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재벌 입김이 신문의 상업주의 부채질

  사회가 변함에 따라 언론도 변하고 언론이 변함에 따라 사회도 변하며, 나아가서 인간도 변한다. 사회와 언론과 인간은 항상 상호 연관적이고 변증법적 관계속에서 존재한다.
  오늘날 인간사회의 주변 환경은 물질분야 못지않게 정신분야에 있어서도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는데, 특히 언론의 변화는 가장 특기할 만한 현상이다. 여러 형태의 언론매체가 각기 나름대로 기술과 내용면에서 특색 있는 변화를 이룩하여 왔는데 그 가운데서도 신문 매체의 질적 변화는 커다란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신문의 선정성, 즉 센세이셔날 저널리즘(Sensational Journalism)에 대한 사회적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선정적 신문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며 우리만이 겪는 문제도 아니다. 신문의 저속성과 선정성은 근대적 신문 매체가 등장하기 시작한 17세기 초엽부터 시작하여 앞으로도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논란의 핵심은 세속적이고 저속하고 선정적인 신문의 보도내용이 인간의 정신과 행위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 것이냐 하는 문제인데 아직까지 명확한 해답은 얻은 상태가 아니며 아마도 영원한 숙제거리로 남을 것이다.
  선정적 신문은 상업주의와 대중사회의 등장과 함께 나타난 시대적 부산물이며 주로 상업주의와 대중적 부산물이며 주로 상업주의 언론제도 속에서 성장하였다.
  가능한 한 많은 독자를 끌어 들이기 위해 흥미 있고 자극적인 내용을 과장되게 보도함으로써 판매부수를 늘리고 따라서 이윤을 극대화 하려는 목적으로 발행하는 신문을 선정적 신문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선정적 신문을 단순히 신문 경영적 측면에서만 논의할 수 없을 정도로 관련요인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과거에는 물론 현재에도 대부분의 식자층은 선정적 신문이라면 우선 무시하거나 부정적 관점에서만 평가하려 한다. 신문이라면 의례히 정치․경제․문화 등 무게 있는 문제점들을 어렵게 보도하는 권위지를 주로 연상하고 신문에 대한 평가기준은 그러한 권위지에서 찾으려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교육수준과 사회적 위치에 맞추어 판단하는 편견적이고 위선적인 자세이다.
  아무리 고매한 인격과 덕망과 지식을 소유한 사람이라도 권위지와 선정지를 눈앞에 보았을 때 그리고 그 주위에는 그를 의식하는 사람이 전혀 없을 경우 그는 의례히 선정지에 먼저 관심을 갖고 손을 내미는데, 바로 이러한 행위는 가장 인간적이며 본능적 의식의 표현인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쾌락과 오락을 추구하게 되고 직접적 쾌락 대신 간접적 쾌락을 추구하려고 할 경우 선정적이고 오락적 언론매체를 우선 선호하려 한다.
  신문의 수준은 전달자인 언론인이 정하는 것이 아니고 독자인 국민이 정한다는 이론이 매우 타당하게 들린다. 신문이 수준 높은 내용을 아무리 정성껏 전달하려해도 독자의 교육수준과 이해능력이 따라주지 못한다면 신문은 한낱 종잇조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산업사회에서는 노동을 하는 인간은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기 원한다. 그리고 적절한 정신적 휴식과 위안을 받기 원한다. 만일 정당한 대가를 보상 받았거나 만족할만한 휴식과 위안을 받았다면 모르되 그렇지 못할 경우 대중언론매체를 통하여 대리보상 내지는 대리만족을 얻으려고 한다는데 이때 주로 선정적․오락적․쾌락적 내용에 접하게 된다.
  아무도 이러한 인간적 행위를 탓할 수 없다. 정도의 차이는 조금씩 있을지는 몰라도 자기의 수준과 필요에 따라서 적절한 쾌락을 언론매체를 통하여 추구하는 행위는 자연스럽고 인간적이다.
  그리고 언론정책적인 차원에서 볼 때 인간의 쾌락추구적 커뮤니케이션 욕구를 올바로 충족시켜 주지 못할 경우 인간의 본능적 쾌락추구욕구는 예기치 않는 방향으로 폭발할지도 모른다. 이 세상은 성현군자들만 사는 곳도 아니며 그들만을 위하여 신문이 존재할 수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선정적 신문 혹은 오락적 신문은 그 존재가치가 충분히 인정되며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생활수단이자 정보전달 수단임에 틀림없다. 다만 우리가 염려하고 문제시하는 것은 이러한 신문을 이용하여 인간을 정치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조작하려는 불순한 의도이다.
  독재국가와 독점자본주의 사회에서 언론은 비정상적인 목적에 남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집권자는 국민이 유식해지기를 결코 원치 않고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능력과 방법을 어떻게 해서든지 말살해 버리려한다. 집권자가 바라는 국민의 의식상태란 정치상황에 대한 객관적 판단이나 의식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마취된 듯한 상태인 것이다.
  독재정치에서 파생되는 온갖 부정과 불의와 비인간화 등의 심각한 문제점들을 은폐시키고 국민이 의식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오늘날과 같은 대중사회에서는 언론을 조정하고 탄압하는 일이 가장 효과적이고 필수적이다. 언론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는 당장 심각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며 대내외적 파급효과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가능한 한 간접적이고 변태적인 방법을 활용하려는 것이 집권자의 언론정책이다.
  요컨대 국민을 바보스럽게 만들고 몽롱하게 만드는 데에 언론을 활용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연적인 욕구와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언론이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고 정치적 목적에 맞게끔 조정된 내용을 그것도 선정적이고 쾌락적으로 확대하고 조작하려는 것이 집권자의 현대적 언론정책이다.
  전파매체는 원래 오락적 속성을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의식조작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문까지도 국민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독재를 합리화시키고 수단화하려는 정치적 계략은 단호히 경계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산업사회가 발전됨에 따라 선정적 신문의 수요와 필요성이 계속 증가할 수  밖에 없는데 여기에 정치적 압력까지 작용하여 일반화 된다면 우리의 언론상황은 온통 선정과 쾌락과 오락으로 채워진 매체들로 뒤덮일 것이다.
  독점자본가도 독재자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만드는 제품에 대한 소비자, 즉 국민의 비판의식이 높아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제품을 광고할 때 소비자는 별다른 의식이나 판단기준 없이 제품을 소비만 하면 되기를 바란다.
  제품가격이 왜 비싼지, 독과점 생산체제가 국민경제에 얼마나 악영향을 끼치는지, 독점재벌과 정권이 유착됨으로서 사회 각 분야에서 파생되는 부정적 효과는 얼마나 큰지를 국민이 소상히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국민은 오직 독점재벌들의 단순소비자 역할만 충실히 수행하면 된다는 것이다.
  독점재벌들은 언론매체를 직접 소유하고 있거나 언론에 절대적 압력을 가하고 있다. 그들의 영향권안에 있는 언론일수록 상업주의 색채를 띠게 되며 따라서 오락적 내용을 주로 취급할 수밖에 없다.
  문제의식과 비판의식을 말살시키기 위하여 현실적 문제는 환상적이고 가공적 세계로 유도되며 인간적 가치기준과 삶의 목적은 돈과 소비와 쾌락에서 찾게끔 언론을 통하여 선정적으로 조작된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선정적 신문은 그 본래의 발생동기와 기능면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변질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신문에 있어서 선정의 의미는 처음부터 부정적이 아니었고 인간의 쾌락추구 원리에 맞추어 전달내용을 흥미 있고 알기 쉽고 약간 과장되게 독자에게 전달한다는 선의의 의미로 긍정적이었다. 인간 역시 이런 것을 자연스럽게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집권자의 권력행사를 무마시키고 독점재벌들의 영리추구를 가능케 하는 수단으로 선정적 신문이 오용되고 남용되는 상황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선정적 신문, 정확히 표현하여 대중 오락적 신문, 혹은 대중신문은 복합사회에서 등장하고 존재하며 변하고 발전하는 각 분야의 정보와 문제점들을 신속하게 제공하고 알기 쉽게 이해시키며 긴장을 풀어주고 적절한 정신적 오락을 제공하여 줄 수 있는 생활의 동반자인 것이다.
  선정적 신문과 말초적 본능을 자구하는 통속적이고 저속한 신문과는 구별을 하여야겠고 신문에 있어서 선정의 개념은 오락이 가미된 정보전달이라는 의미로 이해하여야겠다.
  부당한 정치적 경제적 목적에 남용됨이 없이, 그리고 대중의 긍정적이고 건전한 사회화를 위하여 순수하게 봉사하는 대중오락지를 우리 모두는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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