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湖南(호남)지방을 중심으로

◇글 싣는 차례
1. 연재를 시작하며
2. 충청 지방에 있어 백제권 문화
3. 전라지방의 역사와 지명관계
4. 강원도 일대의 민속 자료
5. 경기도 일대의 전래동화
6. 경상도의 사찰구조 및 현황
7. 연재를 마치며

  이름은 ‘이르다’에서 전성된 말로 유형무형의 사물을 말로 일컫는 ‘名稱(명칭)’것이다. 사람들에게 각각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해 이름이 있듯이 사람이 사는 땅에 있어서도 각기 다른 이름이 있어 왔다. 우리는 초기에 문자가 없어 한자를 빌려 썼기에 이름 표기에도 그런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곧 초기의 이름은 순수 우리말을 한자의 훈이나 음을 빌려 썼고 다음에는 한자어를 중심으로 한 이름으로 번지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사람의 이름이 그렇고 땅 이름이 그러했다. 예를 들면 居漆夫(거칠부)(荒宗(황종)) 異斯夫(이사부)(苔宗(태종))는 순수 국어 이름을 한자를 차용 표기한 것이고 金庚信(김경신) 崔致遠(최치원)은 姓(성)이 붙은 한자 인명이며 金壽興(김수흥) 金壽桓(김수환)은 행열학까지 쓴 人名(인명)이며 徐伐(서벌)은 東京(동경)이란 뜻의 순수국어의 한자 차용표기인데 그곳이 오랫동안 신라의 수부가 되다 보니 그 地名(지명)이 서울 ‘京(경)’이라는 보통명사로 변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開城(개성)(松都(송도)), 조선시대에는 漢城(한성)(漢陽(한양))에 이르는 고유명사이기도 한 지명이며 그밖에 순수국어 ‘뫼’ ‘가람’ 등은 漢字語(한자어) ‘山(산)’ ‘江(강)’으로 대체되기에 이르렀다.
  三國史記(삼국사기) 地理志(지리지)를 보면 新羅(신라)는 三國(삼국)을 統一(통일)한 뒤 景德王(경덕왕)16年(년) 全國的(전국적)인 行政區域改編(행정구역개편)을 단행하고 고을 이름도 바꾸었다. 이때 바꾼 이름이 漢字語(한자어) 이름이고 그이전의 이름이 순수국어 地名(지명)의 漢子(한자) 借用表記(차용표기)로 보인다.
  仇只山(구지산)이 金溝(금구)로 古沙夫里(고사부리)가 古阜(고부)로, 上漆(상칠)이 尙質(상질)(興德(흥덕))로 大尸山(대시산)이 大山(대산)(泰山(태산))으로, 發羅(발라)가 錦山(금산)(羅州(나주))로 半奈夫里(반내부리)가 潘南(반남)으로, 秋子兮(추자혜)가 秋域(추역)(潭陽(담양))으로 毛良夫里(모량부리)가 高敞(고창)으로 豆夫只(두부지)가 同福(동복)으로 改變(개변)된 데에서 우리는 이걸 보는 것이다. 이런 現象(현상)을 坊名(방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龍城誌(용성지)>(南原誌(남원지))를 보면 옛적 南原府(남원부)의 坊名(방명)중 俗名(속명)이 漢字化(한자화)한 재미스런 몇 가지를 살필 수 있다. 곧 乭古介(돌고개)가 石峴(석현)으로, 乫峙(갈치)가 葛峙(갈치)로 표기되었는가 하면, 梅內(매내)는 梅岸(매안)으로, 金內(금내)는 金岸(금안)으로, 者省(자성)이 南生(남생)으로, 竹谷(죽곡)이 大谷(대곡)으로 표기되기도 했다. 南原山城(남원산성)이 있는 산을 蛟龍山(교룡산)이라 하는데 이는 南原(남원)의 古號(고호)를 위에 붙인 古龍山(고룡산)에서 그리 轉音(전음) 표기되었을 것으로 보며, 蛟龍山(교룡산) 東西二峰中(동서이봉중) 東峰(동봉)을 福德(복덕), 西峰(서봉)을 密德(밀덕)이라 부르는데, 德(덕)은 達(달)과 같이 峰(봉)에 대응되는걸 보면 古語(고어)의 자취가 남아 있는 말이며 密德(밀덕)의 ‘密(밀)’은 龍(용)의 古語(고어) ‘미르’ 표기일 가능성도 많은 것이다.
  古龍(고룡)이 南原(남원)으로 변한 데는 아무런 그 自體地名(자체지명)으로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통일 新羅(신라)가 그 영내에 五小京(오소경)을 두었는데 남쪽 지금 남원에 둔 것이 南原小京(남원소경)(東原京(동원경)(金海(김해))) 西原京(서원경)(淸州(청주)) 北原京(북원경)(原州(원주)) 中原京(중원경)(忠州(충주)) 이기에 그 이름이 그대로 남아온 것이다.
  南原小京(남원소경)이 되기 전에 이곳은 帶(대)방이라 했다는 기록이 <高麗史(고려사)>지리지와 <新增東國輿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인다. 이건 全州(전주)를 比斯伏(비사복) 또는 比自火(비자화)이라 한 것과 같이 百濟(백제)가 망한 뒤 그 구역을 둘러싸고 新羅(신라)와 唐(당)나라 사이에 그 관할권을 주장하면서 서로 緣故權(연고권)을 내세운 그런 정치적인 의도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본다.
  帶方(대방)은 後漢王(후한왕) 요동에서 세력을 떨친 公孫康(공손강)이 낙랑군 남쪽(지금 黃海道(황해도) 慈悲嶺(자비령)이남 漢江(한강)이북지역)에 둔 고을 이름이다. 이 帶方(대방)은 한때 백제의 영역이 되었기 때문에 백제 南遷(남천)이후에도 중국에서는 백제의 왕들은 帶方郡公(대방군공)으로 봉했고 백제가 망한 뒤에는 唐郡督府(당군독부) 치하에 대방주를 두었는데 대방주는 南原(남원)중심지역인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나온 것이 全州(전주)를 比斯伐(비사벌)이라 한 기록이다. 원 比斯伐(비사벌)(比自火(비자화))은 경남 창녕인데 <三國史記(삼국사기)> 眞興王條(진흥왕조)에는 ‘16년 정원 比斯伐(비사벌)에 完山州(완산주)를 두었다’는 기록이 바로 의도적이다. 진흥왕 때라면 신라는 국력이 신장되어 그 징표로 回巡碑(회순비)까지 남아있으나 통일 이전이다.
  百濟(백제)의 內地(내지)에 있는 完山(완산)에 어떻게 州(주)를 설치했을 것이냐가 문제다. 眞興王十六年(진흥왕십육년)은 百濟(백제)로는 威德王二年(위덕왕이년)으로 聖王(성왕)을 이어 착실히 國力(국력)을 다져간 때인데 邊方(변방)도 아닌 奧地(오지)인 完山(완산)에 어떻게 州(주)를 설치했을 것인가 百濟威德王條(백제위덕왕조)에는 이런 기사가 없다.
  <新增東國輿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람)>古跡條(고적조)에는 옛 地名(지명)이 많다. 羅州牧條(나주목조)에 孫利鄕(손리향)이 보인다.
  ‘羅州北(나주북)쪽 三十里(삼십리)에 있는데 옛적엔 所山里(소산리)라 했고 지금은 道林里(도림리)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지금 老山郡(노산군) 三道面(삼도면) 道德里(도덕리) 道林(도림) 마을이다.
  이 마을 傳來(전래) 우리 순수 국어 地名(지명)은 ‘도르메’ 또는 ‘도리메’라고 한다. 이 ‘도르메’가 所山里(소산리) 孫利鄕(손리향) 道林里(도림리)로 異記(이기)되었으며 또 圓山林(원산림) 元山村(원산촌) 元舍村(원사촌) 등으로 異記(이기)되기도 했다. 이 마을을 중심으로 이곳의 名門(명문)인 錦城(금성)(羅州(나주)) 吳氏(오씨)들이 많이 살며 널리 알려진 名士(명사)들이 많이 나왔는데 그 文集(문집)이름에 道林遺集(도림유집)(吳以久(오이구)) 石門集(석문집)(五以翼(오이익)) 石峰集(석봉집)(吳權洙(오권수)) 後石集(후석집)(吳駿善(오준선)) 등이 있다. 물론 그 號(호)를 따라 붙여진 이름이지만 여기 道林(도림) 石(석)(돌)이 ‘도로메’ 관련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지방 名山(명산)에 聳珍山(용진산)이 있다.
  이 산은 다른 곳에서는 三峰(삼봉)으로도 二峰(이봉)으로도 보이는 데 이 ‘도르메’에서 보면 뾰족하게 붓끝처럼 날카롭고 둥글게 한 봉우리로 보인다.
  ‘도르메’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왔으며 이곳에는 筆峰(필봉)으로 비치기 때문에 이곳에서 유명한 문사들이 난다는 풍수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 潭陽都護府條(담양도호부조)에는 少年巖(소년암)이 있다. 지금 潭陽(담양)군 龍(용)면 龍淵(용연)리 소년촌(일명 少天峙(소천치))앞 길가에 있는 바위다. 이 바위 때문에 그 부근에 있는 마을을 소년촌이라 했지만 이 少年巖(소년암)을 둘러싸고 나오는 이 지방출신 李靈幹(이령간)의 이야기는 더 화려하다. 李靈幹(이령간)은 高麗(고려) 文宗(문종)때의 사람인데 벼슬은 參知政事(참지정사)에 이르렀다.
  어렸을 때 烟洞寺(연동사)에 가서 글을 배웠는데 어느 날 靈幹(령간)은 혼자서 나가 한 동자를 만나 함께 바위위에서 바둑을 두었는데 때마침 큰 호랑이가 바위 곁에 웅크리고 앉았어도 靈幹(령간)은 동요함이 없이 바둑을 끝내고 돌아가 절중에게 이를 이야기하니 중들이 가 보았다. 그런데 少年(소년)과 범은 간데없고 바위주위에 호랑이 발자취만 남아 있었다고... 靈幹(령간)이 머물고 있는 절에서 중은 술을 빚었는데 그 술이 익으면 몰래 먹어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중은 그때마다. 靈幹(령간)이 그랬다고 매를 때렸다.
  이런 일이 두세번 계속되자 靈幹(령간)은 몰래 숨어서 누가 그러나 하고 살피니 늙은 삵이 와서 먹는 것이 아닌가. 이를 잡아 죽이려고 하니 삵이 사람의 말로 저를 놓아 주면 평생에 쓸 奇術(기술)을 전해주겠다고 하면서 애걸하니 그때 靑禮童子(청례동자)가 있어 책 한권을 던져주었다.
  靈幹(령간)은 삵을 놓아주고 그 秘書(비서)를 익히어 살아 있을 때에 이적이 많았다고 한다.
  崔滋(최자)의 <補閑集(보한집)>에도 李靈幹(이령간)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를 들면 다음과 같다.
  ‘參政李靈幹(참정이령간)이 羅州(나주) 法輪寺(법륜사)를 두고 시를 지었는데 이르길, 가을이 서늘하여 늦경치가 가장 좋은데 하룻밤을 蓮房(연방)에 자며 눈썹 한번 펴보네, 밤이 깊어가니 북두성은 빛이 더욱 찬란하고 樓臺(누대)에 달이 굴러 그림자 參差(참차)하네. 여섯  때에 길이 빛나 慈燈(자등)을 밝고 만고에 길이 남을 聖跡(성적)이 기이하네. 맺어 얻은 좋은 인연 무슨 일인가 마음 사르는 香(향) 供養(공양)부처를 스승 삼네.
  ‘秋凉晩景最相宜 一宿蓮房一展眉 星斗夜深光燦爛 樓臺月轉影參差 六時永耀慈燈朗 萬古長存聖跡奇 結得良緣何事也 熱心香供佛爲師 (추량만경최상의 일숙연방일전미 성두야심광찬란 누대월전영참차 육시영요자등랑 만고장존성적기 결득양연하사야 열심향공불위사)’했다. 혹 이 시의 끝 구절이 묘하지 않다고 하고 ‘也(야)’字(자)를 쓴 것이 더욱 疎野(소야)하다고 하나 그게 잘못이다. 공이 임금을 따라 朴淵(박연)에서 놀 때에 바람이 갑자기 일어나니 앉아 있던 돌이 흔들리어 임금님이 놀랬었다. 公(공)이 勅書(칙서)를 지어 못에 던져 용의 죄를 따지고 벌을 주려고 하였다. 용은 바로 깨달아 그 등을 내놓고 매를 맞으니 公(공)의 글은 신령스럽기 헤아릴 수 없는데 어찌 이 하찮은 시 가운데 한 글자의 工拙(공졸)을 가지고 公(공)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지명은 여러 가지 면에서 개변된다. 그 예를 지금은 정읍군 병합된 옛 泰仁(태인)고을에서 들어보자. 泰仁(태인)이란 이름도 泰山(태산)과 仁義(인의) 두 고을이 합해지면서 두 고을을 약칭하여 된 이름이다. 태산은 원래 (백제때) 大尸山(대시산)이었던 것이 그 뒤 大山帶山(대산대산), 太山泰山(태산태산), 詩山(시산) 등의 이름으로 불리웠다. 大山(대산) 帶山(대산) 太山(태산) 泰山(태산) 등은 音(음) 또는 訓(훈)의 異記(이기)이며 詩山(시산)은 尸山(시산)의 異記(이기)로 美化(미화)된 명칭이다. 지금도 옛적 泰山(태산)고을의 治所(치소)였었다는 부락 이름이 詩山里(시산리)(七寶面(칠보면))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仁義(인의)는 원래 賓屈(빈굴)이었던 것이 斌城(빈성)으로 한문중심의 미화표기이고 빈성이 인의로 바꾸어진 것은 아마도 ‘斌(빈)’字(자)를 破字(파자)해서 문무로 이 문무를 인의로 연관시켜 개변시킨 것이 아닌가 한다. 泰仁(태인)의 異名(이명)을 ‘武城(무성)’ ‘賦城(부성)’이라 부르는 것은 말할 것 없이 ‘斌(빈)’이 그리 개변된 것이다. 泰仁(태인)에 있는 무성서원의 무성이란 이름도 여기에서 온 것이다. 무성서원이 있는 자리는 옛적 泰山(태산)고을에 있으면서도 여기 무성에서 따왔으며 崔孤雲(최고운)이 泰山郡守(태산군수)로 있으면서 교화함이 많았다 하여 그를 享祀(향사)하는 곳이다.
  武城(무성)은 옛적 中國(중국) 魯(노)나라에 있는 고을로 孔子(공자) 弟子(제자) 자유가 이곳 원으로 가 禮樂(예악)으로 다스리니 弦歌(현가)소리가 들리었다고 한다. 그것과 관련하여 武城書院(무성서원)의 門樓(문루)를 弦歌樓(현가루)라 한 것이다. 碩學(석학) 頣齋(신재) 黃胤錫(황윤석)(1727~1791)도 그 浸錄(침록)(頣齋續稿卷十一(신재속고권십일))에서 興德(흥덕)의 地名(지명) 변천을 이야기하면서 興德(흥덕)의 옛 이름 ‘上漆(상칠)’을 中國古代莊周(중국고대장주) 漆園(칠원)과 관련하여 好事者(호사자)들이 莊子(장자)에 나오는 培風(배풍)과 遺遙(유요)에서 따 縣館(현관)을 培風軒(배풍헌) 뒷산을 培風山(배풍산) 西(서)쪽 멀리 떨어져 있는 산을 遺遙山(유요산)이라 했다고 한 것은 卓見(탁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以上(이상)에서 본 것처럼 地名(지명)의 改變(개변)이나 派生(파생)을 여러 가지 면에 기대어 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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