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 마침내 떠났던 정류장에 닿은 모양이었다. 나는 배나 무거워진 더블백을 챙겨들고 모자를 썼다. 차에서 내려서자 맞바람이 정류장 넓은 마당을 휘몰아쳐 왔다. 이제는 늦은 밤이었다. 풍대리로 가는 길을 물어 보았던 주간지를 파는 사내에게로 걸어갔다. 그는 연탄불에 바싹 붙어 앉아 쥐포를 뜯으며 소주를 들이키고 있었다.
  “청춘 여관이 어딥니까?”
  이미 취기가 얼근히 올라, 몇 시간 전에 내가 수녀원행의 차를 물었던 것을 기억해 내지 못하는 듯 했다.
  “조오기 사무실 뒤로 돌아가시오”
  “역까지 가는 차가 새벽에도 있습니까?”
  그는 털이 다 빠진 방한모자를 고쳐 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시골버스 정류장의 풍경이 일기조차 사나운 밤이라서 그런지 치가 떨리도록 황량했다. 병원을 떠나면서부터 설레었던 마음과 긴장에 하루 종일 지치고 시달린 것에 비해 청춘여관은 너무나 손쉽게 찾아졌으므로 기이한 느낌마저 들었다. 흐릿한 형광등 불빛이 새어나오는 9호실 앞에서 워커끈을 풀면서도 이곳이 신기루로 사라져버리지 않기를, 비록 뭇사내들의 정액이 범벅되었을 이부자리에서나마 두발 뻗고 잠들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하였다.
  “눈이 심해서 안 오실 줄 알았어요.”
  여자는 손거울을 벽에 세워놓고 콜드크림을 바르는 중이었다.
  두 뼘 남짓한 긴 형광등이 비추는 방안에는, 이부자리 한 채와 베개 두 개, 벽에 걸린 그 여자의 옷가지 몇 벌 외에는 아무 것도 없어 썰렁하였다. 나는 벽에 엇비스듬히 기대어 앉았다. 마사지를 하는 여자의 손가락 끝에는 벗겨져 가는 진흥 매니큐어가 애달팠다. 따뜻한 온돌의 훈기가 몸을 서서히 녹이자 오늘 내내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허기가 밀려왔다. 허기는 고독이나 절망만큼이나 확실한 감정이었다.
  “뭐 먹을 거 좀 시킬 수 있습니까?”
  눈두덩이 주위를 문지르던 여자가 거울을 통해 나를 쳐다보았다.
  “저런, 저녁을 안 먹었어요?”
  “점심때부터 지금껏 밥 구경을 못했습니다.”
  “가만있어 보자, 그럼 백반을 시켜드릴까요?”
  “아닙니다. 간단히 라면이나 끓여 먹었으면…”
  “그럼 잠깐만 기다려요. 부엌에 가면 라면이 몇 봉다리 있을거야. 내 끓여 줄께요.”
  그녀의 손 움직임이 턱에까지 와서 더 이상 갈 곳이 없자 일어서 나갔다. 그녀와 같이 자야겠다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무언지 일이 우습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짧은 순간에 까무룩 잠이 들었던지 문이 열리는 기척에 일어났다. 그녀가 모가 떨어져 나간 상에다 라면 냄비를 받쳐 들고 들어왔다. 언제나 낯선 사람 앞에서 밥을 먹을 때면 치밀어 오르는 쑥스러움을 견디기 힘들었다. 추운 곳에서 따뜻한 곳으로 들어온데다가 빈속에 따끈한 음식이 들어가니 훅훅 열이 달아올랐다. 그녀는 가아제 수건으로 콜드크림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번들거리던 콜드의 기름기가 닦여오자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풍상에 시달려 만만치 않을 적나라한 얼굴이 드러났다. 나는 모든 것이 슬퍼져 자칫 눈물이 흐른 것도 같았다. 그러나 밥상 한 귀퉁이에 놓인 찬밥덩이를 더욱 라면 국물에 넣고 묵은 김치와 함께 우적우적 삼켰다. 목구멍이 콱 메어왔다.
  “부득부득 먼 길을 가시더니 만나려던 사람을 못 만난 게지요?” 그녀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이래봬도 눈치 하나는 비호라구요.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이라면 하긴 만난들 뭘 하우. 애간장만 끊지” “그러나 꼭 만나야만 할 사람도 있는 것 같았거든요.”
  만약 잠시 동안이라도 로사 수녀를 만났다면 지금 나는 어떤 심경으로 어디쯤가고 있을 것인가 궁금했다. 그러나 회한과 감상으로 다소 정결하게 감격하며 밤 열차를 타고 대구로 향한다고 하는 것도 지금 내가 이 여자와 마주 앉아 있는 것보다 나을 것 없다는 생각이었다. 결국 우리가 구하는 것이 작은 불티처럼 사소한 위안인 바야.
  “하긴 나도 돈 몇 푼 떼어 먹히고 그나마 전셋돈이었는데 날리고선 이 여관에 와서 드난살이를 하며 그 쌍년을 쥐어 뜯어놓고 싶은 맘이 들기도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부질없어요.”
  여자가 이부자리를 폈다.
  “피곤하면 그냥 자도 돼요. 이 방값만 내게 치루고”
  심드렁한 어조였다.
  이튿날 새벽 눈을 뜨자 여자는 반쯤 입을 벌린 채 자고 있었다. 나는 대략의 차비만을 남겨놓고 그 여자의 머리맡에 돈을 털어 놓았다. 벗어 놓은 브래져와 팬티가 방바닥에 허물처럼 널려 있었다. 문을 열고 여관을 나서자 새벽안개가 자욱했다. 나는 미답의 땅을 발견한 것처럼 가슴이 설레었다. 이때까지 한 번도 이렇게 가슴이 설레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아니 있었다 해도 그것은 한 때의 섬광으로 빨리 사라져가 버렸던 것이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일 것임에 분명 하지만 이젠 얼마 안 남은 내 살아 있는 날까지는 충분히 그 불씨를 간직한 채 죽어갈 것 같은 자신이 느껴졌다. 역으로 가는 차가 왔음으로 나는 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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