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위에는 바람이 불었다. 사방에서 불어온 바람이 반사체를 스쳐 굴절하는 광선처럼 얼굴에 부딪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어둠은 그렇게 감추려 드는 버릇이 있는 것이다. 불빛이면 그냥 타버리면서도 되려 감싸 안으려 드는…. 어둠은 빛에 의해 타버린 후 잿빛이 된다. 불의 洗禮(세례)를 받지 않은 어둠은 無(무)인 것이다. 순수한 어둠이 잿빛과 함께 발밑을 흘러갔다.
  인근 마을의 불빛이 멀어 보였다. 그것들은 스타라이트 코프(Star light cope:적외선 관측기)를 통해서 본 경치같이 붉어서 나른한 느낌을 주었다. 아메바에 먹히는 단백질 같은―빛의 해체였다. 건너다보이는 外人部隊(외인부대)의 수은등만 파랗게 타올랐다. 그들은 자가발전을 한다. 그 불은 밝아 철사로 얽어 친 울타리와 망루 안에서 서성이는 병사까지도 볼 수 있다. 이쪽은 모든 불빛을 가려선 인간의 모습도 건물도 어둠속에 가라앉혀 버린다. 그래도 접근하는 外人(외인)은 숨을 죽인 채 기다리다가 불시에 나타나 멋지게 사로잡아 버린다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반대였다.
  밤새도록 불을 밝혀서 굳이 자기들의 소재를 알린다. 타인의 접근을 애초부터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그들의 불은 아침이 되어도 시퍼렇게 살아있는 것을 종종 볼 수가 있었다. 그때쯤이면 이쪽은 고요한 아침이 갑자기 깨어난다. 안개까지도 걷어 내려는 듯이 서두르는 것이다. 아침부터의 질주는 언제나 부산했다. 그들의 키가 큰 것은 가장 정중한 인사도 서서 하는 때문일 거라는 따위의 생각을 하며 그녀를 기다렸다. 한 밤중―열두시가 넘어 한시 사이의 어둠을 타고 그녀는 와야 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오지 않을 것이란 생각은 이미 하고 있었다. 그것은 확신이었다. 확신을 가지고 타인의 행동을 주목하는 것은 결과에 상관없이 즐거운 일인 것이다. 그것이 나쁜 일일까? 지금까지 그녀의 행동으로 다음을 점쳐봄을 그녀는 화낼까? 그녀는 스스로 원하여 수고를 했던 것이니까 그것으로 만족과 함께 자기에 대한 평가도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의 조그만 반란은 대범한 그녀에게 짜릿한 쾌감까지도 주었을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녀와 우리의 관계는 서로가 좋은 상태였다. 우린 그녀를 즐겼으니까. 뿐만 아니라 그녀도 우리를 향락했던 것이다. 사실은 그만큼의 분량으로 알려지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걸 다른 이름으로 미화하려 드는 것은 위선인 것이다. 솔직해질 필요는 누구에게나 있다. 우리는 그녀의 속내를 잘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아름다운 그녀래서 보스(boss)들처럼 외면할 것인가. 진실해지기 위해서 배반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만 한다.
  사열대위에 혼자 서있던 그녀는 모든 감정의 복합체로 보였다. 오만과 기쁨과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갖는 슬픔이 어우러져 있었다. 그것이 인간의 표정이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게 하는 인간성이었다. 무릎의 먼지를 털어내면서 나는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는 확고한 의식이 있었다. 무엇보다 후회는 절망상태에서 탄생하는 것이니까.
  나는 수없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무리(群(군))―나를 그토록 소속감으로 얽매던 人情(인정)의 주인공들―에게 느끼는 무서운, 거의 희열에 가까운 이질감과 외로움을 동시에 느꼈다. 나는 그들에게 그 이상의 어떤 감정의 반란도 선동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일어나서 걸으면 되었던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히 그들에게서 멀어질 수 있었다. 만약 그녀가 옛날처럼 모습을 나타낸다면 그녀는 여전히 세례를 받은 그들에게 숭앙받는 미네르바로서 그것도 좋을 일이었다. 갈등을 안고 나타나도 상관이 없을 것이었다. 극기하려 애쓴다는 것이 신에 가까워지려는 인간의 노력이 아닌가?
  보스들에 대한 우리의 예의는 조심스럽기만 했다. 그들이 우리보다 우수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곁엔 항상 그들이 있어주어야 했다. 대부분의 보스들이 퇴근을 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한둘 남은 그들은 우리의 행동을 몹시 규제하는 것이라서 우리끼리만이면 좀 더 자유로 워겠으나 그건 아니었다. 우리들은 술을 마시기 위해 한사코 울타리를 넘으려 하거나 돌아와서는 서로 싸우거나 했다. 술에 취한 우리들은 서로 얼싸안고 아이들처럼 소리 내어 울면서까지도 싸웠다. 그 점을 보스들은 아연해하며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난장판이 벌어지면 우리 딴엔 조용히 마무리 짓는다는 것이었으나 나중에 보스들이 꼭 알게 되었고 몰랐다면 일은 크게 벌어져서 그들조차 손을 댈 수 없이 되어버렸다.
  사고 때마다 우리가 헐떡거리며 보스들을 찾는 이유였다. 보스들은 그때마다 화부터 냈고 일이 크면 같이 당황도 했지만 대개는 잘 해결해주곤 했다. 보스들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해결책은 별것도 아니건만 딱하게도 우리는 그것을 생각해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事後(사후)에 듣는 보스들의 책망은 언제나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의 행위는 이미 충분할 만큼 규정되어 있었다. 가령 옷을 입어야할 경우엔 먼저 팬티를 입고 런닝을, 그다음엔 양말, 바지, 상의의 순서로 입되 바지의 단추는 밑에서 위로 상의는 위에서 아래로 채우라는 식이었다. 거기에다 보스들의 우수한 판단이 더해졌다. 때로 보스들은 우리들에게 어쩔 수 없는 놈들이라는 표정을 해보이길 잘했다. 그것은 모멸의 의미여서 우리를 퍽 쓸쓸하게 했다. 그들의 뜻에 도달되지 못하는 우리가 늘 안타까웠다.
  보스들이 달라진 것은 그녀가 그녀의 남편과 함께 부임을 해 온 뒤였다. 보스들의 신비는 그녀의 출현 이후부터 풍화되기 시작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온 것은 황사(黃沙)가 유독 심한 봄날이었다. 황사는 꽃가룻병을 몰고 오는 것이었는데 꽃가룻병은 물가가 지저분해지고 시력이 약해지는 일종의 안질이었다. 그 병은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가빠오는 열병이기도 했다. 황사가 불어오면 해는 붉으레하여 푸르던 소나무는 먼지를 뒤집어쓴 채 시들어버렸다. 그때쯤이면 우리는 누구나 그 열병을 앓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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