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四郡(한사군)-한반도에 없었다”

○…國史(국사)에 대한 再認識(재인식)이 필요하다는 흐름속에 漢四郡(한사군)의 위치에 관해 韓半島北部說(한반도북부설)과 遼東(요동)․遼西說(요서설)이 대립하고 있다. 요동 요서설의 입장에 선 이 논문은 지난 5월 史友會(사우회) 학술세미나에서 발표된 것으로 紙面(지면) 관계상 많은 요약과 생략이 있었음을 밝혀둔다.
<편집자註(주)> …○

 

  Ⅰ. 導言(도언)

  1983년에 문교부와 國史編輯委員會(국사편집위원회)가 펴낸 고등학교용 國史(국사)교과서 상권을 보면, 韓國古代史(한국고대사)에 있어서 중요한 쟁점중의 하나인 漢四郡(한사군)의 위치에 관하여 지금까지 通說的(통설적)인 견해만을 일방적으로 說明(설명)하던 것과는 다르게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한이 고조선지역에 설치하였다는 4군현의 위치에 대해서는 만주와 한반도북부설과 요동․요서설이 있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새 국사 교과서는 한국고대사의 인식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樂浪郡(낙랑군)과 玄菟郡(현토군), 臨屯郡(임둔군) 등 漢四郡(한사군)의 疆域的(강역적) 위치를 서술함에 있어 종래의 평양중심의 한반도북부위치설과 함께, 그 위치를 한반도와는 관계없이 오히려 중국의 화북지방에 가까운 요동․요서지역으로 보는 이른바 ‘遼東(요동)․遼西說(요서설)’을 동일한 비중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國史學界(국사학계)를 대표하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종래의 입장에서 벗어나 지금까지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遼東(요동)․遼西說(요서설)을 국가가 펴낸 교과서에 기존 통설과 함께 채택하여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은, 국정교과서가 갖는 정책적인 배려의 성질을 감안하더라도 요동․요서설이 그 자체로서 지닌 學術的(학술적) 성과와 說得力(설득력)이 기존 통설에 못지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사군의 위치에 관한 학설의 대립은 日帝時代(일제시대) 民族主義史學(민족주의사학)과 植民史學(식민사학)의 대결에서부터 本格化(본격화)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8․15해방 이후 지금까지도 확실한 결론을 맺지 못하고 論爭(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에 이 문제에 관하여 보다 균형 있는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비교적 소개가 덜 된 遼東(요동)․遼西說(요서설), 특히 최근의 遼西說(요서설)에 관하여 漢四郡(한사군)중 가장 중요한 樂浪郡(낙랑군)의 위치를 중심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Ⅱ. 遼西地域(요서지역)의 樂浪郡(낙랑군)

  지금까지의 통설은 대개 한사군 위치를 韓半島北部(한반도북부) 및 滿洲(만주)의 일부지역으로 비정하고 그 중심지를 오늘날의 平壤地域(평양지역)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그 중심지를 평양지역으로 보는 주된 근거는 한사군중 樂浪郡(낙랑군)의 위치를 평양지역으로 인식함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므로 낙랑군의 위치에 관한 인식이 바뀔 경우 한사군의 위치가 모두 변경됨을 의미한다.
  樂浪郡(낙랑군)의 위치를 찾기 위하여 한사군 설치 초기의 지리를 기록한 ‘漢書(한서)’지리지를 보면 낙랑군에는 모두 25개의 縣(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25개의 縣(현) 가운데 어느 하나의 현이라도 분명하게 오늘날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면 그곳을 포괄하는 주변지역이 곧 낙랑군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낙랑군의 25개의 현 가운데 遂城縣(수성현)과 朝鮮縣(조선현)의 위치가 분명히 확인되고 있다.
  수성현의 위치에 관하여 ‘史記(사기)’의 夏本紀(하본기)에는 樂浪郡(낙랑군)이 존재하던 당시인 AD 283년경에 편찬된 것으로 알려진 ‘太康地理志(태강지리지)’를 인용하여 ‘낙랑군의 수성현에는 갈석이라는 유명한 산이 있는데 萬里長城(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 (필자 註(주), 樂浪遂城縣(낙랑수성현) 有碣石山(유갈석산) 長城所起(장성소기)‘라고 기록하였다.
  또한 ‘晋書(진서)’ 地理志(지리지)에서도 수성현에 대하여 그곳에서 秦帝國(진제국)의 長城(장성)이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당시 진제국의 장성이 시작된 곳은 전국시대 燕(연)나라 장성의 끝인 襄平(양평)과 같은데 ‘魏書(위서)’ 地形志(지형지)는 양평의 위치가 前漢(전한)․後漢(후한)․晋(진)시대까지 불변하였다고 하였으므로 곧 양평의 위치를 찾으면 수성현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이에 관하여 ‘後漢書(후한서)’ 袁紹劉表列傳(원서유표열전)에는 襄平(양평)이 당시의 平州(평주) 盧龍縣(노룡현) 西南(서남)에 있다고 하였는데 그 지역은 오늘날 遼西地域(요서지역)의 난하 하류부근으로서 갈석산이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이로서 遂城縣(수성현)이 요서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이 같은 사실에 비추어볼 때 ‘漢書(한서)’ 賈損傳(가손전)에서 漢四郡(한사군)을 설치한 漢武帝(한무제)의 업적을 말하면서 ‘동쪽으로 갈석을 지나 玄菟(현토)와 樂浪(낙랑)으로써 郡(군)을 삼았다‘ (東過碣石(동과갈석) 以玄菟樂浪爲郡(이현토낙랑위군))라고 기록한 표현은 정확한 것이 된다. 만약 樂浪郡(낙랑군)이 平壤地域(평양지역)에 설치되었다면 數千理(수천리) 떨어진 갈석산을 기점으로 하여 설명한다는 것이 큰 무리라고 하겠다.
  또한 朝鮮縣(조선현)의 위치도 확인 되고 있다.
  ‘史記(사기)’ 조선열전의 주석인 ‘集解(집해)’의 기록에는 AD 3C경의 사람인 張晏(장안)의 말을 인용하여 樂浪郡(낙랑군)의 朝鮮縣(조선현)지역에는 濕水(습수)․洌水(열수)․汕水(산수)라는 명칭의 세 지류를 가진 洌水(열수)라는 江(강)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魂書(혼서)’ 지형지는 조선현의 위치가 前漢(전한)시대부터 後漢(후한)․三國時代(삼국시대)를 거쳐 晋(진)시대까지 변화가 없었다고 하였으므로, 위에서 말한 조선현의 위치에 대한 張晏(장안)의 말은 樂浪郡(낙랑군) 設置(설치) 당시의 위치와 같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濕水(습수)․洌水(열수)․汕水(산수)의 세 지류가 있는 강을 중국의 동북부지역으로부터 한반도에 걸치는 지역에서 찾아낸다면 그곳이 곧 조선현이 있었던 지역이 되는 것이다.
  이에 관하여 古代(고대)의 中國(중국)과 그 주변의 하천에 대하여 상세한 기록을 전하는 ‘水經注(수경주)’를 보면 이러한 세 가지 명칭을 가진 지류가 있는 강은 유수뿐이다. 즉 유수에는 濕餘水(습여수)(濕水(습수)), 武列水(무열수)(列水(열수), 洌水(렬수)), 龍鮮水(용선수)(鮮水(선수) 일명 汕水(산수))의 지류가 있다.
  그런데 이 유수는 오늘날 遼西地域(요서지역)의 난하의 옛 명칭이므로 결국 朝鮮縣(조선현)의 위치 역시 난하부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樂浪郡(낙랑군)의 25개 縣(현) 가운데 각기 살펴본 遂城縣(수성현)과 朝鮮縣(조선현)의 위치가 오늘날 요서지역의 난하부근에서 분명히 확인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2개의 縣(현)을 포괄하는 낙랑군의 위치는 위치상으로 韓半島(한반도)의 平壤(평양)지역이 아닌 遼西(요서)지역의 난하부근으로 보아야 옳다고 할 수 있다.


  Ⅲ. 세 개의 樂浪(낙랑)

  앞에서 樂浪郡(낙랑군)의 위치가 오늘날의 요서지역임을 확인하였는데 한편으로 樂浪關係文獻記錄(낙랑관계문헌기록)을 살펴보면 韓半島(한반도)의 평양지역에도 같은 ‘樂浪(낙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정치세력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三國史記(삼국사기) 新羅(신라)․百濟(백제)本紀(본기)의 초기기록에는 ‘樂浪(낙랑)이 新羅(신라)의 北邊(북변)을 침범하였다’라는 기사를 비롯하여 이들 국가와 이른바 ‘樂浪(낙랑)’ 사이에 충돌 및 접촉사실이 다수 보이는데, 高句麗本紀(고구려본기)에는 大武神王(대무신왕)15年條(년조)에 낙랑의 왕인 崔理(최리)가 고구려의 好童王子(호동왕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고구려를 북방에 있는 나라로 지칭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 등장하는 ‘낙랑’의 위치는 고구려의 남쪽과 백제․신라의 쪽으로서 대개 한반도의 중북부지방으로 보여지며 이는 곧 요서지역에 위치하는 낙랑군과는 구별되는 다른 實體(실체)임을 알 수 있고, 더욱이 太守(태수)가 아닌 왕이라는 통치자가 있음을 볼 때 한층 명백해진다.
  이 崔理(최리)의 樂浪王國(낙랑왕국)은 AD 37년에 고구려에 의하여 멸망하였다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적혀있다. 신라본기는 이 사실에 대해 ‘고구려도 무휼(大武神王(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키자 그 나라사람 5천명이 투항하여오므로 여섯 부락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高句麗王無恤(고구려왕무휼) 襲樂浪滅之(습낙랑멸지) 其國人五千人來投(기국인오천인래투) 分居六部(분거육부))라고 기록하였다.
  이어 崔理(최리)의 樂浪王國(낙랑왕국)이 멸망된 지 7년 후인 AD 44년에 그 지역은 後漢(후한)의 침략을 받아 빼앗긴 것으로 고구려본기에 나타난다.
  즉 ‘후한의 光武帝(광무제)가 병사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樂浪(낙랑)지역을 정벌하고 그 땅을 取(취)하여 漢(한)의 郡縣(군현)으로 만드니 이에 薩水(살수)(지금의 청천강)이남이 漢(한)에 속하게 되었다’고 하였는데ㅡ 종래에는 이 기록을 漢四郡(한사군)의 樂浪郡(낙랑군)과 연결시켜 해석하려 하였지만 그럴 경우에는 이미 자기들의 한사군의 낙랑군을 다시 정벌하고 그 땅을 취하여 郡縣(군현)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되므로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이것은 바다를 건넜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반도의 평양지역을 쳤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後漢(후한) 光武帝(광무제)가 설치한 평양 지역의 ‘樂浪(낙랑)’은 그 뒤 계속 존속하다가 AD 300년경에 고구려에게 속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新羅本紀(신라본기)에는 AD 300년에 낙랑이 신라에 歸(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고구려 본기에 들어갈 誤記(오기)인 것 같다. 이것은 AD 302년에 고구려 미천왕이 병사 3만을 이끌고 현도군을 쳐서 포로 8천명을 붙잡아 평양지역에 옮겼다는 고구려본기의 기록으로 확인된다. 다시 말하면 AD 302년경에는 漢人(한인)포로를 대규모로 옮겨놓을 수 있을 만큼 고구려가 평양지역을 확고하게 차지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平壤(평양)지역의 ‘樂浪(낙랑)’이 멸망한 후 고구려는 계속해서 遼西(요서)방향으로 공격을 진행시키는데 AD 313년의 ‘樂浪郡(낙랑군)을 쳐서 남녀 2천명을 사로잡았다’고 한 三國史記(삼국사기)의 기록은 평양지역의 ‘樂浪(낙랑)’과는 다른 또 하나의 낙랑이 존재하였음을 증명해주며 아울러 이 樂浪郡(낙랑군)이 곧 遼西地域(요서지역)에 설치되었던 漢四郡(한사군)의 樂浪郡(낙랑군)임을 알 수 있다.


  Ⅵ. 結論(결론)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漢四郡(한사군)의 하나인 樂浪郡(낙랑군)의 위치는 평양지역이 아닌 遼西地域(요서지역)에서 확인된다. 아울러 평양지역도 ‘樂浪(낙랑)’이 있었으나 이는 崔理(최리)라는 王(왕)이 다스리는, 다른 ‘樂浪(낙랑)’으로서 AD 37년에 고구려에 멸망당하여 일찍 사라졌다.
  그 뒤를 이어 後漢(후한)의 光武帝(광무제)는 AD 44년에 오늘날의 청천강이남지역을 차지해 제3의 ‘樂浪(낙랑)’을 設置(설치)하였고 이 낙랑은 AD 300년경에 고구려에 속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韓國古代史(한국고대사)에 등장하는 ‘樂浪(낙랑)’은 모두 세 개임을 알 수 있다. 三國史記(삼국사기)의 기록에는 樂浪(낙랑)이 AD 37년, 300년, 그리고 313년에 걸쳐 세 번 망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것을 단순히 기록의 착오로 보기에는 너무 큰 모순이 아닐 수 없으며, 이와 같이 상호 모순되는 史料(사료)들을 종래처럼 하나의 樂浪(낙랑)이 아닌 세 개의 樂浪(낙랑)으로 分類(분류), 解釋(해석)함으로써 漢四郡(한사군)문제에 관한 전체적인 인식에 體系性(체계성)과 合理性(합리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漢四郡(한사군)의 위치의 考證(고증)문제는 지금까지 쉽사리 결론을 내릴 수 없었던 복잡하고도 중대한 문제이다. 따라서 종래의 통설인 平壤(평양)지역 중심설을 부정하고 遼東(요동)․遼西說(요서설)이 보다 완벽한 정설이 되기 위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아울러 해방이후 국사학계의 끈질긴 식민사관논쟁과 최근 日本(일본)의 역사왜곡사건 등을 겪으며 ‘國史(국사)’에 대한 재인식의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요즘, 漢四郡(한사군)의 위치에 대한 이러한 견해의 대립은 단순히 몇 개 군현의 강역에 관한 논쟁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한국고대사의 전면적인 재인식과 깊이 관련되며 나아가 한국사 전반에 걸친 植民史觀 克服運動(식민사관 극복운동)의 일환으로서 우리 모두의 관심이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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