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入生(신입생) 환영공연 ‘리어王(왕)을 보고’

  새로운 東國人(동국인)을 맞이하고, 또 새 학기를 시작하는 때를 택함으로써 公演(공연)이상의 意味(의미)를 띠면서 시작된 이 演劇(연극)은 연습서부터 흥미를 불러 일으켜왔었다. 또한 演映科(연영과) 자체에서도 前例(전례)없이 10명의 배역을 요구하는 大作(대작)을 선택, 이 公演(공연)에 상당한 비중을 둔 것으로 보이며, 성과 또한 ‘상당했다’는 後聞(후문)이다.
  그러나 연극을 관람한 후 무언가 씁쓸하게 다가서는 餘韻(여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연극의 문외한이면서도 평소 많은 관심을 가져온 애호가의 한사람으로서, 東大(동대)연극의 빛나는 전통을 위해 이번 공연의 부정적인 측면만을 들추어 보기로 한다.
  먼저 作品(작품)의 選擇(선택)에서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셰익스피어의 四大 悲劇(사대 비극)중의 하나인 리어王(왕)은 너무나도 여러 사람에게 잘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따라서 이 作品(작품)을 선정했다는 것은 좀 더 잘 알려져 있는 내용을 가지고 새로운 觀客(관객)인 신입생에 친밀감을 주겠다는 의도가 개입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러나 신입생환영이라는 제한요건을 고려한다손 치더라도, 演劇(연극)이 그저 上演(상연)과 내용(이야기)의 傳達(전달)만이 목적이 아닌 이상, 또한 이것이 연극을 전공하는 演映科(연영과)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고려할 때, 보다 밀도 있고 實驗的(실험적)인 精神(정신)이 필요했었음을 우선 지적해 놓고 싶다.
  그런데도 이번 公演(공연)에서는 筆者(필자)의 안목 탓인지는 몰라도 단순한 이야기 전개이상의 것을 거의 찾지 못했다는 느낌이며 연출의 의도가 아무리 훌륭했다손 치더라도 관객에 전달이 되지 않았다면 결국 수포라고 밖에 볼 수 없겠다.
  年例的(연례적)인 행사의 의미로만이 公演(공연)의 意義(의의)를, 파악하는 매너리즘이었다면 불행한 일이다.
  막이 오르면서 광야에서의 리어왕의 獨白(독백)으로 이끌려지는 도입부는 作品(작품)의 脈(맥)을 짚어낸 것으로 그 자체만으로도 예민한 연출의 감각이 내보이는 동시에 먼저 觀客(관객)들에게 함축적인 暗示(암시)를 던져주었으나 리어왕의 모놀로그 대사 전달이 명확하지 못함으로 하여 성숙되어가는 劇(극)의 분위기를 반감시켰다.
  그리고 劇(극)이 진행됨에 따라 맨 처음 느꼈던 것과는 달리 하나의 藝術創造行爲(예술창조행위)를 이루어야 할 연출자의 손길을 거의 느낄 수 없었다.
  演劇(연극)이라는 하나의 總體的(총체적)인 效果(효과)를 創造(창조)하는데 있어 무엇보다도 原作(원작)에 대한 예리한 해석능력과 뚜렷한 感覺(감각)을 가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지 연극행위에 대한 열의와 진지성만을 느낄 수 있었을 뿐 觀客(관객)에게 뭉클한 감동을 주는 호소력이 너무 결여되고 있었다.
  한 例(예)로서 클라이맥스 부분을 들 수 있겠는데 그 부분에서 박진감이나 긴장감은커녕 지루함만 안겨주어 마치 팽팽하게 부풀어진 풍선이 한곳에 조그마한 구멍이 나 어느새 바람이 다 빠져버린 것처럼, 카다르시스를 기대해온 觀客(관객)들을 허탈감에 휩싸이게 한 것을 들 수 있다.
  이 같은 맥빠짐은 대단원에도 또한 엿보여 배역들의 한계를 드러냈다고 보겠다. 다시 말해서 기성연극의 어떤 타성을 벗지 못한 채 실험성이 결여된 듯 그저 극의 전개에만 급급한 느낌이다. 차갑게 내려앉은 무거운 분위기 이상의 것을 창조하지 못한 채 觀客(관객)을 진지하다고 착각케 하여 막이 내릴 때까지 숨통을 조여 갔었다고 밖에 볼 수 없었고.
  젊고 새로운 대학의 연극인으로서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의욕과 왕성한 실험정신. 동시에 차원 높은 상상력과 감각이 부족함 느낌이다.
  다음으로 演技(연기)면을 살펴보자. 배우의 연기란 표현성 있는 動作(동작)과 전달력 있는 대사를 통해 生動(생동)하고 變(변)하고 節調(절조)되고 완전한 創造(창조)를 이룩해낼 때 비로소 그 완전 實體的(실체적) 創造(창조)에 이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內的心像(내적심상)을 外的心像(외적심상)으로 표현할 때 비로소 그 연기자의 사명을 다할 수 있다. 그런데 켄트백작역을 두고 볼 때 켄트역의 배우는 마치 입만으로 하는 성우와 같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딱딱하게 막대기처럼 굳은 자세로 교과서적인 동작과 시선으로 시종 자연스러움이 결여되어 있었다.
  또한 리어왕역을 보면 따라와 주지 않는 화술에도 불구하고 강조적인 語感(어감)을 갖음으로 하여 화법에서부터 실패해 들어가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거슬리는 것은 대사가 명확치 못함을 들 수 있다.
  이에 비하면 고네릴역의 또렷하고도 극중 인물에 부합되는 정확한 음성은 돋보이는 것이었다. 끝으로 코오렐리아역을 들어 보자. 연극에서의 연기는 선이 굵고 보다 강렬하고 흥미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관객에 대한 호소력과 공감대마저 상실하여 연기는 개성적인 표현을 잃고 상투성 속에 허망하게 매몰되는 것이다. 그런데 코오렐리아역은 연극을 하기에는 너무나도 약한 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번 연기에 있어서 그녀는 자신의 배역에 끌려가는데 급급한 인상을 질게 뿌려주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아직 연극에 몰두하는 그 자신의 의욕만 앞섰을 뿐 소화력 없는 막대기 같은 동작에도 기인하겠지만 좀 전에도 말한 바. 연극을 하기에는 너무나도 스케일이 작은 선과 섬세(?)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의욕과잉에다 이직도 자신감 없는 듯한 연기에서 오는 부자연스러움이 보기에 민망할 정도였다.
  더욱이 演技(연기)하는 그녀의 가슴이 마치 새처럼 헐떡이고, 부녀간의 상봉 장면에서 전신이 굳은 채 눈가에 아롱진 물기가 조명에 부서질 때 무안하고 어색하게 느꼈던 필자의 감정은 지금도 떨쳐버릴 수 없다.
  그 다음으로 조명을 살펴보면, 조명은 주지하는바 可視性(가시성)과 개연성 그리고 구성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첫째 가장 기본적인 可視性(가시성)에서부터 이번 공연은 몇몇 실수를 한듯하다. 집합적이고 통일적인 이미지의 지속에 실패하여 산만한 느낌과 함께 밝기, 색깔, 각도의 선정문제에서부터 좀 더 다듬어 들어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기재의 부족이 큰 원인이겠지만 대략 위와 같이 살펴보건대 이번 공연은 어떤 行事的(행사적)인 意義(의의)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한 目的不明(목적불명)의 공연이라고 감히 결론지을 수 있겠다. 劇(극)적 효과 면에서도 감정의 카타르시스보다는 감상적인 페이소스로 전락되고 말았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하나 더 덧붙이고 싶은 것은, 시선이나 자세, 발의 위치 그리고 動作線(동작선) 등에도 유의하여 좀 더 나은 극전개의 변화를 모색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그리고 매끄러운 대화의 연결 역시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캠퍼스의 무제약과 왕성한 실험정신 그리고 진지하게 파고드는 리허설의 중첩된 연습으로 다음번의 연극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좀 더 나은 감동을 안길 수 있기를 바라며 또한 좀 더 관객을 유치할 수 있는 방안이 모색되길 부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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