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野壇法席(야단법석)을 친 살아있는 사람”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그리고 문학가로서 인생을 산 만해 한용운.
  문화부는 3월을 ‘만해 한용운의 달’로 정하고 그의 생애․사상․문학관을 재조명하는 여러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
  이글을 통해 진정한 민족주의자였던 살아있는 만해를 만나보고자 한다.
<편집자>

  “얘, 너 만해가 누군지 아니?”
  “응, 선승이자 독립운동가며 민족시인 아니니?”

  만해 한용운(1879-1944)은 누구인가? 만해는 어떻게 살다간 사람인가? 만해는 내게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살아있는 만해’를 만나기 위한 나의 갈망 때문이다. 오늘 내가 살아있는 만해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의 언어가 기록된 ‘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의 언어는 곧 그의 사유세계의 폭이기 때문이며, 그는 또 이미 50여 년 전에 나와 똑같은 생물학적 조건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 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언어 문자의 발명 때문이다. 이 언어 문자의 발명을 전제했을 때 그 다음의 인간의 위대한 발명은 바로 종합적 정보체계의 묶음인 책이다. 책은 엄청난 힘을 지닌다. 한 나라의 고급문화는 대부분 책으로 전달된다. 책으로 전달될 때 그 문화는 질적 향상을 꾀한다. 우리가 미국을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 이 ‘책’으로부터 비롯했다면 오늘 우리의 문화는 훨씬 더 ‘고급’했을 것이다.
  책은 한 시대와 한 인물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사료’가 된다. 내가 오늘 ‘살아있는 만해’를 만나려고 할 때 나는 나와 똑같은 생물학적 조건을 가진 만해를 만날 수 없다. 그러므로 만해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가 남긴 ‘책’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만해의 저서는 모두 열세권이다. (‘한용운전집’ 6권(신구문화사,1973)간행) 그는 저 유명한 ‘朝鮮佛敎有神論(조선불교유신론)’(1913)과 ‘님의 沈黙(침묵)’(1926)을 비롯해서 ‘佛敎大典(불교대전)’, ‘精選講義 菜根譚(정선강의 채근담)’(1917), ‘朝鮮獨立(조선독립)에 대한 感想(감상)의 槪要(개요)’(조선독립이유서․조선독립의 書(서)-1919), 당나라 승려 安察(안찰)이 지은 게송 10수에 대한 풀이인 ‘十玄談註解(십현담주해)’(1926), ‘乾鳳寺(건봉사) 및 乾鳳寺(건봉사) 末寺(말사) 事蹟(사적)’(1928), 장편소설 ‘죽음’(1924), ‘黑風(흑풍)’(1935), ‘後悔(후회)’(1936), ‘鐵血美人(철혈미인)’(1937), ‘薄命(박명)’(1938), ‘번역三國志(삼국지)’(1939)와 ‘公約三章(공약삼장)’ 등 많은 논설과 글을 남기고 있다. 이것을 가지고 나는 앞에서 물었던 물음, 즉 만해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다갔으며, 내게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접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해의 行狀(행상)을 기록한 ‘卍海(만해) 韓龍雲大禪師碑(한용운대선사비)’가 서울 종로 圓覺寺(원각사)터(탑골․파고다공원)에 있다.
  ‘스님은 서력 1879년 고종 16년 기묘 음력 7월12일 충청도 홍주목 주북면 玉洞(옥동)(현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에서 忠勳府都使(충훈부도사)인 韓應俊(한응준)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니 본관은 청주요, 어머니는 온양 方(방)씨다. 누대의 사족으로 할아버지 永祐(영우)는 훈련원 僉正(첨정)이고, 증조할아버지 光厚(광후)는 知中樞府事(지중추부사)였다...’

  지금까지 연구된 바에 의하면 위 비문은 사실과 상당히 다른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후에 만해가 진술한 조서에 따르면(경성지방 예심계 예심판사 永島雄藏(영도웅장)의 조서) 만해의 출생지는 홍성군 홍성면 남문리로 밝혀져 있다. 또 그의 아버지 한응준은 홍주목의 중군 참모로서 동학농민군을 진압해야 하는 지방군의 중견장교였다. 그런데도 이 碑(비)에는 아버지 한응준과 형 윤경이 동학농민군에 가담하였으며, 만해 역시 18세의 어린 나이로 홍주 호방을 습격하여 군자금 1천냥(또는 3천냥)을 탈취했다고 하나 역시 확실한 근거가 없다.
  만해의 어릴 때 이름은 裕天(유천)이며, 본명은 貞玉(정옥)이다. 8-9세에 ‘千字文(천자문)’과 ‘大學(대학)’, ‘書傳(서전)’을 통달하여 신동이란 소문이 났다. 13세에 2년 연상인 아내 全貞淑(전정숙)과 결혼하고 5년 뒤에 집을 나왔다. 열여덟에 뜻한 바 있어 서울로 향하다 설악산의 고승 얘기를 듣고 입산하였다. “에라, 인생이란 무엇인지 그것부터 알고 일하자”라는 결론을 얻고 내설악 오세암에서 부목행자 생활을 하면서 불교의 초심과목과 불교내전을 환하게 깨달아 안다. 다시 뜻한 바 있어 ‘영환지략’이라는 책을 통해 보다 넓은 세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시베리아 기행을 떠난다. 길을 떠나는 도중 안변 석왕사에서 박한영선사를 만나 修禪(수선)하다가 서울을 거쳐 고향 홍주로 되돌아간다. 폐허가 된 고향에서 7년 동안 아내와 세속생활을 하다가 아내의 출산을 앞두고 다시 집을 나간다.
  1905년 1월 백담사에서 은사 김연곡 화상, 계사 전영제 화상 아래서 출가 得道(득도)하여 龍雲(용운)이라는 법명을 받는다. 이어 관동의 대강백인 이학암 화상에게서 뜨리삐따까(三藏(삼장)를 익혀 큰 학승이 되며 아울러 그의 저돌적인 체질에 딱 맞는 幁悟(수오)의 선승이 된다. 백담사에 머물면서 양계초의 ‘음빙실문집’을 읽으면서 뒷날 그가 지은 ‘불교유신론’(1913)의 기본틀을 구상했다.
  다시 백담사를 떠나 금강산 선방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太虛(태허)선사와 雪坡(설파)선사의 선덕을 입었다. 이곳에서부터 내가 오늘 알고 있는 만해의 참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수행자가 된 만해의 삶은 민족해방운동인 삼일운동을 준비하면서 새로운 전환을 맞이한다. 출가전 시베리아 기행에 실패했던 그가 이번에는 일본여행의 길에 올랐다. 그는 일본에서 메이지로 개화문명과 새로운 사조로서 서양사상을 접목하는 일본의 분위기에 깊이 젖어 들었다. 일본의 산하대지를 굽어보며 서른 편의 5언시와 7언시를 짓기도 했다. 그곳에서 崔麟(최린)을 만나 친일 승려 이회광이 조선불교의 일본화를 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귀국하여 전남 송광사에서 김경운, 박한영, 진진웅, 장금봉, 혜찬, 김종래, 송만암 등 전국의 고승들을 만나 이회광을 규탄하고 조선 불교 임제종을 개산한다. 한일 병탄(1910) 다음 해 그는 남만주를 여행하고 돌아와 ‘조선불교유신론’(1913)과 ‘불교대전’(1914)을 펴낸다.

  ‘조선불교유신론’을 펴낸 뒤 전국 사찰 순회에 나선 그는 여러 법회를 통해 산중불교를 일깨우기 시작했다. 중앙선리참구원(중앙선원․현 선학원)에서 조선불교회 회장으로 취임하여 ‘야단법석운동’을 실천에 옮겼다.
  그는 개인적 수행의 문제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의 ‘悟道頌(오도송)’에는 그의 수행의 이력이 진하게 배어 있다. 1917년 12월 한 겨울 밤 바람에 물건이 떨어져 깨지는 소리에 문득 깨달음을 체험한다.
  “사나이 이르는 곳 어디나 고향인데/ 몇몇이나 오랜 떠돌이로 지냈던가/ 한 마디로 삼천대천세계를 외치나니/ 눈 속의 복숭아 꽃잎 펄펄 나부끼노라.”

  금강산에서 내려와 경기도 화장사 강원 강사를 하면서 ‘불교의 장래와 승니의 결혼문제’와 ‘여자의 단발’이라는 충격적인 글을 발표한다. 그러나 융희 4년(1910년) 봄, 중추원 의장 김윤식에게 보낸 獻議書(헌의서)는 그의 삶을 평가함에 있어서 하나의 옥의 티가 되는데 이것은 만해의 결정적인 실수였다고 아니 할 수 없다.
  “엎드려 생각건대 승려의 결혼을 부처님의 계율이라 금한 것이 오래 되었으나 그것이 백가지 법도를 유신하는 오늘의 현실에 적합지 않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옵니다. 만약 승려로 하여금 한번 결혼을 금지한 채 풀지 않게 한다면 정치의 식민과 도덕의 생리와 종교의 포교에 있어서 백해무익한 것이옵니다...(중략).. 통감부령으로 천년의 누습을 타파하여 세상에 드문 치적을 이루게 되기를 바라나이다. 정치는 혁신하는 바가 으뜸이옵니다. 간곡히 기원해 마지 않사옵니다...”
  마치 조선조 오백여년 동안 조선왕조가 금지했던 승려의 도성출입을 일본불교선교사 사노가 김홍집내각에게 건의하여 고종이 이를 풀어주자, 조선 승려들이 이 일본승려에게 연일 감격하여 감사법회를 열어주던 것과 동일한 느낌을 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것은 한용운이 이 땅의 불교현실을 민족의 현실이라는 시각으로 살필 줄 모르고 그것을 통감부시대의 일제 및 매판세력의 관권에 의뢰했다는 한계를 지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저서는 특히 ‘조선불교유신론’과 ‘조선독립에 대한 감사의 개요’ 그리고 ‘불교대전’과 우리 문학의 영원한 고전인 ‘님의 沈黙(침묵)’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조선불교의 유신을 통하여 조선민족의 현실을 개혁하려 했고, 저 원효시대의 야단법석운동으로 꽃피우려고 했으며, 불교문학의 새로운 형식을 통하여 민족문학의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 내려고 했다.
  ‘불교유신론’은 만해 한용운의 최초의 저술로서 만해사상의 출발점을 알려주는 자료가 된다. ‘불교유신은 파괴로부터’라는 글을 핵심으로 전 1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글은 만해사상의 밑바탕이 부정정신과 비판정신에서 비롯됨을 보여준다.
  “유신이란 무엇인가?, 파괴의 아들이요. 파괴란 무엇인가? 유신의 어머니다”(‘조선불교유신론’에서)라는 정의를 통해 조선불교의 정체성과 조선민족의 식민지현실을 극복하려 했다. 그는 근대문명의 특성인 근대적 인간관이라는 모더니티를 제공할 수 있는 사상을 불교로 파악하고 각 개인의 심성 속에 진리를 구현하는 진여가 있음을 누누이 설파하였다. 그리하여 조선민족의 식민지 현실은 정신의 혁명이 되어야 하며 그 정신적 온축의 덩어리로 보아서 불교를 새롭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유신운동’이야말로 가장 급선무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만해의 민족사상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글은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이다. 그가 민족해방운동(1919)의 주동자로 3년간의 옥고를 치르는 동안 일본의 검사의 요청에 의해 작성한 이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는 독립운동가로서 만해를 규정하는 모티브이다. 너무나 당당하고 논리가 정연한 만해의 글에 검사는 아무 말도 못했다. 그는 이 책에서 불교의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에는 불성이 있다”는 존엄성과 자유의지를 조선독립의 정당성에 적용시킨다.
  “자유는 만물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자유가 없는 사람은 죽은 신체와 같고, 평화를 잃은 자는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희생을 달게 받는 것이다.”(‘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에서)
  또 그는 민족의 주체성과 자주의결권에  대해서 조선민족이 정당하게 조선민족 스스로를 경영하며 스스로를 책임져야 함을 힘주어 주장하고 있다.
  “민족자결은 세계평화의 근원적인 해결책이다. 민족자결주의가 성립되지 못하면 아무리 국제연맹을 조직하여 평화를 보장한다 해도 결국에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민족자결이 이룩되지 않으면 언제라도 싸움이 잇달아 일어나 전쟁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에서)
  그러면서 만해는 한 민족이 스스로 살려고 하는, 민족의 자존성을 스스로 지키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될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불교대전’(1914)은 불교에 관한 만해의 최대 저작이다. 이 책은 양산 통도사에 갈무리된 1511부 6803권의 불경을 불교의 혁신과 근대화라는 관점에서 분류하고 요약한 팔만대장경의 섬머리이다. 일반인들이 불경을 쉽게 이해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국한문혼용체를 사용하여 지은 불교 바이블이다. 이 ‘불교대전’은 그가 불교유신을 외치면서도 그 이론적 모티브가 불교경전이어야 함을 반증하는 것이며, 15-16세기 이래 끊어졌던 ‘불교경전의 우리말 옮김’을 불교의 재해석이라는 새로운 인식 속에서 발상의 전환을 꾀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교의 혁신은 제도나 의식의 개혁만이 아니라 교육받지 못한 사람까지도 불교경전을 통하여 불교적 세계관을 접할 수 있게 한 것이며, 또 그렇게 실천하며 살 수 있도록 ‘당대의 살아있는 언어’로 옮겨낸 것이다. 이것은 산중불교를 시정속의 불교로 끌어내리는 운동을 지속적으로 주장한 만해의 의식을 드러내는 작품이며, 새로운 불교운동은 불교언어의 새로운 해석에서 출발해야 된다는 그의 언어관과 문체관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쓰는 글의 문체는 그 사회의 표현형식이며 사회형식 그 자체이다. 그의 문체는 그 시대와 삶을 규정하고 사회는 그 사회의 사상과 정서를 담을 수 있는 문체를 상호 규정한다. 그래서 문체는 시대와 집단의 규범을 내포한다. 문체는 단순히 수사학의 문제로 남지 않고 일정한 역사의식 또는 사회의식의 핵심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므로 문체는 인간해방을 실현하는 표현의 기반이 된다. 만해의 유신운동은 결국 그의 언어에 대한 이해와 문체에 대한 이해로서 나타난다.

  만해는 야단법석의 대가인 원효가 되고자 했다. 원효가 있는 곳에는 어디나 춤과 노래가 있었다. 그의 붓에는 언제나 뭇 삶들을 가장 올바른 길(8정도)로 이끄는 격조 있는 언어가 준비되어 있었다. 원효가 추구했던 야단법석운동은 당대 신라사회의 문체를 변형시킨 성과 를 가져왔다 ‘論疏(논소)’ 및 ‘宗要(종요)’ 등에서 보여주는 4․6 麗文(여문)이나 4․4체의 訟詩(송시)는 鄕札文學(향찰문학)을 훨씬 뛰어넘을 훌륭한 문학이었다. 그는 야단법석의 俗講僧(속강승)이 되어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연기법)과 중도적 실천관(중도행)을 무지한 대중들에게, 그것도 국민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이들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로 설명하기 위하여 여러 불경의 요체가 되는 것을 쉽게 풀이한 ‘종요’와 붇다의 가르침을 교과서처럼 알기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여러 ‘論疏(논소)’들을 지어 뜨리삐따까(三藏(삼장))를 ‘變化(변화)’시켰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문체의 변형을 꾀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三藏(삼장)의 언어가 三藏(삼장)의 언어 됨으로부터 해방됨으로써 새로운 보편언어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만해의 저작은 시, 소설, 수필, 평론, 논설로부터 註解(주해), 飜譯(번역), 史話(사화), 史蹟(사적)과 경전의 編述(편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러한 집필을 통해 만해의 문체를 더듬어보는 것은, 과연 만해가 야단법석운동의 최대 핵심인 ‘문체의 혁명’을 어떻게 시도해 하는가? 라는 물음을 살펴보는 실마리가 된다. 만해의 여러 저서에는 순한문으로 된 ‘序(서)’나 한문통사구조에 助詞(조사)와 語尾(어미)만을 한글로 덧붙여 사용하는 口訣(구결)형식으로 표현한 ‘本文(본문)’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그의 표기체계가 한문과 한글의 2중체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한자를 주로 쓰면서도 조사나 어미는 한글로 씀으로써 당대 사회의 표현형식을 드러내고 있으며, 또 ‘불교대전’에서와 같이 띄어쓰기가 없는 점은 그의 표기체계가 한문에서 한글로 바뀌어가는 과도기였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古書畵三日(고서화삼일)’(1916)과 ‘精選講義 菜根譚(정선강의 채근담)’(1917)에서는 국한문체의 통사구조가 더욱 더 한글어순에 가깝게 변모되어 있다. 이것은 實辭(실사)는 대부분 한자로 되어있고, 虛辭(허사)만 한글로 되어 있다든지, 상용어로 쓸 수 있는 일기나 수필 등에서도 한문투로 되어 있는 것은 그의 문체의식이 아직도 ‘한문이 역시 제격이다’라는 의식이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후기 저작들을 살펴보면 한글체가 두드러진다. ‘님의 침묵’(1926․1934)이후 1930년대에 이르러 그가 쓴 여러 신문 장편소설과 수필 등에서는 종전에 써오던 한문체와 국한문체에서 완전히 벗어나 그야말로 ‘變文(변문)’의 양상을 드러낸다. 이것은 1930년 조선사회의 대중적 문체로서의 문화사적 기능이 국한문체에서 한글 표기체계로 이전되었음을 드러내는 근거가 된다. 그가 수행자(승려)로서 드물게 이러한 문체의 변혁을 꾀했다는 것은 조선 현실에 대한 개혁의식과 문장에 대한 애정과 맞물려서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또 그가 문학인으로서의 삶을 아울러 살아갔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만해의 문학작품은 미완성작을 포함한 5편의 장편소설과 88편의 시가 실린 ‘님의 침묵’, 그리고 미발표 시 20여편, 한시 137편이 있다. 그는 처음부터 무슨 전문적인 시인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무슨 문예지나 일간지에 데뷔절차를 거친 것도 아니었다. 불교의 정신을 형상화하다 보니까 그냥 시가 되어 ‘님의 침묵’이 된 것이다. 여러 시편에서 낯설은 표현들이 눈에 띠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물론 표현과 현실적 상황에 대한 냉철한 자각과 자아에 대한 명징한 인식은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는 갖가지 수행체험을 통해 존재와 존재 사이를 바라보는 통찰력을 지닌 수행자였다. 이 수행자로서의 신분은 그의 시가 남과 다른 부분을 지닌 만해만의 개성으로 드러나고 있다.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직관에 의한 감정의 절제 및 압축미, 그리고 고도의 상징적 터치 등이 <님>과의 이별을 통한 <님>과의 만남의 복선들을 미리 예고해 두고 있다. 그 복선들의 실마리는 이미 연기적 세계관으로 드러난다.
  그의 시에서 풍기는 냄새는 진한 여성주의이다. 그러나 그 여성주의는 <님>의 이별의 상태로부터 만남의 상태로 돌이키는 <님>의 역사의지를 간직하고 있다. 가장 부드러우면서도 질긴 삶의 의지를 지닌 ‘따님(여성)’을 통해 강한 실천의지를 드러낸다. ‘님의 침묵’ 88편중 첫 작품인 시 ‘님의 침묵’은 님의 이별로부터 시작하여 님에의 기다림으로 이어지며, 그 기다림은 님의 죽음으로 치닫는다. 그리하여 님의 죽음으로써 님을 찾는 자의 이별과 기다림과 괴로움과 헤매임들이 마침내 하나의 <님>으로 거듭나기에 이른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중략) /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시 ‘님의 침묵’에서)
  여러 평자들의 표현대로 이 시 ‘님의 침묵’은 ‘소멸과 생성의 변증법’이며 나의 일생의 삶의 과정인 12연기의 역동적 과정(변증법)의 형상화이다. 모든 생물은 어떠한 존재에 기생하며 산다. 그 생물들은 기생을 통해서만 존재하며 그 기생은 곧 연기적 관계를 내포한다. 연기적 세계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끈과 고리의 역동적 맞물림으로 나타나며 삶과 죽음은 바로 그 끈과 고리의 맞물림이다. 만해의 문학, 특히 그의 시 문학에서는 이 <님>과의 이별과 만남이라는 연기적 세계관이 밑바닥에 폭넓게 깔려 있다. 그것을 확인할 때만이 만해시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만해시문학의 이해에 있어 이 <님>은 알파요 오메가이기 때문이다.
  그의 5편 장편 소설은 ‘조선일보’와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되다가 중단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의 소설은 그의 시의 영광에 가려 크게 주목받지 못했으며 미완성 작품이 많아 평가에 어려움이 있다 그의 소설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두어야 될 것이다. 그의 시조 20여편과 한시 137편도 많은 연구자를 기다리고 있다.

  만해는 조선 근현대사와 불교근현대사에서 가장 많은 분야에 걸쳐 있는 동국대학교의 제1회(1906) 졸업생으로서 20세기 한국 근현대사에서 우리를 외롭지 않게 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송만공, 백용성 등의 선승들과 석전 박한영, 퇴경 권상로 등 당대의 여러 학승들과 치열하게 ‘움직이며’ 살았으며 20세기 초에 조선의 식민지 현실을 살면서 이 땅에서 드물게 ‘야단법석’을 치며 ‘살아있는’ 삶을 살은 주인공임에 틀림없다. 그 주인공을 바라보면서 오늘 우리들 역시 살아있는 배우가 되어야 함을 시사 받아야 할 것이다. 늘 바라보는 이만이 되지 말고 말이다.

  만해는 누구인가? 만해는 어떻게 살다간 사람인가? 만해는 내개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을 통하여 나는 오늘 ‘살아있는 만해’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만해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을 통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질문을 떠올리게 되며, 만해는 어떻게 살다간 사람인가? 라는 물음을 통해 오늘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 나를 되돌아보게 되며, 만해는 내게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통해 나는 남에게 무엇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는 주말이면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야단법석(?)을 치는 젊은이들과 어느 종교단체의 선교 소음(?)을 보고 들으면서 나는 ‘야단법석’의 대가인 원효와 만해를 꼭 만나야만 한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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