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重(자중)각서 요구한 당국의 지시를 보고

  지난달 17일 학원안정법반대성명을 낸 在京(재경) 대학교수 15명에게 自重覺書(자중각서)를 요구하는 사태가 있었다. 특히 이 사건은 學內(학내)에서의 교권실추의 직접적인 원인이기도 하며 날로 침체되어가는 교권의 확립에 어두운 전망을 준 사건이기도 하다. 이에 本橋(본교)는 교권실추의 원인을 찾아 교권확립에 一步(일보)전진이 되길 원하며 게재의 의의를 둔다.
<편집자 註>

  대학을 ‘반지성 급진주의’로 규정짓고 대학내의 이념적 행동은 용공·좌경화를 실천하는 행동요원으로 평가하는 것이 오늘날의 대학 현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反知性(반지성) 급진주의’가 대학 저변에 깔려있다는 것을 누구든 확고히 믿게 되고, 大學生(대학생) 모두가 이 같은 급진의식화에 용해돼있다고 여기는 것이 오늘날 大學(대학)을 보는 일반적 추세이다. 더욱이 일반 매스컴들의 左傾化 云云(좌경화 운운)의 보도는 그것이 확고한 大學(대학)의 상징인양 되어버린 것이 또 안타까운 大學人(대학인)의 처지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툭’하면 학생들의 행동에 ‘과격’이란 비난의 화살이 날아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學內(학내) 敎權(교권)추락을 들어 원천적인 ‘師弟(사제)의 道(도)’까지 저해시키려는 움직임이 近日(근일) 비일비재 했다.
  이 같은 사실은 지난달 17일 ‘학원안정법’ 반대성명을 낸 15명의 대학교수에게 자중각서를 요구하는 사건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廣義(광의)의 자유주의를 표방하고 나서는 우리의 政治理念(정치이념)으로 보아 누구에게나 비판의 자유는 반드시 있는 것이다. 그것도 직접 자기와 관련된 현실로서 기본권 침해라고 생각되었을 때 마땅히 이에 대한 응분의 조처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원래 知性(지성)이라 함은 세상의 보편적 진리에도 반대의견이 있을 수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단지 ‘批判(비판)을 위한 批判(비판)’으로 종용하려는 태도가 심히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각서를 요구하는 측에서 ‘집단행동’이라는 명분이외에 교수권위 실추로 인한 學內(학내)의 움직임이나 위화감 등을 모를 리가 없기 때문이다.
  실지로 ‘自重覺書(자중각서)’가 어떤 법률적 구속력을 갖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人格(인격)과 학문적 권위를 갖춘 교수에게 미숙한 피교육자의 지도를 위한 반성문같은 ‘覺書(각서)’를 요구했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는 결국 ‘반대하는 知性(지성)은 知性(지성)이 아니다’라는 절대성의 논리만을 인정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절대성의 논리만을 강조하여 ‘반대하는 사람은 항상 반대한다.’는 式(식)의 일방적 논리를 大學(대학)과 나아가 社會(사회)에까지 적용시키려는 움직임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를 잘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로 행정실무자의 無知(무지)의 판단으로 볼 일이거나 아니면 계획된 학원정책 표방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한편 ‘학원 안정법’이 최근 뜨거운 쟁점으로 부각되어 是是非非(시시비비)한 일이 있은 것도 周知(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15명의 교수가 반대성명을 냈다.
  우리나라의 교수를 줄잡아 3만 명으로 잡는다 해도 15명이라는 숫자는 불과 0.005%의 미약한 숫자이다.
  물론 “서명”이란 확실한 근거로서 각서제출을 요구했다고 하지만 그러면 나머지 99.05%의 대다수 교수들은 ‘학원 안정법’에 대해 찬성하거나 아니면 無感(무감)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인가.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더 이상 거론의 여지는 없겠으나 분명 ‘학원 안정법’이 쟁점이 되어 찬―반 양론이 분분할 때 0.05%의 반대 의견만이 비추어진 것은 아니다. 아무리 완전한 발상이라도 1만분의 5의 ‘분명한 異見(이견)’도 없이 한 쪽만 지원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더구나 ‘학원 안정법’은 일단 입법이 보류된 상태이다. 반대 의견에도 그만한 一理(일리)가 있었고, 결과적으로 그런 一理(일리)까지 수렴된 상태에서 이 같은 사태는 입법 보류의 뒤가 켕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상태에서 만약 0.05%의 숫자가 진짜 반대의견인 것이라면 어느 선거가 자랑하는 “1백% 투표에 1백% 찬성과 다른 것이 무엇이며 0.05%의 반대의견을 무시하고 무시하다 못해 ‘각서’까지 종용하는 우리 처지는 그와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결국 허구적인 학원안정책만을 토로하는 결과밖에 낳지 못했을 분이다. 이 같은 조치로서 정부의 학원에 대한 강경책이 합리화될 수 있고 敎權(교권)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들다”라는 명분상의 이유로 敎權(교권)의 他(타)에 의한 추락은 더욱 첨예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흔히 보도되는 記事(기사)를 보면 학생들의 과격행동에 敎權(교권)이 침체되어 간다는 내용을 볼 수 있다. 폭언·학교기물파손·공무원 감금 등을 들어가며 항시 자중해 주기를 바란다는 해설이 나오고 모든 연석회의를 통해 敎權(교권)확립의 최대 초점을 학생들의 행동에만 두었다.
  물론 ‘師弟(사제)의 道(도)’를 생각해 보면 폭언, 감금과 같은 것은 大學內(대학내)에 감히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에 앞서 前述(전술)한 바와 같이 ‘師弟(사제)의 道(도)’를 云云(운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敎權(교권)을 위축시키는 행위는 획책하는 當局(당국)의 처사가 횡행했던 것도 부인 못할 사실이라 하겠다.
  실제 敎授(교수)가 어떠한 狀況(상황)에 처해 그에 대해 판단했다 해도 침묵을 강요받거나 아예 무감각해져 버리는 경우가 날로 늘어난다면 大學(대학)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즉 이와 같은 小心症(소심증)이 이번과 같은 사태를 유발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능히 가능하다.
  교수는 대학구성의 二大(이대)주체 세력으로 대학과 함께 영구히 존재해야 할 구성요인이다. 교수가 학생을 위한다는 차원에서 침묵만을 고수한다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물론 時代(시대)야 다르지만 4·19 당시 제자와 함께 時局(시국)을 걱정하며 “학생들의 피에 보상하라”던 뜨거운 목소리가 지금은 ‘지도교수’라는 틀에 묶여 싸늘해지기만 한 것 같다.
  지난해 5월 말경 발표된 在京大學(재경대학)총장들의 共同(공동)성명문을 보거나, 근래 大學(대학)의 요청 없이도 경찰을 투입한다는 발표를 보면 大學(대학)은 학생의 것만이 아닌 敎授(교수)들의 것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69년 ‘大學(대학)운영에 관한 입시조치법’을 만들었을 무렵 日本대학에서도 過激(과격)·過熱(과열)된 소요양상을 보였으나 결코 대학문제에 대해 정부의 개입이나 이에 대한 立法(입법)을 대학자체에서는 끝까지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당시 ‘가또’(東京大(동경대))총장은 “大學立法(대학입법)이 성립되면 대학은 망한다.”는 의견을 개진했으며 집권당만으로 法(법)이 강행된 후에도 대부분 대학이 협력 거부하여 法(법)은 지금도 발동되고 있지 않다.
  따라서 學內(학내)폭력을 政府(정부)가 막아야 한다는 대학당국의 의견은 大學(대학)이 당면하고 있는 고충을 스스로 해결하려는 노력보다 이를 他律(타율)에 맡기려는, 敎權(교권)신장의 自害(자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이렇게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교권이 실추되어가고 있고 종국에는 그 결과가 학생에게로 돌아온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 하겠다. 옛말에 ‘가재는 게편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결코 사제지간은 적이 될 수 없는 관계이며 교권을 실추시키는 행위를 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그러고 보면 결과는 불을 본 듯 뻔하며 敎權(교권)실추의 원인은 학원 내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外部(외부)의 여건이 그 주요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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