신문을 실어 나르는 과정에서 학내에 상주하고 있던 기관원에게 신문을 모두 빼앗겼고 영구 보존을 위해 500부를 학우들에게 돌릴 500부를 포함에 총 1000부를 간신히 빼돌렸다. 그리고 그 다음 호 신문을 만들면서 853호를 인정하지 않는 학교 당국과 비록 많이 배포되진 못했지만 호수로는 인정해야 한다는 학생기자들이 치열하게 싸운 결과 853.4호라는 기형의 지령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또 1982년 6월 1일자 회전무대에는 ‘…과연 학생치곤 나이가 너무 드신 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던 것. 더운 날씨에 수고(?)하시는 그분들에게…’ ‘소요사태를 전투경찰이 학내에 들어와 강제해산시키는 것도 불만이 학형들 왈 법보다 주먹이 먼접니까?’라는 내용이 실린다. 그리고 당연히 배포가 중단된다.

1984년 9월 본사 기자들은 백상체전 초청강연회 요지를 게재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백기완, 고은, 여익구가 초청인사라는 이유만으로 거절당한다. 이로 인해 학교당국과 마찰을 빚게 돼 농성을 시작으로 2주 휴간에 이른다. 대학 내에서나마 언론의 자유를 갈망했던 기자들의 싸움으로 결국 2주 후 고은시인의 강연초록만 싣는데 절충적 합의를 본다. 이 사건은 민주를 외치면서도 민주를 싫어했던 이들의 손길이 학내까지 자연스럽게 뻗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소나기 사건
1996년 8월 연세대에 벌어진 제7차 범민족대회가 폭력으로 얼룩지고 이로 인해 제 6기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 이적규정을 받게 되면서 대학언론에 대한 정부의 탄압도 강도를 더해간다.

문민정부로 정권이 바뀌긴 하였지만 국가보안법이 버티고 있는 한 ‘북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자유롭지만은 않았다.

‘소나기’는 시사적인 문제에 대해 학생들의 생각을 여과없이 싣는 낙서판이다. 당시 1210호(1996년 10월 7일자) 소나기는 ‘무장간첩 침투사건’에 대해 다뤘고 그 내용에 대해 당국은 이적성의 혐의가 있다고 판단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당시 편집장과 관련기자 1명을 구속했으며 이로 인해 약 한 달동안 신문발행이 되지 않았다.

소나기 사건과 관련해 기성언론들은 “맹목적으로 북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며 “이들을 색출해 사회에서 격리토록 해야 한다”는 강경한 논조를 내세우기도 했으며 ‘대학당국은 이번 일을 책임지고 대학신문의 편집방향과 내용에 대한 지도감독을 강화해야 한다’며 당국에 편승한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
한편 일부에서는 “기성 언론의 매카시적 편파보도의 경찰 상부의 추궁에 의한 건수 올리기 식 표적 수사”라며 기자의 석방을 촉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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