求法意志(구법의지)의 숨결 간직

韓國佛敎美術(한국불교미술)의 原流(원류)

  간다라는 佛敎美術的(불교미술적)인 측면에서 너무도 잘 알려진 지역이다. 불교미술이 釋尊(석존)의 入滅(입멸)후 얼마 되지 않아 발생되었었지만 인도의 불교인들은 釋尊(석존)의 모습을 직접 그리거나 조각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했었기 때문에 佛滅(불멸)후 약 4백년동안은 釋尊(석존)이 등장하는 장면을 묘사함에 있어서 釋尊(석존) 대신 塔(탑)이나 菩提樹(보리수) 또는 蓮花坐台(연화좌태)나 足跡(족적) 등으로 상징시켰었다.
  그러다가 이 간다라 지역은 알렉산더大王(대왕)의 침입에 따라 그리이스의 문화가 소개되었는바 그리이스의 문화 중에서도 특히 神像(신상)조각의 문화가 이 지방사람들을 자극하게 된다. 겸하여 이 지역에서는 靑味(청미)가 도는 黑灰色(흑회색)의 이른바 간다아라石(석)이 出土(출토)되고 있어서, 이러한 조건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드디어 佛像(불상)조각이 발생되고 이 佛像(불상)조각은 그 이후 佛敎美術(불교미술)의 主宗(주종)을 이루면서 발전되었었다.
  이러한 간다라 佛敎美術(불교미술)의 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한 것을 次日(차일)로 미루고 싶은 것은 간다라의 불교미술이 불교의 전파에 따라 중국으로 전하여져서 중국불교미술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이것은 우리나라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나라 불교미술의 原流(원류)도 바로 이 간다라의 불교미술인 것이다.


佛敎東漸(불교동점)의 길목

  인도와 중국 간의 교통로로는 육로와 해로의 두 가지가 있었다. 해로는 육로보다 늦게 열려 8세기 이후의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求法僧(구법승)들이 많이 이용했었으나 불교와 불교문화가 중국으로 전하여지는 주경로로는 육로에 도저히 미칠 수가 없었다.
  육로는 서기전 1세기경부터 열리기 시작하였는데, 인도에서 중국에 이르는 데는 크게 두 갈래가 있었다.
  어느 길을 택하건 세계 최고의 泰山(태산)준령을 넘어야하는 험준하기 이를 데 없는 길이면서 어느 길을 택하건 반드시 간다라를 경유하지 않으면 안되었었다.


求法僧(구법승)의 발자취

  1세기경 중국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힌두쿠슈山脈(산맥)으로 해서인지 또는 카라코름山脈(산맥)쪽으로 해서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여하간 이 陸路(육로)를 통해서이었다. 그 이후 十(십)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약 九白年間(구백년간) 수많은 인도의 스님들이 이 길을 통해 중국으로 넘어왔고 또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더 많은 수의 중국 스님들과 많은 우리나라의 스님들이 이 길을 따라 인도로 求法(구법)의 意志(의지)를 불태웠다.
  워낙 험난한 길이었기에 많은 求法僧(구법승) 등은 혹은 도중에 포기하기도 하고 혹은 도중에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이슬로 사라지기도 하고 혹은 인도까지는 무사히 도착하였으나 되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여생을 마치기도 하였다. 求法(구법)의 뜻을 이루고 무사히 되돌아온 스님들 중 紀行文(기행문)을 남김으로서 후세에 그 이름을 영원히 남긴 이는 중국 東晋(동진)의 法顯(법현)과 唐(당)의 玄裝(현장), 그리고 우리 新羅(신라)의 慧超(혜초) 세분이었다.
  이들의 紀行文(기행문) 즉 法顯(법현)의 法顯專(법현전)(一名(일명) 佛國記(불국기)), 玄裝(현장)의 大唐西域記(대당서역기), 慧超(혜초)의 往五天竺國傳(왕오천축국전)에 의하여 이들은 모두 간다라지방을 거쳤고 이 지방에 대해 비교적 소상하게 언급하고 있다. 간다라 지방은 바로 이런 분들의 발자취를 찾아볼 수 있고 그분들의 求法(구법)의 意志(의지)와 숨결이 아직도 남아 있는 곳이다.


佛敎(불교)의 中心地(중심지)

  간다라 지방의 광활한 토지에다 溫暖(온난)하고 교통의 요충지여서 옛부터 異民族(이민족)의 침입이 잦았던 곳이다.
  그런 가운데 一(일)세기말 月氏族(월씨족)의 침입은 이 지방이 불교의 中心地(중심지)가 되게 한 계기가 되었었다. 본래 이 지방은 서기전 三(삼)세기 護佛王(호불왕) 아쇼카에 의해 불교가 전해졌었다. 法顯專(법현전)에 의하면 이 지방은 아쇼카王(왕)의 아들 다르마바르다나(法益(법익))가 統治(통치)했었다고 하며 도처에 아쇼카王(왕)이 세운 塔(탑)들이 아직도 있다.
  그러나 이 지방이 불교의 中心地(중심지)가 된 것은 二(이)세기경 大月紅國(대월홍국 )쿠산 王朝(왕조)의 카니슈카王(왕)이 왕위에 오른 뒤부터이다. 그는 아쇼카王(왕)에 결코 못지않은 護佛王(호불왕)으로 도처에 寺塔(사탑)을 세우고 승려들을 우대했으며 불교의 자비정신에 입각하여 統治(통치)했었기 때문에 간다라지방은 단연 세계불교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이다.
  大唐西域記(대당서역기)에서 玄裝(현장)이 이 지방의 寺院大(사원대)가 千餘個所(천여개소)나 된다고(玄裝(현장) 당시는 다 황폐했었지만) 한 것이라든지, 간다라의 한 지방인 스와트의 불교에 대해 往五天竺國傳(왕오천축국전)에서 慧超(혜초)가 절도 많고 승려도 많은데 승려의 수가 俗人(속인)의 수보다도 많다고 한 것 등을 보면 이 지역의 불교가 어느 정도 융성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大月氏國(대월씨국)의 版圖(판도)가 카니슈카王(왕)때 가장 넓어서 북으로는 파미르高原(고원) 북쪽의 康居(강거), 서로는 지금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의 일부, 동으로는 카슈미르와 카라코름산맥까지가 그 영토이었기 때문에 인도에서 중국에 이르는 이른바 西域(서역)의 諸國(제국)이 전부 카니슈카王(왕)에 의해 불교가 興隆(흥륭)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곧 중국으로 불교와 불교문화가 물밀 듯 들어오게 된 가장 큰 조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카니슈카王(왕)의 護佛(호불)과 불교적인 治積(치적)과 함께 우리는 많은 大佛敎學者(대불교학자)들이 이 간다라지방 출신이고 이 지역의 寺院(사원)에서 불후의 著作活動(저작활동)을 했었음을 주지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중 아상가(無着(무착))는 大乘佛敎(대승불교) 敎學(교학)의 大家(대가)로서 유명한 顯揚聖敎論(현양성교론), 大乘阿毘達磨集論(대승아비달마집론), 攝大乘論(섭대승론), 瑜伽師地論(유가사지론) 등의 저서를 남겼고, 그의 아우인 바스반두(世親(세친))는 俱舍論(구사론), 十地經論(십지경론), 唯識論頌(유식론송), 佛性論(불성론) 등 千部論師(천부논사)란 별명을 들을 정도로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그 이외에도 雜阿毘曇心論(잡아비담심론), 五事毘婆沙論(오사비바사론)의 저자인 달마다라(法救(법구)) 異部宗輕論(이부종경론)을 지은 바수미트라(世友(세우)) 世友(세우)와 함께 카슈미르에서의 佛典結集時(불전결집시)에 五白比丘(오백비구)들의 대표이었던 파르슈바(脇(협)) 등이 稀代(희대)의 學者(학자)요 高僧(고승)들이 이 지방 출신이면서 이 지방의 寺院(사원)에서 저술활동을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간다라의 불교가 당시 세계불교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은 이러한 人物(인물)들의 활동과 카니슈카王(왕)의 護佛(호불)과 불교적인 治積(치적)이 相乘作用(상승작용)을 한 결과라고 단정할 수 있다. 그리하여 만약 카니슈카王(왕)과 그러한 大學僧(대학승)들의 出現(출현)이 없었고, 간다라지방의 불교가 세계불교의 센터가 되지 못하였었다면 과연 훗날 중국의 불교가 그렇게 풍요로울 수 있었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마저 해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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