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학 중 최연소 判事(판사)로 법조생활 시작

본지에서는 東國人(동국인)의 자랑스런 긍지를 되새기고자 이번 호부터 동문들의 글을 실은 동문칼럼란 ‘東岳路(동악로)’를 새로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편집자 註(주)>

  내가 母校(모교)와 첫 因緣(인연)을 맺은 것은 지금부터 32년 전인 1953년 3월 釜山(부산) 新昌洞(신창동)에 있던 避難假校舍(피난가교사)시절이었다. 東國大學(동국대학)에서 東國大學校(동국대학교)로 승격한 바로 직후였다. 고향에서의 고등학교 시설보다 훨씬 못한 절칸의 지하실에 베니아판으로 칸막이를 하여 지저분한 좁은 공간에서의 강의를 듣는다고 좁은 나무 의자에 쪼그려 앉아있으면 한심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戰時下(전시하)에서 戰線(전선)에 나가지 않고 後方(후방)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는 행복감으로 이러한 불편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교수님들의 강의나 학생들의 수강태도는 자못 진지하였다. 申泰煥(신태환)교수의 經濟原論(경제원론), 後(후)에 모교 총장을 하신 徐燉珏(서돈각)교수의 商法講義(상법강의), 金箕斗(김기두)교수의 刑訴法(형소법), 曺佐鎬(조좌호)교수의 文化史(문화사) 등이 大人氣(대인기)였다.
  특히 徐(서)교수님의 오후 시간에는 졸림을 참느라고 눈을 부릅뜨고 들었던 시간이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제1학기를 마치고 나서는 서울환도를 하게 되어 서울 筆洞(필동)의 현재 敎舍地(교사지)에서 講義(강의)가 시작되었다. 현재의 시설과는 전혀 다르다. 입구에 皇建門(황건문)이 있고, 올라가서 崇政殿(숭정전)이 제일 강의실이었으며. 그 주변에 역시 판자가 건물로 된 강의실이 마련되어 가건물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그러나 터도 넓고, 아래쪽을 내려다보면 鐘路(종로), 乙支路(을지로) 등 서울 한복판이 한 눈에 들어오는 景觀(경관)이 있는 南山(남산) 숲속이라서 釜山(부산)의 교사에 비하면 宮殿(궁전)이랄 수 있어 면학의 꿈의 키우는 데는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환도하자 白性郁(백성욱)박사께서 총장으로 취임했고 공석 중이던 法政大學長(법정대학장)으로 金甲洙(김갑수)박사가 취임하여 저명 여러 교수님들이 강의도 충실해졌다.
  當時(당시) 법조계 現職(현직)에 계셨던 金政圭(김정규) 安秉洙(안병수) 金洪洙(김홍수) 朱文基先生(주문기선생)들과 安潤山(안윤산) 朴商鎰(박상일)敎授(교수)들의 강의를 충실하게 들으면서 비좁기는 하나 향학분위기에 찼던 中央圖書館(중앙도서관)에서 진지하게 高試準備(고시준비)에 열중했다. 교수님들의 지도로 法學會活動(법학회활동)을 통하여 會誌(회지)도 발간하고 모의재판도 참여했고 방학기간에도 學校(학교)에서 마련한 高試特講(고시특강)도 빠짐없이 들었다.
  그럭저럭 제3학년의 제1학기가 끝날 무렵인 1955년 7월 제7회 高等考試司法科(고등고시사법과)에 원서를 내고 응시를 했는데 운명의 장난이랄까. 선택과목인 刑事訴訟法(형사소송법)의 시험시간을 民訴法時間(민소법시간)으로 잘못알고 시간을 놓쳐 치르지도 못하고 실패 한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마침 그 해 9월에 判檢事特別任用試驗(판검사특별임용시험)이 있다고 해서 이에 응시하기로 했다. 2개월 동안 침식을 잊고 民刑事檢察實務(민형사검찰실무)와 民訴法(민소법)을 익히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1개월간의 在朝現職判檢事(재조현직판검사)로 구성된 강사진의 강좌(金甲洙(김갑수)法政大學長(법정대학장)님의 특별 배려로 마련되었음)도 熱心(열심)히 들었다.
  模擬答案(모의답안)을 바쁘신 중에 일일이 지도해주신 金正圭(김정규)교수님의 노고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러한 준비 끝에 9월의 시험을 치고 다음 해인 1956년 2월에 발표한 합격자 명단에 한 자리를 차지한 후 同年(동년) 9월 광주지방 법원판사로 임명받아 在學中(재학중)에 最年少判事(최연소판사)로서 법조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사실상 제4학년 제1학기로서 학창을 마친 것이므로 모교에서의 3년 반은 기간으로 보면 짧은 세월이나 나의 人生(인생)으로서는 그 進路(진로)를 결정한 꿈의 産室(산실)이었을 뿐 아니라 佛敎思想(불교사상)에 터 잡은 인격형성의 요람으로 일생을 두고 간직할 마음의 고향이었던 것이다. 軍法務官(군법무관)을 거쳐 1960년 2월에 서울 地方法院(지방법원)에 근무하면서부터 미력이나마 후배양성이나 모교발전에 이바지 한답시고 동창회 개원으로서, 모교 강사로서, 한때는 法人(법인)의 監事(감사)로서 뛰어 다니긴 했으나 30年 가까이 지났음에도 자랑할 만한 일이 없음이 미안할 따름이다. 다행히 鄭在哲(정재철)회장님의 주선으로 동창회에서 考試獎學基金(고시장학기금)도 다소 각출이 되어있고, 또한 朴桂山(박계산)여사의 篤志(독지)로 마련된 考試學舍(고시학사)도 의젓하게 마련되어 있으니, 이를 기초로 금후로는 보다 훌륭한 東國人(동국인)이 배출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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