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슈테판 츠바이크 / 펴낸곳 자작나무 / 8000원 / 287쪽 
‘폭력에 대항한 양심·칼뱅에 맞선 카스텔리오’는 학생들에게 자주 추천하는 책 중 하나다. 제 1·2차 세계대전기를 통해 독일에서 살았던 유대인 문학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이른바 ‘전기소설’들은 한결같이 매력적이고 특히 입문서로 제격이지만, ‘카스텔리오’는 그중에서도 인상이 뚜렷한 책이다. 글쎄, 어쩌면 에라스무스나 마리 앙트와네트나 푸셰를 다룬 다른 책들에 비해 이해의 폭과 깊이가 부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른다. 스스로 토로했듯 츠바이크는 “카스텔리오에게 완전히 빠져”든 상태에서 이 책을 썼고, 그런 만큼, 이해와 공감이 신랄한 해부와 더불어 빛나는, 그런 장면을 ‘카스텔리오’에서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제바스티안 카스텔리오는 16세기 제네바를 지배한 칼뱅에 맞섰던 학자이다. 그 자신 가톨릭교에 염증을 느끼고 프로테스탄트교의 대열에 합류했던 사람이지만, 카스텔리오는 칼뱅이 자신의 교리를 독단화시키는 데 단호히 저항했다. 16세기라면 종교 개혁의 여파가 계속되면서 한편 프로테스탄트교가 새로운 권위로 체계화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종교재판이, 처형이, 전쟁이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당시는 인문주의 유행의 끝무렵이기도 해서 에라스무스나 라블레 같은 매력적인 인문주의자들이 활약했지만, 그들은 폭력의 순환에 우회적인 비판과 풍자로 대응했을 뿐이다. 에라스무스는 싸움이라면 질겁을 했고, 라블레는 희극으로 갈등을 넘어섰다. 이들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쪽에서 압박을 받았으면서도 충돌에 휘말려들지는 않았다.
좀 늦게 태어난 카스텔리오는 다르다. 그가 활동했던 제네바에서, 상황은 처음에 모범적인 듯 보였다. ‘기독교 강요’의 저자 칼뱅은 종교개혁의 물결이 휩쓸고 간 제네바의 통치를 위임받은 후 오직 ‘하느님의 뜻’에 따라 도시를 재편하고자 했다. 결백하고 사심 없으며 스스로에게 엄격했던 이 젊은 신학자는 일체의 사치와 허영과 무질서를 추방하고자 했고, 한두 차례 위기를 겪었으나 결국 자신의 의지 하에 제네바를 복속시켰다. 축제일도, 꽃과 장신구도, 종소리마저 도시에서 쫓겨났다. 그것으로 충분했으련만 칼뱅은 좀더 나아갔다. 스스로 신의 뜻을 실현하는 자임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기에 더 가차 없고 무자비한 정책이 가능했으리라. 드디어 1553년 칼뱅은 프로테스탄트의 역사에서 최초로 종교적 이단자에 대해 사형 판결을 내린다. 의사이자 신학자였던 에스파니아인 세르베토가 삼위일체를 부정했다는 이유로 화형당한 것이다. 그토록 비판했던 가톨릭의 병폐가 개혁자들 사이에서 고스란히 답습되는 장면이다.
전 유럽이 술렁이는 가운데 카스텔리오는 분연히 일어선다. 그는 ‘이단자에 관하여’라는 책을 펴내 사상적 이견을 형벌로 다스리는 데 반대하고,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은 절대로 교리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을 뜻할 뿐이다.”라고 선언한다. 이미 이단을 죽인 권력자에 맞서는 길이니 응당 목숨을 걸어야 함을 모르진 않았으리라. 그럼에도 카스텔리오는 칼뱅과의 논전에 나서, 사실상 ‘유일한 양심’으로서 독재적 권력에 항거한다. 이 분기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무런 열정도 없이 나는 이 공개적인 토론의 무대로 들어선다.”는 카스텔리오의 고백 때문이다. 이념에 맞서 이념이, 광신에 맞서 광신이 일어서는 광경이야 흔하지만 카스텔리오는 오직 이성과 관용의 원칙으로, 그러니까 무력하기 짝이 없는 ‘제정신’으로 ‘들린 정신’에 맞섰던 것이다. (나치즘이 절정에 이르렀던 무렵 작가는 이 책을 쓰며 거듭 그렇게 되뇌었을 터인데,) ‘제정신’이 꼭 무력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 그것이 점점 ‘들려’ 가는 이 시절에 ‘카스텔리오’를 읽으며 깨닫는 보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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